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연휴 제주여행II
이번 제주 여행은 겨울이 진(陣)을 물리지 않은 2월인지라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따뜻할 서귀포 방향에서 돌아다니기로 하였다. 전날 한라산에서 파아란 하늘과 청량한 공기를 맘껏 누린 우린 여행 내내 그리할 것 같으리라 기대했건만 다음날 아침 펜션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하면서 날씨를 보니 야외활동하긴 글렀다. 쌀쌀하고 비까지 내리는 데, 섬이라서 그런지 일기예보가 도통 맞질 않고 심지어 날씨 현장 중계조차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실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곳을 급히 찾다 보니 여미지 식물원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곳에 도착할 땐 비가 잦아들어 먼저 야외를 돌아보고 난 후 실내 온실로 들어갔는데, 수목원 야외엔 매화가 피어 있었다. 어떤 매화는 수양버들처럼 가지들이 흘러내리는 듯한 것도 있었는데 능수매라고도 하는 수양매 (水揚梅)였다. 그 자태가 우아하여 한복을 입은 여인의 뒤태와 같았다.
다소 쌀쌀했던 수목원 야외 산책을 끝내고 실내로 들어오니 화사하게 핀 각양 꽃들이 우릴 맞이해 주고 있었다. 증남미가 원산지라는 다양한 색의 카틀레야(Cattleya)가 속에 품은 열정을 감추지 못하고 피어나고 있었다. 그 자태가 아름다워 중남미 여러 국가들의 국화들로 지정되기도 하였는데, 콜롬비아 (Colombia)는 Cattleya trianae (카틀레야 트리아네)로 꽃잎 가운데의 노란색, 파란색, 붉은색 배합이 콜롬비아 국기를 떠올린다 하여 국화로 선정되었다 하고, 베네수엘라 (Venezuela)는 Cattleya mossiae (카틀레야 모시에)를, 코스타리카(Costa Rica)는 이전에 Cattleya skinneri로 이름 불린 카틀레야의 가까운 친척이자 넓은 의미의 카틀레야 그룹으로 통합되기도 하는 Guarianthe skinneri (과리안테 스키네리)를 국화로 정하였다고 하니 남미에서는 그야말로 사랑을 듬뿍 받는 꽃인가 보다. 이 꽃을 처음 접한 것은 당시 서초동에 사시던 한 지인의 가정에 초대되었을 때 양재 꽃시장에서 선물로 드릴 꽃을 찾다가 만났던 것인데, 그 화려함이 스페인계열의 무희가 춤추는 것 같아 보였다. 당시 진한 향기가 매혹적인 꽃으로 기억에 남았는데 여미지에서 다양한 카틀레야를 다시 만났다. 날씨가 궂어 다소 울적할 수 있는 날을 환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식물원의 열대식물들과 선인장 전시 공간은 이국적 풍경을 자아내었고 물의 정원과 꽃의 정원의 다양한 식물들은 아침 다소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올려 주었다. 여미지를 떠나 일 년 전 이맘때 방문하였으나 연휴기간 문을 닫아 아쉬움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D 중식당을 찾았다. 자장면과 짬뽕과 탕수육의 환상의 메뉴를 시키고 가족이 다 같이 조금씩 맛보며 여럿이 온 장점을 한껏 살렸으나 맛은 소문에 비하면 평범하였고 우리 집 근처 동네 중식집의 탕수육보다 다소 떨어지는 질감을 느낀 것은 날씨 탓일까? 그다지 힘들지 않았던 전날 한라산 일정과 돌고래를 본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오후엔 바닷가 카페에서 쉬기로 하였다. 평일인지라 사람이 많지 않아 게우지코지 카페란 곳에서 오후 시간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였는데 제주 올레길 6코스에 위치하고 있는 카페였다. 카페 앞에 바닷가에 바다와 부딪치며 꿈틀거렸을 용암은 수많은 시간이 흐르며 거친 용암 바위들 사이로 뿌리내린 강인한 생명력의 작은 나무들을 틔어 내며 숨죽이고 있었다.
올레길 6코스의 지극히 짧은 구간이지만 바닷가를 따라 난 길과 기암괴석들처럼 보이는 온갖 바위들이 걸으며 보기 좋았고, 관목들 사이로 검은 이마직박구리의 독특한 새소리와 동박새의 바지런한 움직임에 따른 숨바꼭질 역시 즐거움을 선사하였다.
이번 일정에 숲길을 걷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가족으로서는 제주 서귀포 치유의 숲을 빠뜨릴 순 없었고 예약해 둔 대로 방문하였는데 안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으니 주차장 옆 인접 숲 속 벤치에 앉아 빵과 커피를 마시고 숲 산책을 시작하였다.
빵은 오전에 서귀포에서 요새 핫하여 줄지어 번호표 받아가며 산다는 봉주르마담 빵집에 들러 샀는데, 부지런을 떤 덕인지 우리가 빵을 산 후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기표를 받아가며 빵을 사는 풍경이 벌어졌다. 밀푀유 앙버터 빵이 특히 인기가 있는지 일인당 두 개까지만 판매하였다. 이 빵이 나올 시간이 되려면 조금 기다려야 해서 몇 안 되는 좌석에 앉아 기다리며 아침 커피와 팔고 있는 빵을 먹으며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우리 옆자리엔 중년 여성분이 혼자 아침식사로 빵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함께 기다리다 보니 우리와 말을 나누게 되었다. 고3 엄마인데 한 달 살기로 제주도에 내려와 여기저기 다니고 있는 중에 우연히 이 빵집에 아침식사 겸 들렀다고 한다. 그런데 유명한 빵집이라 놀라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데, 고3 엄마가 아이를 두고 여행 중이라는데 우리는 이분께 놀랐다. 하지만 아이가 혼자 자기 할 일을 워낙 잘하고, 엄마가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넓은 마음을 가진 남편의 아량으로 이렇게 여행 중이라고 하시니 이해가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고 번호표를 받은 사람들은 비좁은 빵집 안과 밖에 서서 어수선하게 서성이고 있는데 젊은 남녀 직원의 얼굴은 해맑다. 청년 직원이 새로 시도하여 만든 제과인데 한번 드셔 보라고 무료 시식기회를 주었다. 그 바쁜 와중에 혼이 나갈 만도 한데 젊은이가 안정적이다. 찰나에 말을 좀 섞어 보니, 아파트 단지 내 동네 빵집으로 그냥 연 것뿐이고, 제과점 주인이신 제빵사분께서 진솔하게 빵을 만들어 왔는데 입소문과 방송을 타면서 핫한 제과점으로 떠올랐다고 계면쩍어한다. 이 유명해진 동네 빵집에 묘한 여운이 맘속에 남겨지면서 기다렸다 받은 빵을 가지고 오후에 치유의 숲을 찾았던 것이다.
이 치유의 숲은 벌써 세 번째 방문인데 올 때마다 참 좋다. 각종 나무들 특히 높이 치솟은 편백나무와 삼나무 숲이 좋고 동백과 서어나무들 그 외에도 각종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사이를 잘 닦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정말 '치유'가 된다. 이전 글에 썼던 것처럼 이렇게 자연 속에서 걷는 것은 우리의 면역 체계를 활성화시켜 주고 마음의 우울함도 사라지게 해 주고 인지기능도 좋아지게 한다. 만병통치약은 장날 약장수의 게걸진 목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연 속을 걷는데서 나의 활동을 통해 온몸으로 공급되고 있다. 세포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말이다.
그 이후 날씨기 비교적 좋은 날 동백꽃이 화사하게 반겨줄 카멜리야 힐을 찾았다. 전 세계에 걸쳐 수집한 500여 종류의 동맥나무가 무려 6000그루 정도 심겨 자라고 있다고 하니, 동백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은 특히 이 맘 때 제주에 오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공원이다. 이곳이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 비교적 초기에 우리 부부가 와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시골 아저씨 같은 분이 우연히 우리를 이곳저곳 소개해주시며 동백기름이 좋다고 하시며 자상하게 알려 주셨는데 알고 보니 이곳 설립자이셨다. 그런 기회는 앞으로도 얻지 못할 것이었는데 소탈하신 그분의 모습에 우린 제주에 올 때, 특히 이 무렵에는 꼭 이곳을 들리곤 한다. 특히 동박새들과 조우할 경우가 많아 기대가 되곤 하는데 11월 중순부터 하순까지는 애기동백꽃으로 시작하여 12월 말에서 1월에 걸쳐 만발한다고 하며 2월에는 토종동백이 만개하고 3월에 걸쳐 통꽃으로 떨어지며 장관을 이룬다는데 우리가 간 때는 토종 동백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다른 동백은 질 무렵이었던가 보다.
자연이 주는 풍경은 항상 풍요롭고 잔잔한 기쁨을 안겨 준다. 올해도 동백꽃은 이렇게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