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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an 29. 2021

엄마의 눈물

수술장 상담실 앞에 잠시 멈춰 서서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상담실 문을 열면 아이 엄마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아이의 수술이 시작된 지 벌써 세 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문 너머 엄마의 표정이 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마음을 다잡아야만 했다. 긴장의 끈을 놓았다가는 내가 먼저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한 달 전 외래에서 처음 마주친 아이와 엄마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아이의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는 여느 장정 못지 않았지만 마스크 너머 드러난 앳된 얼굴은 아이가 아직은 분명 아이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이는 다소 상기되어 있었을 뿐 담담했지만 엄마는 전혀 그러질 못했다. 꼭 모아 그러쥔 두 손에서 엄마의 긴장과 불안이 생생히 전해졌다. 모니터에 표시된 아이의 나이는 만으로 열여덟. 대장암센터를 찾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아이 이름을 클릭하자 소화기내과 교수님의 협진의뢰 창이 팝업으로 떴다.

"FAP 의증으로 내원하여 시행한 대장내시경 검사에서 수백 개의 용종이 관찰되었습니다. 환자의 어머니, 이모가 30대에 FAP로 대장전절제술을 시행한 가족력이 있습니다. 수술 의뢰드립니다. 감사합니다."

FAP(familial adenomatous polyposis). 가족성 선종성 용종증. 유전질환.

아이와 아이 엄마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태연했고 엄마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엄마의 그늘진 눈은, 떨리는 손은, 단순히 아들의 병을 걱정하는 엄마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절망의 심연이었다.

"내시경은 언제 처음 해 봤어요?"

"지난 달이요."

뒤에 서 있던 엄마가 대답했다. 사실 대장내시경을 언제 처음 해 보았느냐는 질문의 대상이 되기에는 아이는 너무 어렸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대장내시경을 받아 볼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질문과 대답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은 물어본 쪽이나 대답하는 쪽이나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엄마로부터 가족성 용종증을 절반의 확률로 물려받았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되면 대장내시경 검사를 시작해야 하며, 내시경에서 다발성 용종이 발견되면 암으로 진행하기 전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고등학생이에요?"

"고3이에요. 3월에 대학 들어가요. 그래서 대학 들어가기 전에는 알려주고 검사해야지 싶어서 한 건데......"

엄마는 못내 말끝을 흐렸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는 것은 때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다. 나는 엄마가 아이에게 사실을 알리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유전성 대장암 환자라는 사실,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 너에게도 그 원망스러운 유전자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열여덟 해동안 엄마는 그 잔인한 사실들을 숨겨 오며 얼마나 많은 불안의 날들을 보냈을까. 천형과도 같은 유전성 대장암을 끝끝내 아이에게까지 물려주고 말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엄마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내가 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엄마는 대체 어찌 견뎌내고 있을까. 엄마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절망의 심연이 아까보다 한층 더 깊어 보였다.

수술 시기를 몇 년이라도 늦출 수 없을까, 직장이라도 일부 살릴 수 없을까 싶어 꼼꼼히 살폈지만 내시경 검사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이미 진행하여 커지고 있는 용종이 항문관 바로 안쪽 하부 직장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직장 전체를 포함하여 대장전절제술을 시행하고 소장을 항문에다가 직접 연결하는 수술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자, 잘 들으세요. 환자분은 가족성 선종성 용종증이라는 병이에요. 대장 전체에 걸쳐 수백 개의 용종이 생기는 유전성 대장암의 일종이죠. 그 용종 하나하나가 암이 될 가능성이 있는 씨앗이기 때문에, 가족성 용종증 환자는 시간이 지나면 백 퍼센트 대장암에 걸리게 돼요. 그래서 암으로 진행되기 전에 수술을 하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 내시경 사진을 보시면 아직은 암이 되기 전인 것 같긴 하지만 이미 진행을 많이 하고 있는 상태라 수술을 더 늦추기가 어렵겠네요. 바로 수술 날짜를 잡아야겠어요."

아이는 닥쳐올 미래를 제대로 이해하고나 있는 것인지 여전히 태연했다. 어쩌면 엄마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애써 태연을 가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엄마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방학 중에 수술 받을 수 있을까요? 회복되고 나면 3월에 입학을 했으면 해서요."

3월 입학이라. 겨우 3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과연 가능할까. 방학 중에 수술을 받는 일정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수술 후 두 달만에 입학을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대장전절제술을 하고 소장을 항문에 연결하는 것은 절대 만만한 수술이 아니었다. 오래 걸릴 수술이라는 사실은 둘째로 치더라도, 여러 이유로 수술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지 않거나 수술 이후 합병증이 올 가능성이 높은 수술이었다. 환자가 수술 후 얼마나 잘 회복하고 적응할지도 미지수였다. 수술이 계획대로 잘 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장루를 만들어야 하고 장루가 있는 상태에서 신입생으로 입학해 생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 아무 문제가 없어야만 신학기에 입학이 가능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아이를 다시 보았다. 아이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당신만 믿겠다는 순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눈을 향해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수술하고 회복만 잘 되면 가능하겠지요. 젊고 건강하니까."

관건은 얼마나 수술을 잘 하느냐였다.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 있었다.


그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심호흡을 한 번 더 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상담실 문을 열었다. 엄마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예상하고 있던 표정 그대로였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굳게 먹었던 마음과 달리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부딪쳐야만 했다.

"엄마, 잘 들으세요. 수술은 마무리하고 있어요. 마무리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수술의 진행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다 설명했다. 대장 전체를 절제해 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소장 끝부분을 주머니 모양을 만들어서 항문과 연결해야 했는데, 아이의 소장이 짧고 장간막이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좁아서 소장을 항문까지 끌어내려 연결할 수 있을 만큼의 길이를 확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소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큰 혈관을 중간중간 묶고 잘라내 펼쳐서 길이를 만들어 내야 했고, 항문에 겨우 연결을 해내기는 했는데 장루를 만들 소장을 확보할 수가 없어서 장루 없이 수술을 끝냈고, 그런데 수술을 마무리하며 보니 항문에 연결된 소장 주머니 부분의 색깔이 썩 좋지 않았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니, 그것은 사실은 설명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차근차근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불안 가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길이를 확보하려고 혈관을 묶다 보니 소장 끝부분이 허혈에 빠져 있어요. 혈액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뜻이죠. 하루 이틀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대로 허혈이 더 진행되면 소장이 괴사될 것이고 그러면 재수술을 해야 해요."

엄마의 눈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잔인하게도, 엄마의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버리기 전에 전해야 할 말이 아직 남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이는 항문을 더 이상 쓸 수 없어요."

"......네?"

"평생 장루를 차고 살아야 한다는 거죠. 변주머니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열했다. 나는 뭐라도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꽉 깨문 입술을 약간이라도 떼었다가는 억지로 삼킨 눈물이 다시 솟아 오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수술 전날 회진 때 그저 교수님만 믿겠다고 신신당부하던 엄마의 간절한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일단 엄마를 진정시켜야 했다.

"일단 경과를 좀 봐요. 나빠질 거라는 생각보다는 좋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집시다."

하지만 엄마의 오열은 멈출 줄을 몰랐고, 내 말은 메아리처럼 허공으로 퍼져 버렸다. 그렇게 아이 엄마와 나는 수술장 상담실을 차지한 채 한참을 마주앉아 있었다.


그리고, 걱정 속에 이틀이 지났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가 통한 것일까. 아이는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열도 없고 백혈구와 crp 수치 모두 정상적인 회복 양상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좋아지게 될 것을, 최악의 시나리오를 설명해서 괜히 엄마의 눈물만 쏙 빼 놓은 꼴이 되었다. 그냥 다 잘 되었다고 설명하고 걱정은 속으로 혼자서만 할 걸 그랬나 싶은 후회의 감정이 슬며시 밀려들었다.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단지 결과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만약 그랬다가 아이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기라도 했다면 뒷감당이 어렵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면서도 부질없는 후회를 하는 것은, 오열하며 무너지던 엄마를 감당해 내기가 정신적으로 버거웠기 때문이리라. 노인 환자의 자식들이 울 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도, 젊은 환자의 엄마가 울 때는 나도 같이 감정이 격해지곤 한다. 부모된 자의 마음은 누구라도 다 똑같다.

수술 후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수술 부위가 괴사 없이 잘 아물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외래 진찰실에서 직장경 검사를 시행했다. 깨끗했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내쉬어졌다. 

"경과가 아주 좋네요. 이제 한시름 놓으셔도 될 거 같아요."

이제 괜찮다는 내 말에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이 엄마는 또다시 눈물을 보였다. 아이고, 이 울보 엄마를 어찌할꼬?

"아이가 어리고 건강해서 스스로 이겨낸 거예요. 한 일주일 지나면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 엄마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거듭 절을 했다. 엄마의 얼굴에 항상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걷히고 있었다.

"엄마, 이제 그만 좀 울어요. 다 잘 될 거니까."

아이 엄마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나도 같이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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