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술장 상담실 입구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분명히 울고 있었다. 사방이 고요하고 스산했다. 무릎 사이에 파묻은 얼굴을 들 용기가 나질 않았다. 고개를 들면 누군가가 나를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밖에 안 되냐고, 겨우 그렇게밖에 못하냐고 차가운 눈초리로 힐난할 것만 같았다. 그래, 모두 다 내 탓이다. 내 책임이다. 환자의 생사라는 버거운 무게가 내 두 어깨에 오롯이 지워져 있었다. 그 누구도 책임을 나누어 질 수 없었다. 외로웠다. 너무나 외로웠다.
처음으로 내 환자를 잃었던 건 전공의 1년차 봄이었다. CPR을 종료하고, 사망 선언을 하고, 사체를 수습하고, 사망 진단서를 쓰고, 오더를 정리하고, 중환자실을 나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누군가 나를 위로해 줄 것 같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괜찮다고, 너는 최선을 다 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어깨를 토닥이며 아픔을 공유해 줄 누군가가 있어 줄 것 같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래, 내가 잘한 게 뭐 있다고 누가 나를 위로해 줄까. 나는 담당 환자도 결국 살리지 못한 주치의인데. 공허했다.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누가 볼까 무서워 얼른 비상 계단 문을 열고 나갔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비상 계단에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야말로 꺼이꺼이 울었다. 최선을 다했는지 불가항력이었는지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담당 환자를 떠나 보냈고, 기분이 최악이었고, 울고 싶었다. 아니, 울어야만 했다. 내 오더와 처치를 기다리는 다른 스무 명의 환자들을 마주 대하려면 눈물이라도 한바탕 흘리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나서 울었고, 울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울었고, 울다 지쳐 또 울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충격은 희석되고 기억은 조각나 흩어져 버렸지만, 그 날 그 고요한 비상 계단에서 숨죽여 울던 기억만은 가슴 속에 또렷이 상처로 남아 있다.
그 상처가 도졌다. 나는 상담실 앞 바닥에 널브러져 가슴을 부여잡고 마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다. 적막했고, 외로웠다.
모든 외과의는 합병증의 위험을 안고 수술을 한다. 담당 환자의 합병증을 경험하지 않은 외과의가 있다면 아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외과의일 것이다. 합병증은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환자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위중한 것일 수도 있지만, 원체 다양한 일들을 겪다 보니 합병증이 생긴 환자의 보호자를 대하는 것도 요령이 생겼다. 난 최선을 다했지만 이런 일이 생겼다고, 유감스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재수술이 필요한 합병증이 일정 부분 생기는 건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의사라도 마찬가지라고, 어쨌든 잘 수습했으니 회복을 기다려 보자고, 이해시키고 다독인다. 하지만 재수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면 어떨까. 세 번째, 네 번째 재수술을 하면서도 담담하고 당당할 수 있을까.
일요일 새벽, 나는 수술장에서 연이은 한숨을 내쉬며 이틀 전 닫았던 배를 다시 열고 있었다. 두 달의 입원기간 동안 네 번의 수술을 했던 환자였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이번에야말로 잘 되었으니 지켜보자고 보호자에게 말한 것이 불과 36시간 전이었다. 불운에 불운이 겹쳤고,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거듭되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어쩔 수 없었노라고 나를 포장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난 항상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최선이 항상 최상의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아서, 결과가 나빠지는 그 순간부터 내가 애를 썼던 최선은 최선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결과론적인 후회가 밀려들었다. 지난 마지막 수술에서 자동문합기를 쓰지 말 걸 그랬어. 아니, 그 전 수술에서 좀 더 꼼꼼히 세척을 했어야 했어. 사실, 두 번째 수술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보다도, 첫 수술이 애초부터 무리였어. 결과가 좋았다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을 모든 과정들이 후회가 되었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내가 했던 모든 조치들이 의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지라도, 환자가 또 수술대 위에 누워 있고 내가 같은 환자의 배를 두 달 만에 다섯 번째 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수술은 끝났지만, 나는 상담실로 통하는 문을 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어차피 부딪쳐야 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누구도 나 대신 감당해 줄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도망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혀 나는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체념과 원망이 두려웠다. 이번에는 정말로 괜찮은 거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답이 서질 않았다. 희망을 이야기할 수도, 혹시 모를 또 다른 불운을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문을 열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 말이나 주워 섬기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환자의 아들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아마 2년 전부터였던 것 같아요.“
환자의 아들이 돌연 입을 열었다.
“2년 전이었어요.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셨던 게.”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내가 말문이 막혀 버렸다.
“큰 사고였어요. 오른팔 전체에 큰 화상을 입으셨고, 손가락도 잘라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들었는데, 아버지는 결국 살아나셨습니다.”
아들은 마른 침을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위기가 왔습니다. 대변을 보지 못하고 배가 불러와 응급실에 왔더니 직장암 폐색에 간전이라고 했어요. 장루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절망했어요. 고비를 겨우 넘겼는데, 여기까지인가 보다, 운명인가 보다 했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꿋꿋이 버티셨어요. 그 독한 항암제 맞으면서도 힘든 내색 한 번 안 하셨으니까요. 저는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저희 아버지가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은 회한에 잠긴 듯 잠시 말을 멈췄다. 눈가에 눈물이 촉촉했다.
“욕심이었나 봐요. 장루 가지고 그냥 사는 건데, 그 정도로 만족했어야 하는 건데. 욕심이었죠. 아마 2년 전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봐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건네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긴 침묵 끝에 힘겹게 부끄러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잘 회복하실 겁니다. 기다려 봅시다.”
“네, 그래야죠.”
아들은 일어서며 구십 도로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차라리 비난을 했더라면, 내 멱살을 잡고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항의라도 했더라면 내 마음이 조금은 더 가벼워졌을까. 아들의 인사는 겉치레가 아닌 진정 고마움을 담은 인사였다. 내가 과연 진심 어린 감사를 받아도 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상담실 문을 나서다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그대로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지독한 외로움이 밀려 왔다. 사방이 조용했고, 나는 혼자였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 건, 배가 고파서였다.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정신 없이 응급 수술을 하느라 밤새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채 날이 새 있었다. 배가 고플 정신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쓴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고민해 봤자, 나 역시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다.
힘을 내야 했다. 힘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교롭게도 일 년에 한두 번 할까 말까 하는 큰 수술이 내일 아침 일찍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내일 하루 온종일을 수술장에서 버티려면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 오로지 나 하나만 바라보고 매달리는 다른 환자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든 힘을 내야 했다.
툭 털고 일어섰다. 아침으로 해장국 한 그릇 하고 얼른 집에 가서 침대에 몸을 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수술장을 나섰다. 새벽 봄바람이 제법 싸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