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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선생 Feb 11. 2020

페루살이-가난한 자의 크리스마스

펠리즈 나비다Feliz Nabidad(기쁜 크리스마스)

가난한 이방인에게 축복의 음식을 ...

                                                                                                                

 따뜻함과 상큼한 풀내음이 나는 ‘영원한 봄의 도시’란 말은 페루의 태평양 연안 도시 뜨루히요 별칭이다. 열흘 전 5일 간 O.J.T.를 와서 어렵게 구해놓은 월세집으로, 리마에서 짐을 끌고 들어 온 이튿날은 마침 성탄전야다. 거리 곳곳에 세워져 있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생뚱맞게 느껴지는 연말인데 낮에는 햇볕이 뜨거워 그늘을 찾게 되고 해가 지고 나면 서늘해져서 긴팔을 입어야 한다.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 5층짜리 아파트 네 동이 일그러진 미음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는 D동 402호. 이 집에서 2년 간 잘 살기를 바라면서 현관에 들어서니 앞동 옆동 가가호호가 커튼을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든 집들의 거실 전면이 다 유리로, 한 치의 비밀도 없다는 듯이 서로가 서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다. 그래서 집집마다 커튼을 쳐 이웃의 시선과 햇볕을 가리고 있다. 이 작은 아파트 단지가 예쁜 것은, 여러 집들이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밖으로 내걸어 놓고 있고 그 배경이 돼 주는 하얀 벽면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402호는 커튼도 어떤 가구도 없다. 벽과 바닥, 세면대와 샤워기가 전부다. 세 개의 방에 있는 유리창들은 틀도 없이 전면이 유리로만 돼있다. 신발을 신고 거실은 물론 침대방까지 들어가는 입식이 달갑지는 않지만 바닥을 다 쓸고 닦고 좌식으로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다. 커튼을 치지 않아 다 보이는 상황에 난감했으나 한국인이 몇 명 밖에 없는 이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주목받기는 마찬가지다. 그냥 ‘나는 한국인이다’를 뽐내면서 즐기기로 했다. 혼자 있어도 젊잖게 옷을 입고 우아한 척 내숭을 떨며 하루를 보냈다. 아직 현지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리도 어두워 뜨루히요에서 나는 네 살 정도 아이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2년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유리창에 종이를 다 붙여버릴까? 어떤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해봤으나 거실 유리창만 해도 내 보폭으로 여덟 걸음이나 되는 전면 유리를 다 가리는 방법은 커튼밖에 없다. 더군다나 처음 맞이하는 여름 성탄은 이상한 나라에 온 듯 혼란스럽고 거리에 흘러넘치는 캐럴은 무척 낯설다. ‘흰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란 가사가 귀에 맴도는데 땡볕이 쏟아지는 거리에 마네킹산타가 털옷을 입고 있다. 

 주인에게 여러 번 전화를 해서 겨우 낡은 매트리스 한 장을 얻었고 부랴부랴 이불을 한 개 샀기 때문에 몸을 누일 수 있다. 눈을 감고 지도를 그려보니 참 멀다. 아득하니 서글프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행복을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

 이튿날은 성탄전야다. 밤에 자려고 누웠다가 깜빡 놀라 거실로 뛰어나왔다. 폭죽인지 불꽃놀이인지 큰 소리가 우박 쏟아지듯 했다. 자정에 이게 무슨 일인가? 집안에도 밖에도 트리며 여러 가지 크리스마스 장식이 요란한 이집 저집에서 커튼을 열고 내다봤다. 다들 그 시간까지 파티가 한창이다. 아이들은 산타를 기다리는지 마당에 나와 뛰어놀기까지 했다. 크리스마스가 일 년 중 제일 큰 명절이라고 한다. 그래서 멀리 있는 가족들이 모이고, 가족을 찾아 떠나고, 파티를 하고 밤새 이야기를 나눈다. 알고 보니 그날은 자정에 또 식사를 한다. 혼자인 나는 잠이 달아나 버렸고 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커튼도 없는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다른 집 커튼에 비치는 실루엣을 보며 '저 집은 어떤 상황인가? 또 이 집은?'하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참 외롭다.

 한밤중인 1시 40분 경 누가 초인종을 눌렀다. 나를 다 보고 왔을 거란 생각에 거리낌 없이 문을 열었다. 어깨와 가슴을 드러낸 드레스 차림의 금발 할머니와 열 살 정도 돼 보이는 소녀가 음식을 들고 서 있다. 그녀의 빠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난 감사Gracias만 연발했다. 하루 종일 날 봤을 지도 모른다. 그릇도 아무것도 없어서 종일 바나나, 망고, 물만 먹는 것을 봤는가보다. 마침 배가 고파 그들이 가지고 온 칠면조 고기와 초코렛 우유와 과자를 다 맛있게 먹었다. 노숙자 아닌 노숙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 물건들을 멀리하고 무소유로 산다는 것과 자의가 아니라 그냥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은 다르다. 

 고민이 깊어진다. 여기서 2년 최대 연장을 한다 해도 3년밖에 살 수 없는데 살림살이들을 얼마만큼 장만해야 되는지. 또 떠날 때 그것들을 처분 하는 것도 문제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프다. 떠나올 때는 현지에 맞춰 잘 적응해 살 수 있을 거라 다짐했지만 현실은 언제나 이상과 다르게 어렵다. 

 크리스마스 축복이 내게 왔으면 좋겠다. 좋은 방법을 기다려보면서 이웃의 정으로 포만감에 찬 배를 끌어안고 푹 꺼져내려 가는 매트리스에 몸을 눕혔다. feliz nabidad! 메리 크리스마스! 


                              톱밥으로 길바닥에 그린 성화



*여기에 실린 글과 사진을 함부로 도용하는 것을 금합니다. - 이석례 (필명 : 실비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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