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 진료실 문을 열고 젊은 남자가 들어섰다. 백육십이 될까 말까한 키에 마른 체구, 까무잡잡한 피부는 물론이거니와, 동아시아인이라면 누구나 서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동남아시아적인' 얼굴 생김새까지, 모든 것이 이 남자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온 외국인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남자의 뒤를 건장한 체구의 '누가 봐도 한국인인'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젊은 동남아시아 여자와 그보다 약간 더 나이든 한국 남자 부부는 농어촌 지역에서 원체 흔하다 보니 병원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지만, 젊은 동남아시아 남성과 보호자로 따라온 한국 남자의 조합은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대장암 의증 고진선처 바랍니다.'라는 간결한 문장이 박힌 소견서를 받아들며 나는 이 두 남자가 대체 어떤 관계일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의자에 앉아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Q는 내 질문에도 불안감이 가득한 눈만 껌벅거릴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뒤에 서 있던 한국 남자가 대신 말했다.
"베트남 사람인데요, 한국말을 잘 못합니다. 아니, 거의 못합니다."
어디가 불편한지는 물어봐야 진료를 시작할 거 아닌가. 시작부터 난관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별로 그럴 거 같지 않지만,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
"의사소통이 되세요?"
"아주 간단한 것들만요. Q, 어디, 아파?"
남자를 바라보던 Q가 알아들었는지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파."
이로써 나는 한 번에 두 가지를 알아냈다. Q가 배를 아파한다는 것과, '아프다'는 단어의 뜻은 안다는 것. 하지만 알아내야 할 것들이 아직 수십 가지가 더 남았다. 알아야 할 것의 상당부분은 검사 결과가 객관적으로 말해주겠지만, 환자로부터 직접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다른 병은 없어요? 혈압이나 당뇨 같은 거."
알아들을 리가 없다. 역시나 뒤에 서 있는 남자가 대답했다.
"특별히 먹는 약은 없는 거 같았습니다."
그래, 삼십대 젊은 남자가 다른 아픈 데가 있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가족 중에 대장암 진단 받은 사람 없어요?"
첩첩산중이다. 뒤에 서 있는 남자는 어깨만 으쓱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통역으로 따라온 것도 아니면 대체 뭐하러 따라온 것일까. 점점 더 두 남자의 관계가 궁금해지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삼십대 대장암 환자에게 가족력은 유전성 대장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어떻게든 Q로부터 내가 원하는 정보를 캐내야 했다. 하는 수 없지. 나는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고, 파파고에 접속한 후, '가족 중에 대장암 진단 받은 사람 있어요?'를 입력하고, 베트남어 번역을 선택했다.
"Trong gia đình có ai được chẩn đoán ung thư đại tràng không?"
모니터에 뜬 글자들을 본 Q는 그제서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니."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Q에게 존댓말을 써 준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경험의 축적을 통해 Q의 뇌에 입력된 'không'은 한국말로 '아니'였다. '아니오'의 존재는 Q에게는 그저 미지의 영역이었다.
파파고의 도움을 받아 문진을 끝내고 드디어 Q를 침대에 눕혔다. 평소대로라면 2-3분 내로 끝났을 일들을 하느라 십여 분이 족히 흐르고 있었고, 나는 남은 대기환자 명단을 보며 마음이 점점 초초해졌다. 일단 루틴 랩(routine laboratory test)과 흉부, 복부 CT 검사를 한 후에 다음 주에 결과 확인하러 다시 오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환자의 상의를 끌어올리는 순간, 나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Q의 비쩍 마른 몸은 이미 커질대로 커져버린 암덩어리를 채 가려주지도 못하고 있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도드라진 좌상복부의 주먹만한 종양을 누르자 Q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Q도 알고 나도 아는 한국말로 물었다.
"아파요?"
Q는 Q의 한국말로 대답했다.
"아파."
종양 주변 압통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고 복부 전반적으로 가스가 차 있었다. 검사 예약을 하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서 다음주까지 기다려서는 안될 상황이었다. 응급실로 보내서 필요한 검사와 조치를 하고 입원을 시켜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난 후에야, 나는 뒤에 서있는 남자에게 Q와 어떤 관계인지를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남자는 그제서야,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 Q가 할 줄 아는 한국말도 없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은 얘가 계절근로자예요. 뱃일을 해야 하는데 애가 하도 비실거리고 자꾸 아프다고 하니까 동네 병원을 보냈더니 거기서 에스결장경인가? 그거 검사를 받고는 대장암이 의심된다고 진단을 받은 거죠."
"그러면 같이 오신 분은 관계가..."
"아 저는 같이 일하는 사람입니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 남자에게 물었다.
"그러면 건강보험 적용은 문제가 없는 건가요?"
"그게 문제예요. 계절근로자로 정식 절차를 밟고 데려온 거라서 4대보험이 다 적용되니 지금은 괜찮아요. 그런데 이게 일종의 알바같은 것이다 보니 수술받고 일도 못할 애를 계속 고용하고 있을 의무가 사장님한테도 있는 게 아니거든요. 얘를 계속 데리고 있으면 일은 못하는데 월급은 월급대로 나가고 새로운 사람을 데려올 수는 없게 되는 상황인 거죠. 그래서 대장암이 진단되자마자 얘를 내쫓으려는 걸 제가 수술이라도 받게 해 주자고 사장님께 사정사정을 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아... 그러면 노동 계약이 종료되면 더이상 보험 적용은 받을 수 없는 것이네요."
"그렇죠."
"비보험 병원비를 부담하기는 어려울 테고요."
"병원비는 둘째치고 비자 문제로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할 겁니다 아마."
아무 영문도 모르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눈치만 보고 있는 Q의 모습이 못내 딱해 보였다. 일단 수술은 받기로 했다고 하니 뒷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인터넷 브라우저를 띄워 '응급실로 가세요'를 입력했다.
"Vào phòng cấp cứu đi"
Q는 모니터를 확인하고 꾸벅 인사를 한 후 외래 문을 나서며 말했다.
"캄사하미다."
Q에게서 처음 들은 존댓말이었다.
수술 후 닷새가 지나고 Q는 퇴원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응급실로 보내 찍은 CT에서는 하행결장암으로 인한 폐색 소견이 명확했고, 다발성 간전이(liver metastasis)가 발견되었다. 완치가 어려운 상태의 4기 대장암이었다. 폐색을 해결하기 위해 스텐트를 넣었고, 환자의 사정을 고려해서 폐색으로 인한 장 부종이 어느 정도 빠졌다고 생각이 되자마자 수술을 했다. 수술 다음 날 '아파아파'만 반복하던 Q는 이튿날이 되자 '아파'라고 했고 삼일 째에는 '초큼 아파'라고 했다. 나는 Q가 '아파' 외에도 '초큼' 이라는 말도 할 줄 안다는 것을 수술 후 삼일 째 되던 날 처음으로 알았다. 그리고 닷새 째가 되자 Q는 병동을 활보하며 이젠 별로 아프지 않음을 온 몸으로 알렸다.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이제 베트남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절제가 불가능한 다발성 간전이가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모르는 항암치료를 위해 Q를 계속 고용할 고용주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단기근로비자로 체류중인 계절근로자의 특성상 근로 계약이 끝나면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알아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내일 퇴원하세요."
회진 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파' '초큼 아파' 외에는 눈만 끔벅이던 Q가 어쩐 일인지 핸드폰을 꺼내들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본인도 답답한지 알아듣지도 못할 베트남어로 몇 마디 하다가 핸드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걸어서는 나에게 건네주며 받아보라는 시늉을 했다.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Q가 말했다.
"통잌. 통잌."
전화기 너머로 다소 서툰 억양의 한국어가 들려왔다. 국제진료협력센터에서 연결해 준 통역사였다.
"여보세요. 통역입니다. Q 환자가 앞으로 치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궁금해하시네요."
그래, 얼마나 궁금할까. 통역사가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Q는 궁금한 것을 속시원히 물어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짓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동안 회진 때에도 특별한 설명을 해 주지 못했었다. 나는 전화 너머의 통역사에게 Q의 현재 상태와 앞으로의 치료 계획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대장암을 절제했고, 수술 후 문제 없이 회복되었고, 절제가 불가능한 간전이가 여전히 남아 있고, 항암치료가 필요한 상황인데, 계절근로자 계약은 종료될 것이고, 비자 문제는 해결이 어렵고, 불법체류자가 되기 전에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하고, 따라서 앞으로의 치료는 베트남으로 돌아가서 받아야 할 것이라고, Q가 아닌 통역사에게 말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앞으로의 치료 계획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앞으로의 계획은 맞지만 그 계획 안에 '치료'는 없었다.
전화기를 받아든 Q는 베트남어로 한참을 이야기했다. 다시 건네 받은 전화기 너머로 통역사가 말했다.
"Q님은 한국에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하시네요. 방법이 있을 거라고, 꼭 여기서 치료를 받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려고 하는데 불안감에 간절함이 더해진 Q의 눈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Q는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한국말을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제발'. 아, 나는 이 베트남 청년의 희망의 싹을 도저히 단칼에 잘라 버릴 수가 없었다. Q는 내가 아니어도 결국에는 누군가를 통해 한국에서는 더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될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전해주는 당사자가 나는 아니었으면 했다. 결국 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비겁해지는 길을 선택했다. 통역사에게 '알아들었으니 내일 퇴원하고 2주 후에 외래로 오라고 해 달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기를 Q에게 넘겨준 채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2주 후 Q가 외래로 왔다. 지난 번에 같이 왔던 '누가 봐도 한국인인' 남자가 이번에도 동행했다. 반가움에 미소 지으며 물었다.
"식사 잘 하세요?"
Q는 또 눈만 멀뚱거리고 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오른손으로 밥먹는 시늉을 하며 다시 물었다.
"밥!"
Q는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Q의 한국말로 대답했다.
"초큼."
옷을 걷어올려 보니 다행히 수술 부위도 잘 아물었다. 이제 항암치료를 받을 일만 남았다.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항암치료는 어떻게 하기로 하셨어요?"
남자는 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마 오늘 진료가 한국에서 받는 마지막 진료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사장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알아보고 있습니다."
역시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어 번역기에 내 마지막 말을 입력했다.
"대장암 수술은 잘 되었고 아무 문제 없이 회복되었으니 베트남 가서 항암치료 잘 받으세요."
Q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진료실 컴퓨터는 베트남어를 입력하는 기능은 없었다. Q는 머뭇머뭇 입술만 달싹이다가 이내 단념한 듯 일어서며 말했다.
"캄사하미다."
Q에게서 들은 두 번째 존댓말이었다.
세상 모든 환자를 구해내겠다는 영웅심에서 시작한 외과 의사의 길인데,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다. 나는 세상 모든 환자를 구해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내 눈앞의 환자도 모두 구해내지 못하고, 때로는 할 수 있는 치료를 더이상 해 주지 못하고 환자를 보내기도 한다. 모든 이를 구해내리라는 허황된 꿈에서는 깨어난지 오래지만 내 눈앞의 환자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치료를 다하지 못하는 현실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