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성지 무주

조선왕조실록을 사수하라

by 이수철

친구가 무주구천동 덕유대 캠핑장의 캠핑 모습을 인스타그램으로 어젯밤에 올렸다. 혼자 갔다는데 곧바로 댓글로 연락을 했지만 읽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혼자 졸다가 멍하니 있다가 자버렸다고 한다. 오늘 아침 침 8시 30분이 넘어서는 시간에 문자의 답이 왔다. 오려면 먹을 것이 없으니 라면만 사 오라 한다. 부랴 부랴 집에 있는 라면, 김치, 밥, 음료수, 드립 커피 등을 챙기고 비옷도 하나 넣고 덕유산으로 향한다. 무주구천동을 가려면 대전 통영 고속도로로 가면서 왼편에 적상산을 바라보게 된다. 적상산(赤裳山)은 산이 마치 붉은 치마를 두른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은 구름이 휘감고 있어서 구름 위에는 천공의 성 라퓨타와 같이 마치 숨겨진 성이라도 나올 듯하다.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1시간이 조금 넘어서면서 도착한 시간이 11시 즈음이다. 입구 게이트에서는 예약자 한 명만 차가 통과된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터미널이 있는 곳 가까이 넓은 주차장에 주차하고 친구가 내려와서 픽업을 해주었다.

이 친구는 나와 나이가 같아서 동시대를 살아왔고 대전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친구이다. 우리 집 아이들을 데리고 이 친구 집에서 영화도 보고 음악 감상도 같이하고를 많이도 했던 관계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디오 동호회에서 만났다. 1990년대 말부터 DVD와 함께 5.1 채널로 된 서라운드 음악을 듣기 위해 그 무거운 스피커나 앰프를 들고 동호인들의 집들을 방문하는 즐거움이 컸다. 필자가 오디오를 시작한 이유는 시골에서 잡음이 심한 FM 주파수로 들었던 음악을 내가 당당하게 음반을 구입해서 듣고 싶다는 꿈을 꿨기 때문이다. 적금을 부어서 3년 만에 적금을 타고 용산전자상가를 돌아다니면서 스피커와 앰프를 구입했다. 그 무거운 스피커를 지인의 승용차에 실어 갖다 달라는 부탁도 서슴지 않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우중 캠핑중에도 책을 들고 있는데 그 책도 음악에 관한 책이다.


음악이 시들해진 틈을 타서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진동호회를 가입하여 출사를 다녔다. 나 자신도 그 친구가 속해 있는 사진동호회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그 후에는 캠핑을 시작했는데 바쁘게 생활하다 나는 캠핑 몇 번 가고 장비는 창고 속으로 가고 이 친구는 유럽, 노르웨이, 동유럽 등지로 캠핑여행을 자주 다녔다. 그 이후로 만나질 못했는데 최근에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면서 사진이 한두 장 업로드가 되어 나도 팔로잉을 신청하고 리액션과 답글을 한 번씩 달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댓글로 그 친구가 보고 싶기도 하고 산속에 야영장에서 라멘도 한 그릇 먹고 싶은 그런 로망을 을 오랜만에 가졌다.

덕유대 오토캠핑장은 4계절 내내 인기가 좋은 곳으로 예약이 쉽지 않은 곳이다. 그 이유는 전기를 사용할 수 있으며, 그 옆에 차를 주차를 할 수 있고 산수와 풍경이 뛰어난 곳이다. 홈페이지 예약 또한 인기가 너무 좋아서 좀처럼 잡기가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이 친구가 예약한 곳은 클래식(?)한 캠핑 지역으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단지 옛날 방식으로 캠핑을 하는 곳에다 입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사용료가 저렴한 곳이었다.


새삼 텐트드을 보니 우리 집에도 어느 창고에 텐트와 함께 여러 장비들이 있다. 집에 아이들을 설득해서 여기를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들게 만들었다. 그녀와 그는 캠핑을 한 지가 벌써 15년이 넘었다.

덕유산 깊은 산골에서 내려오는 물길에 물놀이를 하는 곳은 무주구천동이다. 이곳은 평상도 빌려주고 여기저기에서 물놀이 기구들을 팔고 있다. 무주구천동(茂州九千洞)은 덕유산 국립공원 정상인 향적봉(1,614m)에서 동북쪽으로 25Km에 이르는 계곡을 말하며, 구천동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향적봉기(香積峰記)'에 구천 명의 승려들이 수도하던 곳이라는 기록에 유래를 찾고 있다. 스님들이 이토록 많이 왜 여기서 수도를 했을까?


시원한 여름에도 좋은 곳이지만 겨울 덕유산 꼭대기를 가는 곤돌라는 타기전 날 이곳에서 숙소를 예약하는 손님들이 많고, 가을에는 단풍나무가 많아서 또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양수발전소의 하부저수지이다. 이 불은 끌어올려서 산 정상의 상부저수지에서 내리면서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을 일으킨다. 저렴한 심야시간의 전기를 이용하여 물을 끌어올린다.

산 정상의 상부저수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아래 하부저수지이다.

양수발전소 산 정상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덕유산 정상이다.

적상산성(赤裳山城)

적상산성이 안국사 아래에 둘러싸여 있다. 적상산 자체가 천혜의 요새와 같다. 산에 오르기가 가파르며 바위로 둘러싸여 있기에 외세로부터 이곳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지금은 산정산으로 오르는 찻길이 꼬불꼬불하지만 그 시절에 이런 큰길 없이 이 산정산까지 오는 길이 이만저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지상의 거주지 근처에 사고를 두었기 때문에 불타고 소실되어 없어지고 유일하게 임진란 이후에 남은 전주사고를 토대로 다시 시내가 아닌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산으로 옮겨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은 깊숙한 산에 보관한다. 또한 임진란 때 나라를 지키고 싸우던 스님들을 높이 평가하여 절에서 사고를 지킬 수 있도록 호국사를 짓는다. 호국사에 거주하는 스님들로 하여금 사고를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이쯤이면 무주 골짜기에 왜 느닷없이 태권도원이 생겼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의 신라의 접경지로 호국무술의 본산지이고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한 승병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뿐만 아니라 사고를 지키기 위한 승려들의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는 상징을 가진 곳이다.

역사를 품고 있는 하늘과 나물들이 그 시절을 기억이라고 하는 것일까 불교를 탄압했던 유교 세력이 불교의 승려에게 그들이 만든 콘텐츠를 지키게 했다는 아이러니는 모른 체 매미만 요란하게 구름 위로 그들의 울부짖음을 쏟아 내고 있다.

적상산성에서 바라본 덕유산
안국사 경내에서 바라본 덕유산 향적봉 풍경



고려와 조선은 왕실을 살펴 기록을 한 것으로는 유일하다. 이것을 실록이라 하고 만들어지면 특별한 장소에 보관을 하는데 이를 사고(史庫)라고 한다. 적상산에 있는 사고는 조선 태조에서 철종왕에 이르기까지 25세대, 472년간의 역사적인 일들을 연, 월, 일 날짜 순서대로 기록해놓은 역사서이다. 1800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용은 외교, 정치, 제도, 법률 등의 역사적인 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다른 나라 역사에서도 그러한 예들을 찾아볼 수가 없는 방대한 살아 있는 기록물이다. 이게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이 역사적인 기록물이 임진왜란과 1910년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조선총독부에 있던 것이 황실의 관리 이왕직이 돌려받아와서 창경국에 보관하다가, 서울에 있던 적상산사고는 6.25를 거치면서 인민군이 욕심을 내고 이를 가져갔고 현재의 적상산사고는 북한의 김일성대학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리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이 남한보다 먼저 번역을 하여 출판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서울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4곳에 사고를 만들어 보관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남기고 모두 불타버렸다. 왜란이 끝난 후에 전주사고를 원본으로 하여 각 5부를 각각 만들어 , 강화 마니산에서 정족산사고는 전등사, 태백산사고는 각화사, 묘향산사고는 보현사, 강원도 오대산사고는 월정사 등 수호하는 절을 지정한다. 탄압한 사람이나 정부가 다시 그들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일을 맡긴 것은 몇백년 몇천년 뒤의 후세대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있으리라.


이때 적상산사고본을 토대로 작업을 하는데 전국 3도에 걸쳐서 선비와 글 쓰는 사람 300명이나 동원이 되었다. 북쪽에 자리 잡은 묘향산사고는 후금과의 관계 악화로 적절한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다. 1610년에 순안 어사와 무주의 현감의 요청에 따라 사관을 적상산으로 보내고 이쪽의 지리와 땅을 살피고 성을 수리하게 하여 1614년에 사고를 설치한다. 1,000미터의 고지이며, 내륙의 깊숙한 곳이고, 적상산 자체가 요새 모양의 지형이다. 또한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공격하기가 어려운 천혜의 요새였다. 이에 반해서 적상산 꼭대기는 편편한 평지로 산성의 터로 주목받아오다가 고려왕 최영 장군이 적상산에 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야 한다고 건의도 했다. 이후 적상산의 안국사에 설치되면서 전국에 5대 사고가 생기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은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세워졌는데 탄압받던 불교의 절이 조선왕조의 실록을 보관하면서 지켰다. 유교의 유생들이 불교를 탄압하면서 기록한 조선의 역사를 불교의 절에서 스님들이 지켜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역사적인 책, 사고가 있는 곳인 여기 무주가 당시는 현이었는데 갑자기 비중이 높아지면서 바로 도호부로 지역이 업그레이드된다. 적상산사고는 태백산사고와는 다르게 산성의 안에 만들어진 게 특징이다. 또한 안국사와 호국사를 만들어 승려들이 군사가 되어 사고를 보호하고 지키게 된다. 사고의 설치로 사고의 수호와 함께 산성을 지키기 위해 스님으로 된 병사를 모집하고 지키는 수호 사찰의 역할로 하게 하였다.


한양으로부터 실록이 무주 관아에 도착하게 되면 대규모의 환영행사와 의식이 이루어졌고 천지를 관할하는 관상감이 정해준 날짜와 시간에 맞춰서 사고지로 이동을 했다. 이동할 때는 의장대와 풍악을 울리며 행진을 하였다. 무주에 한양의 유명한 사람들이 다 모이게 되니 얼마나 발전이 되었을까? 당시의 무주로 사고를 옮기자고 제한한 또 다른 큰 뜻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양수댐이 이 지역에 만들어지는 이유는 일제 강점기에도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지만 무산되고 난 후에 다시 발전소가 만들어지게 된다. 천혜의 낭떠러지가 요새였지만 시대에 따라서는 최대의 수직 낙차를 만들어내는 양수발전의 최적지가 되었다. 또한 정상의 분지가 호수로 만들어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리하여 양수댐이 만들어지면서 안국사와 사고지가 물속에 잠기고 안국사는 산 정상 아래의 호국사 인근으로 옮겨가고 사고는 원래 있던 자리보다는 조금 높은 자리로 이동하여 복원하여 지었다. 1997년 선원각과 1998년 실록각이 복원되어 있다.


저자가 여기를 찾았을 때는 이미 폐관 시간이었는데 학예사님을 만난 서 이야기를 들었다.

양수발전 댐 상부저수지


무주 시내에서 바라본 적상산 수직 절벽


학예사님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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