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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Aug 31. 2017

쓴 것이 약

계절을 보낼 때마다



두 번의 여행을 끝내고 오자 아보카도 씨앗의 갈라진 틈 사이로는 싹이 올라와있었고 구피 한마리와 실버레이디(식물 이름)는 죽어 있었다.
집을 비운 사이 우리 집을 보러 온 사람이 바로 계약을 하겠다고 하고, 여행전에 봐둔 집으로의 이사가 지금으로부터 한달반남짓후로 결정되어버렸다.

오키나와 여행에서 제 사촌동생에게 선물로 주려고 샀던 별모래 기념품(오키나와 해변의 별모양 모래를 담은 작은 유리병, 실제 별모양은 작은 유충의 껍질이라고 함;)을 다 나눠주고 나서도 둘째아이는 그것에 매우 집착했다. 둘째는 이미 다른 걸 샀기 때문에 그건 안된다고 한 터. 그러나 결국 나는 관련 카페에 혹시라도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지  문의글을 올리고, 같은 아이엄마라 공감한다는 엄마가 보내준 별모래 기념품을 우체국 등기로(착불비 비쌌다.) 받고야 마는, 이전의 내가 생각하기로는 조금은 극성스런 엄마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약정이 지났지만 무슨 새마을정신인지 버티던 핸드폰을 바꾸었다.그것도 여행직전에 바꾸느라 정신없이. 오래 생각했던 어떤 일은 또 그렇게 이상한 타이밍에 결정된다. 어쨌든 뭔가 오랫만에 내것인 새것을 장만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 신선했다.

이 여름이 나에게 남긴 것. 새 핸드폰, 극성스런 엄마의 잔상, 열매가 열리는데 7년이 걸린다는 아보카도의 싹, 새로운 곳으로의 이사 결정.

이른 더위에 한껏 숨조차 가빠하고 하루에 몇번씩 물을 끼얹었던 것이 무색하게 안그래도 짧은 아이들 여름방학은 불과 2주일 남았고 그래도 내가 사랑해마지않는 여름은 인사조차 건넬 여유조차 없이 뒷모습만 보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비가 오더니 여름은 차 시간이 임박해서야 자리를 박차듯 황급히 1막을 접어버리고 우리는 예고없는 2막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잡담을 하며 팝콘이나 씹는 처지가 되어 버린듯 했지만, 8월 중순이 되면 바닷물도 차지고 바람도 달라지는 걸 알고는 있지만. 너무 포비같이 하고 다니는 둘째에게 미안해서 산 여름원피스도 입혀야하니 남아있을 늦더위를  기대했었다. 나의 못다한 여름 방학 숙제인양 바다니 수영장도 한번더 가야한다. 늦여름 포항 어느 해변에서 아이들은 파도타는 재미를 알았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내던져졌다가 못이기는척 휩쓸려들어갔다가하며 허벅지가 몽돌에 쓸려 상처가 나도 아랑곳없이.

더 고요해진 밤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는 맥주 한캔과 함께 여름 영화를 보며 유사 작별의식을 치러야할 것만 같은데 아직 하지를 못했다. 언제나 이별의 순간에 비해 이별의 의식은 길다.

그래도 확실히 지금까지는 아이들 책을 사고 빌리는 것에만 열을 올렸는데, 내가 읽고 싶은 책들도 자꾸 많아지는 걸 보니 이제  태양 축제는 끝나가는 것이 확연하고 바람이 달라지긴 한 것 같다. 바람의 방향이.

이제 여름을 마음으로 보내줄 수 있을것같다.물론 아이들 방학이 끝난후에야 완결될 문장이지만.



쓴 것이 약, 이라는 말이 있다. 입에 쓴 것이 약이라는 얘긴데, 나에게는 이렇게 계절을 보내며 쓰는 것이 약이다. 환절기 예방주사다. 바람의 방향과 냄새가 바뀌는 환절기, 부엌 식탁에 등을 켜고 앉아 나만의 환절기(換節記)를 쓰는 이 일은 어떤 무기력도, 무의미도, 한숨도, 아쉬움도 이기지 못하고, 다음 계절로 가는 나의 시간을 이제 허락한다. 그러니, 나에게, 쓴 것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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