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교회이야기

김제를 가다

by 이수철

김형과 사모님께서 자신들의 휴가를 나와 함께 하고 싶다 하여 찾은 곳이 김형의 고향 김제이다. 김제에 도착하고 그가 아는 맛집을 선택했다. 그중에서도 익숙한 동네의 식당인데 이 먼 동네에 시골집 같은 곳에 손님이 만석이다. 건물 안에 많은 방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 집에 모여 행사라도 하듯 손님이 많다. 반찬이 일단 간이 딱 맞다. 짜지도 않고 맵지도 싱겁지도 않은 도의 경지에 이른 간 맞추기다. 된장에 붉은색을 지니면서 짜지 않게 간을 맞추기는 여 지간 하게 어려운 게 아니다. 또한 시래기가 부드러웠다. 두 그릇을 비웠다. 많이 먹고 싶지 않았는데 양파 김치는 처음 먹었는데 시큼한 맛에서 풍기는 향미는 입속을 맴돌았다.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평선을 가진 곳이다. 금산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산을 품고 있는 산은 모악산이다. 모악산( 母岳山)은 '큰뫼' 혹은 '엄뫼'라고 불리었다. 어머니산으로 불리면서 모악으로 불렸다. 원래 악(岳)은 일반 산보다 크고 험준해서 어머니산의 풍모를 지니는 산에 악(岳=嶽)을 붙인다.


설악산(雪嶽山, 관악산(冠岳山)처럼 크고 높은 산이다. 유일하게 지평선을 가진 김제평야를 둘러싼 곳에 우뚝 쏟은 곳에 모악산의 위풍을 당당했으리라. 크다는 큼을 금으로, 뫼를 산으로 하여 금산으로 불리는 데 실제로 이곳은 천을 따라서 금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동네 이름도 금사면, 금구면이 있다. 금산은 호남의 최대 곡창지대인 김제, 만경평야가 있고 사금(砂金)이 많이 생산되어 금산(金山)으로도 불렸다.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이 모악산 아래 위치하고 있는 이유이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둘째 아들을 왕위를 세우려 하자 첫째 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감금한 곳이 '금산사' 절이 위치한 김제 모악산이다. 금산사는 미륵 불교의 총본산으로 불리는 곳인데 금산사의 3층 미륵전에 어마 어마한 미륵불이 그 위엄을 숨기고 조용히 있다.


후천개벽사상을 내세운 강일순이 증산교를 시작한 곳이 이곳의 금산의 모악산 자락이기도 하다. 강일순이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곳은 모악산 대원사의 칠성각이다. 1902년 '천지개벽이 일어날 때 모악사 주변 30리 안에 들어온 자들만 살아남는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나라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백성의 삶은 피폐한 시기에 이 모악산 근처로 몰려들어왔다. 모악산 근처는 증산교의 여러 갈래 들이 종교의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나무 종탑에서 품어 나오는 장맛비의 습기에서 품어져 나오는 오랜 나무 결의 향기에는 무슨 사연을 품은 듯했다. 오른쪽에 벽돌로 만든 신식 교회가 있고 왼쪽 오랜 기와집 건물로 들어섰다. 우리 김형은 내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이 교회가 남녀가 따로 예배를 볼 수 있게 만든 교회인데 기억(ㄱ) 자 형태의 교회 건물이라고 했다. 먼저 온 이들이 설명을 걸쭉하게 들었는지 만족스러운 서사에 감명 나는 목소리가 난다. 우리는 그런 사치스러운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위치도 위인도 아니었는지 셋이서 조용히 예배당을 들어섰다.



중학교 다닐 때 교회에서 보았던 일자의 예배당의 긴 의자는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음악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 의자이다. 찬송가나 음악책을 두고 큰소리로 찬송도 노래도 불렀다. 이 교회에는 나무벽 위에 액자에 3명의 초상화가 있었다. 장로, 목사, 선교사라는데 그런가 보다 생각을 했는데 여기에 대반전이 있다는 사실을 집에 와서 알게 되었다.


모악산에서 몰려오는 소나기가 주차장에 쏟아져 내렸다. 금산사를 몇 번이나 가는 길목에도 이 교회가 유명한 줄을 몰랐다. 스토리를 들어 보면 더 놀라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 종교의 성지에 도전장을 내밀고 온 선교사들이 있었다. 호남 선교 7인으로 불리는 테이트(L.B.Tate, 최의덕) 선교사이다. 테이트가 전주에 도착하여 서남부를 순회하고 전도하고 김제, 정읍, 익산, 남원 등 전북지역으로 순회하게 된다. 정읍을 가기 위해 모악산 자락을 넘어서 금산리를 지나다 1904년에 한국 교사에 이름을 남긴 이자익 목사와 조덕삼 장로이다. 그가 만난 시기는 이들은 목사와 장로의 사이가 아니라 부유한 집안의 주인과 머슴인 마부였다. 목사는 한 때 주인을 섬기는 마부였고 마부의 주인은 장로이다.



처마 밑에 달린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이자익 목사이고, 오른쪽이 조덕삼 장로이다. 얼핏 보면 목사가 좀 더 있어 보이고 조덕삼 장로 신도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주인과 하인의 관계인데 이자익 목사는 조덕삼 장로의 집에 마부였다. 조덕삼 장로의 할아버지, 아버지는 평안에서 태어나 중국 봉황성, 고려문을 넘어 홍삼 등을 장사하던 무역상이었다. 그의 아버지 조종인이 더 넓은 김제평야와 금이 많이 나던 금산에 와서 더 큰 꿈을 품고 내려올 결심하고 배를 빌려서 군산에서 만경 포구를 거슬러 김제읍을 지나 금산에 정착했다. 조덕삼은 거상의 아들로 대지주인 아버지의 아래에서 앞길이 보장된 사람이었다.


거상이면서 대지주인 조덕삼의 집에서 마방을 운영하던 조덕삼의 집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테이트 선교사 일행이 이 집을 말이 쉴 수 있도록 마방을 찾았고 조덕삼을 만나게 된다. 조덕삼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고 자신의 사랑채를 내어 주게 된다. 내어준 사랑채가 지금의 금산교회이다.


이자익은 경남 남해출신으로 가난한 집의 외아들이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여섯에 어머니도 여의었다. 친척집에서 꼴 베러 나가는 삶이 싫어 열두 살에 고향을 떠나 배를 타고 하동을 거쳐 순천에서 금산을 오게 된다. 금산은 전국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고 금산에서 유명한 거상이면서 대지주 조덕삼의 집을 우연히 찾는데 자신을 마부로 받아주게 되어 생활한다. 이자익은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아이들이 한문 공부하는 것을 들으면서 천자문을 익혔다. 이때에 테이트가 방문하게 되고 조덕삼과 이자익은 예수를 영접하게 되고 금산교회를 섬긴다.


한 명은 주인으로 한 명은 머슴이었다.

그러던 중 '금산교회 장로 선출'이 있게 된다.


교회의 장로를 세우는 선거였다. 조덕삼은 김제에서 제일가는 지주였고 금산교회도 많은 후원을 했다. 조덕삼은 이자익보다 15살이나 많았고 금산교회의 설립자였고,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장로로 선출된 사람이 주인인 조덕삼이 아니라 마부인 이자익이었다.


결과에 조덕삼과 이자익도 놀랐지만 선출에 참가한 선교사들도 적잖게 놀랐다. 갑오경장으로 인해 신분제가 철폐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신분제 사회였고 주인이 떨어지고 종이 선출되었으니 '이를 어쩐다'라고 걱정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더 놀라운 일이 한번 더 일어난다. 조덕삼이 선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집에서는 주인과 종으로 교회에서는 책임을 지는 장로와 평신도의 반대되는 모습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이에 멈추지 않고 조덕삼은 15살이나 자신보다 어린 이자익 장로를 잘 섬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자익의 목회를 위해 평양신학교에 보낸다. 학비 전액을 지원해주고 훗날에 자신이 장로가 되었을 때 자신의 종이었던 마주 이자익을 목사로 초빙해서 금산교회의 담임목사와 장로로 함께 섬기게 된다.





실제 마룻바닥과 바닥 사이가 빈틈이나 헤어진 틈이 하나 없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었다. 다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보았을까 손으로 바닥을 만지작거리면 나무 한 칸의 가운데는 움푹 파여서 들어가 있다. 걸레질을 하다 보면 나무들은 움푹 들어간다. 내가 살았던 어린 시절의 우리 집 마루도 하도 걸레질을 많이 해서 가운데가 휘듯이 들어가게 된다. 필시 니스칠을 하기 전에 그렇게 되어 보인다.


교회에 예배를 보면서 설교단에서 오른쪽 즉, 바라보는 위치에 남성을 앉게 하였다. 남성을 향한 것은 유교적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고, 그 왼쪽에 커튼으로 여성들이 앉아서 귀로 듣게 하였다.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예배를 보게 하여 서로 격리시키지 않고 동시에 들을 수 있게 한 것은 아주 새로운 발상이었다.


여성 예배실의 대들보에 들어선 상량문은 한자가 아닌 한글이었고, 남성 예배실에 들어선 상량문은 한자였다. 일반적인 집보다는 반가(班家)에서만 상량식이나 상량문을 만들었고 이에 축문을 올리는데 이 상량식에 성서의 구절을 한자로 새겨 쓴 것들이 인상적이다.


上 我知此身 猶土室唯 幕雖壞然有 上帝經營 非人手所作也 悠久於天吾處 此嘆息欯淂 自天而降之室 若衣披體旣淂 其衣體不復 裸吾曺尙處 此幕勞而 嘆息非欯 去此室乃欯淂 其室致 死丁而生存 爲我行此者 上帝也 賜聖神 爲質故心恒安 (후고 五:一~六上半)


번역


고린도 후서 5장 1~7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 이로라.


아래는 여성 예배실에 있는 한글 상량문구이다.


일천구백 팔년 양 사월 사일 음 삼월 삼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리라


-고린도전서 3장 16절, 17절-


금산교회에 당시에 사용하는 풍금 대신에 피아노가 놓여있다. 교회의 건물을 지으면서 화려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예배당을 단아하게 마름질을 성실하게 한 표시들이 난다. 군더더기 없는 마루와 기둥, 그리고 창호로 만든 창문들이 인상적이다. 당시 조덕삼과 함께 교회를 건축하면서 건축에 봉사한 사람들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줬는데 그들의 손길이 느껴진다. 벽돌 하나 주춧돌 하나 그리고 마룻바닥 한 장에서 그들의 기도소리가 들린다.


함께한 김형의 사모님께 억지로 찬송가 한곡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굳어진 손가락에 나오는 찬송을 통해 그들이 품고 만들고자 했던 사회를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최고의 미륵불이 있는 김제 금산면의 금산사를 가는 길목에 한국 최고의 교회이야기를 품은 곳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른편에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 앞에서는 박물관이 신축되어 있었다. 우리가 간 토요일은 문이 닫힌 채 있었기에 박물관을 관람을 하지는 못했다. 꾸준히 몇몇의 차량이 주차를 하는 것을 보면 성지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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