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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Jan 11. 2019

6. 감기와 권태

권태의 목적은 권태

돌아보면 정말 지독한 감기였다. 병원 갈 힘도 없어서 타이레놀 몇알로 견디고,독감이라고 같이 집에 있는 아이 밥은 챙겨야하고. 1주일 정도 심한 감기가 지나고도 2주 정도를, 몸조리하는 산모처럼 집안에 틀어박혀 몸을 사리며 지냈다. 유일하게 쓰레기를 버리러나 나갈 때는, 마스크를 쓰고 부츠를 신고 모자를 쓰고 비장하게 무장을 했다. 날씨가 부쩍 추울 때기도 했지만. 하루하루, 아이들을 무사히 재우고 무사히 하루가 오는 것만이 목표인양 집중했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12월이 한참 중반에 다다랐고, 친정 부모님 생신으로 마침 크리스마스 즈음에 서울을 방문했다 내려오니 이제 나로 하여금,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연말이 된 것이었다. 굳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기분은 괜찮았다. 아이들은 이제 기차 창가자리를 번갈아 앉기로 양보도 잘했고, 며칠전부터 흔들리던 둘째아이의 늦은 첫 이는 외할아버지가 빼주셨다. 사흘동안 지난 한달여를 합친 시간보다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긴 거리를 이동하고, 크리스마스날엔 나보다 발이 커진 첫째 아이 운동화를 새로 사주고, 그렇게 크리스마스 연휴가 지나간다.

예전에 갖고 싶다고 했던 선물을 미리 몰래 샀는데 나중엔 달라졌다고 해서 놀랐으나 그 (꿋꿋한) 산타할아버지가 결국 학교에서 예전에 한 기도를 들어주셨다며 역시 산타할아버지가 진짜 있나보다는 둘째의 놀라운 목소리도 듣고.

휴 다행이다~ 다시 한번 깨닫는다. 애한테 너무 휘둘리지 말자고.)

1년전 이맘때 블로그에선 내가  대구에선 처음으로 혼자 라라랜드를 봤다고 알려준다. 1년전에는, 서울에서 대구로 온지 1년여 된 시점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처음가는 곳, 처음하는 것, 처음 먹어본 것들에 둘러싸여 아직은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던 때였다. 그때까지는 괜찮은 듯 보였다.

그러나 사는 곳을 송두리째 바꾼다고 해서 내가 바뀌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이제 일상이 되고 뻔해진 지금은, 왜 남들이 남편 따라 내려오면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했는지 알 것 같은 지금은, 나이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혀 크리스마스 기분도 송년 기분도 나지 않고 그 좋던 책도 책에 관한 것들도 여행조차도 시들한 지금은. 그 시들해하는 것이,한껏 시들해하면서 견디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널고, 개고, 간식을 챙겨주고, 저녁을 만들고, 잔소리를 하고, 불을 꺼주고. 매일 매일 특별할 것도 재미있을 것도 없는 이 진짜 일상을, 시들해하면서도, 지긋해하면서도 지키고 견뎌야하는 것이라는 것을, 길고 길게 이어져 잠못들게 하던 그 기침이 잦아들 무렵 깨달았다. 이렇게 빨래와 청소를 무심하게 하는 것을 마치 목표처럼 추구해야한다는 것을,아픈 몸을 일으켜 매일 쳐들어오는 적과 같은 빨래를 개고 넣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제부터 이 시시함을,어떤 극적인 사건도 재미도 없을 타지에서의 일상을, 가까운 작은 도서관도 문을 닫은 지금 이제는 "아,모두 시시해.뭐 재미있는 일 없나"라는 말은 금기어라도 되는 것처럼, 견디는 것이 유일한 나의 목적인 것처럼 무사하게 견뎌야하는 것이다.


제약이 없음으로서 얻어지는 한없어보이는 자유는, 다른 이름으로 권태였다. 그 달콤한 벌의 이름은 권태였다.

권태와 스트레스 중 무엇을 선택하라면 그 무엇도 선뜻 선택하기 어렵지만, 지금 선택의 결과로 놓여있는 이 지독한 권태를 견디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리고 이 권태를 견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일부러 걷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시작점과 끝점만을 아는 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신기하게도,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아주 작은 의욕같은것이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와중에 지인들의 갑자기 해외발령이 나서 아이만 데리고 나가야하거나, 해외발령난 남편을 따라 돌쟁이 막내를 데리고 몇년간 따라나가야한다는 소식들을 듣는다.이들도  몇년간 어쩌면  무언가를, 시간을, 장소를,무심히 견뎌야하겠구나,생각하니 동지가 생긴듯하다.

때마침 마치 운명처럼, 짜기라도 한 것처럼, 신문에서 구글의 모 가댓의 인터뷰를 읽는다. 아이를 잃고 나서 그는, "행복은 불행이 없는 상태" 라고. 이미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언급된 내용인 것 같다. 차분히 수상록을 읽고 싶은, 그렇게 이 행복한 연말이다. 눈도 비도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아는 이 별로 없는 이 곳에서 불행없는 이 행복한 연말을 즐겨야할 것이다. 그리고 부산에서의 몇밤을 남겨두고.

그리고 몇일후면 방학이라는 것이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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