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살림 솜씨가 나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두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고요!)
부지런한 엄마는 항상 쓸고 닦고 집을 반질반질 만들어놓으셨다.
나는 햇볕에 바짝 말려 뽀송뽀송해진 이불에 누워있다가 엄마가 해준 건강하고 담백한 밥을 먹었다. 우리 집은 매번 세끼 밥을 주말까지 항상 집에서 먹었고, 외식은 손꼽아했다. 속옷까지 다려놓으셨던 엄마의 손길 덕에 항상 반듯하게 다려진 옷들이 옷장 속에는 걸려있었다. 계절마다 우리 집의 인테리어는 바뀌었고 내 공부방과 책상을 내가 공부하고 싶도록 매번 꾸며주셨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치우고 계시는 엄마 곁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내가 자취를 시작하면서 엄마는 항상 나에게 너는 왜 이렇게 지저분하냐고 했고, 나는 내가 밥 다해먹고(엄마가 해준 반찬에 정말 전기밥솥이 해준 밥만 차려 먹고 다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설거지하고, 옷 다 빨아 입고 다니는데 그런 딸한테 구박한다고 오히려 반항하곤 했었다.
결혼을 하고 난 후로도, “엄마가 가까이 살면 너희 집 청소 좀 싹 해줄 텐데, 왜 이렇게 지저분하냐”, 라는 잔소리가 정말 잔소리로밖에 안 들렸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조금씩 더러운 곳들이 보이고 [살림= 밥 차리기+설거지하기+청소기 돌리고 걸레 닦기]가 다가 아니라, 구석구석 정리하기, 곳곳에 지저분한 먼지 제거, 철마다 옷 정리, 싱크대 지저분한 때 제거, 창틀 먼지 제거, 장보기, 제 때 필요한 물건 사기 등등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아간다.(엄마가 가까이 살아서 청소도 다 해주고 그랬다면 난 아직도 모르고 있었겠지. 역시 자식이 철들고 독립하게 하려면 스스로 해볼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진실. 서른 넘으면 자식들한테 손 떼야합니다 ㅎㅎ)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자리 잡힌 깨끗한 집안에는 보이지 않은 엄마의 손길이 너무나도 많았다는 것을, 집안일을 하나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다음 해야 할 집안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을, 밥을 먹으면서도 다음 끼니에 뭐 먹을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가족들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엄마가 몇십 년을 보내셨음을 알아간다.
공간이 익숙해지면 먼지마저도 원래 그 공간의 소유였던 것 마냥 느껴진다. 그런데 반짝반짝한 호텔 같은 친정에 있다가 우리 집에 오면 안보이던 우리 집의 먼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친정에 다녀와서 이번 주 내내 청소도 하고, 이것저것 정리도 하고, 요리도 했다. 뿌듯하고 상쾌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지기도 했다.
가사노동을 할 시간에 내가 다른 일들을 하면 이미 쓰고 싶었던 책도 몇 권이나 더 썼을 것이고, 공부하고 싶었던 것도 다 했을 텐데. 왜 돈이 많은 사람들이 철학자가 되었고 경제 대부의 지원으로 르네상스 예술이 발전해갔는지를 몸소 느끼며 말이다.
@베란다 청소하고 놀이공간으로 바꿔주고 뿌듯해서 한컷
사람들의 인생이 극적으로 바뀌기 힘든 것은 지금의 삶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특히나 결혼 전, 출산 전, 혼자 있다면 미친 듯이 자기 계발을 하고 독하게 마음먹었다면 삶의 방향키를 조금 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임져야 할 아이가 생긴 후로는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엄마 혁명]이네 [엄마의 자기 계발]과 같은 것들이 강조되는 책들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그게 힘들기 때문이다.
쉽고 당연한 것은 사람들이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집안일은 그저 삶을 유지하는 일에 불과한다는 것이 아니다. 엄마의 그런 노력들이 나를 반듯하고, 정서가 안정된 성인으로 자라나게 만들었으며, 가족들의 웃음꽃이 엄마의 노력에 대한 가장 큰 성과였을 테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로는 공간을 아껴주는 일, 날것의 재료가 음식으로 바뀌는 일과 같은 [집안일]은 굉장히 힘들지만 또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는 거다. 어떻게 보면 [집안일]은 생존의 기술이니 말이다.
나도 우리 아이에게 정돈된 공간, 몸에 좋은 음식을 주는 엄마가 되고 싶은데, 나는 아빠 닮아서(?) 엄마의 발뒤꿈치도 못 쫓아가서 큰일이다. ㅋㅋ 가치로운 일을 하는 데에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