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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Nov 14. 2019

전업주부의식

나는 10여년의 워킹맘 시절을 접고 다른 시대를 열었으니, 바로 전업주부의 시대였다.

2018년 10월 전업주부의 가사노동의 가치가 연간 2,315만원이라고 처음으로 정부가 밝혔다고 굳이 떠들어대지 않더라도, (통계청, 2014년 기준, 국내총생산 24%) 주부는 엄연한 직업이다.
 업무분장이 있고(10여년 이상 직장생활을 해보니 직장내 문제의 8할은 업무분장때문다.) 직업의식이 있어야 하고, 책임과 권리가 있고, 세상 어떤 직업이 그러하듯 충분한 낭만도 있고 퇴직욕구도 있다. 인크레더블2에서 미스터인크레더블인 밥이 육아가 그러하다고 말했듯, 주부의 역할은 영웅적인 것이다, 제대로 한다면.

아이 친구 엄마와 얘기하다가 그 엄마가 “우리 아이가 엄마 직업을 ‘전업주부’라고 적어놓은 거예요‘ ” 라며 부끄러움일지 쑥스러움일지 모를 감정을 내비칠 때 나는 공감하지 못했다. 당연히,직업이라고 말해주었다.

가사노동의 가치와 업무분장의 문제와는 별개로, 집에서 아무런 시간과 제약과 제한이 없어 무한정 자기만의 시간을 주도적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는 전업주부에게도 말못할 고통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권태였다. 제약이 없음으로서 얻어지는 한없어 보이는 자유는, 다른 이름으로 권태였다. 나의 시간 주인이 되는 달콤함에 대한 대가는 무기력 혹은 권태였다.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절대로 순수하게 발현되지 않고 약간의 의무와 책임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마치 성악설을 인정하는 것 만큼이나 괴로웠다.
 물론 그 권태와 조직생활에서의 스트레스 중 선택하라면 그 무엇도 선뜻 선택하기 어렵다. 이 지독한 권태를 견디는 것은 내 몫이었다.

사는 곳을 송두리째 바꾼다고 해서 내가 바뀌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이제 일상이 되고 뻔해진 지금은, 나이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혀 크리스마스 기분도 송년 기분도 나지 않고 그 좋던 책도 책에 관한 것들도 여행조차도 시들한 지금은. 그 시들해하는 것이, 한껏 시들해하면서 견디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널고, 개고, 간식을 챙겨주고, 저녁을 만들고, 잔소리를 하고, 불을 꺼주고. 매일 매일 특별할 것도 재미있을 것도 없는 이 진짜 일상을, 시들해하면서도, 지긋해하면서도 지키고 견뎌야하는 것이라는 것을, 길고 길게 이어져 잠못들게 하던 그 기침이 잦아들 무렵 깨달았다. 이렇게 빨래와 청소를 무심하게 하는 것을 마치 목표처럼 추구해야한다는 것을, 아픈 몸을 일으켜 매일 쳐들어오는 적과 같은 빨래를 개고 넣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제부터 이 시시함을,어떤 극적인 사건도 재미도 없을 타지에서의 일상을, 가까운 작은 도서관도 문을 닫은 지금 이제는 "아,모두 시시해.뭐 재미있는 일 없나"라는 말은 금기어라도 되는 것처럼, 견디는 것이 유일한 나의 목적인 것처럼 무사하게 견뎌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일부러 걷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강은경 작가의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을 읽으면서,아이슬란드를 내가 철저히 같이 견딘 기분이었다. 꼭 며칠간의 강행군을 한 것처럼 한동안 나의 머리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런 재난영화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죽어도 그런 여행은 하지 않을 나는 그 여행을 대신 해 준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나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트레킹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저 걷고, 걷고, 시작과 끝만이 분명한 하루.시작점과 끝점만을 아는 길이다.

그리고 이 권태를 견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신기하게도,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아주 작은 의욕같은것이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때마침 마치 운명처럼, 짜기라도 한 것처럼, 신문에서 구글의 모 가댓의 인터뷰를 읽는다. 아이를 잃고 나서 그는, "행복은 불행이 없는 상태" 라고. 이미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언급된 내용인 것 같다. 눈도 비도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아는 이 별로 없는 이 곳에서 불행없는 이 행복 즐겨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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