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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Feb 25. 2022

시한부 선고

어제는 드라마 <서른, 아홉>을 보다가 울었다. 췌장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여자(전미도)가 남사친과 연인 그 중간 어디쯤의 관계인 남자(이무생)에게 사실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어 버렸다. 이무생의 연기가 너무 실감 나기도 했지만, 그동안 내가 시한부 선고를 내렸던 환자들이 생각나서 더 슬펐다. 중년의 남자가 말 한마디 채 이어가지 못하고 절절히 토해 내는 괴로움과 슬픔. 나는 그 절망의 씨앗을 최초로 그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또 응급 수술을 했다. 재발한 대장암으로 인해 장폐색이 온 환자였다. 이미 너무 많이 진행한 상태였고, 절제는 불가능했다.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우회술만 겨우 시행했다. 그리고, 보호자를 만나, 시한부 선고를 했다.


"뱃속에 암이 너무 많이 퍼졌습니다. 수술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우회로를 만들었으니 지금 당장은 식사를 하실 수 있겠지만, 남아 있는 암은 계속 자랄 것이고 머지않아 다시 장을 막을 거예요. 그때는 수술로도 어찌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수 있는 날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빠르면 한두 달, 아무리 길어도 올해를 넘기시기는 힘들어요. 보호자분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환자 본인도 정리할 수 있도록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시한부 선고를 내리는 자리는 항상 어렵다. 어제 드라마에서 오열하던 남자가 생각이 나서 오늘은 유난히 더 힘들었다. 의사 앞에서 아무리 태연한 척을 해 본들 가족의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이 절대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을 집으로, 요양병원으로, 호스피스로 퇴원시킴으로써 나는 애써 그 절망을 외면하지만, 그들이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목놓아 울고 있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부디, 내가 시한부 선고를 내린 모든 환자들이 남은 여생 행복하게 살다 편안하게 가셨기를.


https://tv.naver.com/v/25328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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