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 (fea. 파킨슨증후군)
나는 2003년에 결혼했고 2004년 첫 아이를 낳았다.
그때 내 나이는 26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어린 나이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충분히 어른이라고 생각했고 독립적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나의 친정 엄마에게 참 많이 기대어 살았다. 알게 모르게 엄마는 딸이 힘들까 봐 참 많이 도와주셨다.
아무것도 모르고 첫 아이를 낳은 나를 위해서 본인 일도 바쁜데 우리 아이를 내 아이처럼 이뻐해 주고 돌봐주셨다.
되게 어른인 척 살았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우리 엄마가 되게 어른이었다.
나는 나대로 내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했고 지금 생각해도 대견한 하루하루를 살았지만, 엄마는 나의 열 배를 대견하고 애틋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늘 든든하게 늘 같은 자리에서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엄마는 강화도 태생이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좋은 흙에서 나온 쌀과 식재료를 먹고 자라서 건강한 것인지 엄마는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다. 내 기억의 엄마는 늘 튼튼하고 건강했고 그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섬사람이라서 그런지 해병대 출신도 아닌데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마음으로 늘 기도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런 엄마를 보면 늘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엄마처럼은 못 살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새벽기도를 하고 돌아온 남편의 아침 식사를 세종대왕 수라상이 부럽지 않고 늘 근사하게 차렸고 남편이 입고 나갈 셔츠를 손수 다리고 넥타이와 양말을 골라주는 엄마를 보면서 참 정성이 가득한 아내라고 생각했다. 누가 엄마보다 더 아빠를 잘 내조할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디서든 당당하고 멋진 아빠의 모습은 반은 엄마의 지분이었던 것이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원인이 어떻듯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와야 했을 때도 엄마는 화가 많이 났지만, 혼자서 집을 구했고 우리가 머무를 거처를 하얗고 예쁘게 리모델링했다. 새로운 집을 어렵게 구했지만 자신이 꾸며놓은 집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던 엄마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엄마가 가장이 되고 자신의 사업을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를 찾아낸 콜럼버스처럼 해 나갈 때 아빠는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자신의 인생의 실패를 곱씹으며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그만큼 엄마 삶의 무게는 두 배 세 배가 되어 엄마를 엄습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늘 긍정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활기차게 해 나갔다. 그때는 엄마가 할 수 있으니까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참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참 억척스러운 성격대로 사업을 하고 원하는 대로 꾸려가시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어떻게든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고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 싶었던 엄마 생각에 눈시울이 뜨겁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준다며 화 내고 소리치던 엄마에 온 집안 식구가 힘들었던 시간들이 있다. 내가 이 집안의 생활비를 다 버는데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느냐며 화를 내던 엄마는 우리 모두를 지치게 했다.
각자의 삶이 있는데 엄마는 모든 가족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여주길 바랐다. 내 동생도 나도 한참 대학원에 다니며 공부하던 시기여서 각자 살아갈 삶을 가꾸어 가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엄마는 가족 모두가 한량이고 본인만 너무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원에 간 후로는 엄마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래야 내가 당당하게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나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있기에 수시로 용돈이라고 하면서 돈을 쥐여주곤 했다. 미안하지만 주시는 대로 감사히 받았다. 그땐 엄마가 하는 사업이 한참 잘될 때였다. 엄마는 늘 희망차게 일하고 온 가족이 살아갈 3층집을 사서 층별로 나눠 살자고 말하곤 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지만, 사업 환경은 수시로 바뀌는 거라서 엄마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업을 접게 되었다. 엄마가 사업하는 것을 보면서 시기를 잘 탔다는 생각도 했지만 지속적으로 흑자를 내는 경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직원들에게 매월 밀리지 않고 월급을 지급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배웠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대단한 엄마도 겨우겨우 해낸 것을 나는 할 수 없겠구나. 누군가의 인생을 함께 책임지는 사업의 대표는 할 수 없겠구나. 나는 나 하나의 인생을 짊어지고 살아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엄마는 정말 장군감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렇게 자신의 삶과 직원들의 삶을 15년 가까이 일궈내고 지켜낸 엄마를 존경한다. 엄마가 일군 두 번째 사업체는 내가 처음을 함께 했다. 엄마와 함께 일하면서 가족과 함께 일하는 건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의 자리는 지워지고 경영자와 직원의 자리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의견 차이가 생기면서 가족의 자리는 점점 더 사라지는 것을 느꼈고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다시 전에 일하던 직장에 재입사할 수 있게 되어 나는 내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엄마가 많이 서운해했지만 그것이 남은 인생동안 우리가 가족으로 함께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나의 과감한 결정이었다.
엄마는 한동안 나의 빈자리를 바라보면서 울기도 하고 나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우리 집에 찾아오지도 않았다. 손자, 손녀가 보고 싶어서 올 만도 한데 그만큼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이다. 엄마에게 많이 미안했지만, 그때 보이지 않는 탯줄을 명확하게 정리했던 거 같다.
그동안 늘 자식들에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던 엄마에게도 자유를 주고 나도 오롯이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길을 걷고 엄마는 엄마의 길을 걸으며 우린 가족으로서 함께 했다. 가능하면 시간을 내어 엄마, 아빠와 1년에 한두 번씩 여행을 가고 생일 때도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으며 축하하곤 했다. 어버이날, 설날, 추석, 나와 내 남편의 생일, 아이들 생일도 함께 챙기며 소소한 추억들을 만들어갔다. 엄마는 하나뿐인 사위의 생일을 풍족하게 챙겨주고 용돈을 많이 주거나 양복을 한벌씩 사 주곤 했다. 우리 남편은 장모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늘 애교 섞인 말로 엄마를 기쁘게 했고, 환대하며 장모님을 맞이했다. 무뚝뚝하고 냉소적인 딸에 비해서 사위는 장모님의 친아들처럼 사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주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의 과잉보호 속에서 지나친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그런 엄마의 과한 사랑이 답답하곤 했다. 과한 사랑은 과한 통제와 기대를 낳았고 나는 늘 그 통제와 기대에 숨 막히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착한 장녀의 삶을 살아가는 내내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고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지나치게 노력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열심히 성실하게 생활했지만, 뭔지 모를 답답함과 힘겨움이 나를 억누르곤 했다.
중 2 때는 공황장애와 같은 증상이 생겨서 한동안 수업 시간에 숨이 차면 엎드려있기도 했다. 그 증상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모르지만, 한동안 나는 무척 우울하고 외롭고 힘들었던 날들을 보낸 거 같다. 엄마, 아빠에게 얘기하면 무척 걱정할 거 같아서 집에서는 그냥 잘 지내는 아이로 나를 포장했다. 평범하고 별 탈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듯 보였을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서 내 일기장에 나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적곤 했다. 아마 그것은 사춘기 아이들이 흔히 겪는 이유 모를 고독함과 쓸쓸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걷다 보면 한숨이 나오기도 하고 외롭고 쓸쓸하기도 하고 그리 기쁘지 않기도 하고 또래 집단속에 스며들면서도 그렇지 못하는 거 같은 내 성격 탓에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아이, 착한 아이, 공부도 웬만큼 잘하는 아이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이 버겁고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나를 만나면 내 이름을 부르며 묻고 싶다. “~~ 아, 뭐가 그렇게 힘드니? 널 가장 힘들게 하는 게 뭐니?”
우리 부모님은 우리가 서울 왕십리로 이사 간 후부터 부쩍 바빴던 거 같다. 부모님 두 분이 집에 안 계시던 시간이 꽤 많았던 거 같다. 나는 주로 집에서 혼자 뒹굴면서 친구랑 전화 통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응답하라 1994’ 시절에 내가 고1이었는데,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PC통신이 시작되었던 시기이다. 고1에 전학을 간 나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려웠다. 새로운 학교에서 이미 친해진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혼자 동떨어져있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에게 부탁해서 PC통신을 설치했다. 현실에서 외로웠던 나는 PC통신 세계가 현실보다 편하고 즐거웠다. 직접 만나면서 느끼는 긴장감과 부담감 없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런 나에게 수없이 화를 내면서 선을 끊어놓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해지를 안 하셨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에도 요즘처럼 약정이 있었던 걸까? 엄마에게 여쭤보고 싶다. 밤새도록 PC통신을 하고 학교에 가면 너무 졸렸다. 아침에 학교도 겨우겨우 가곤 했다. 잘 수 있는 한 최대한 잠을 자고 일어나서 좀비처럼 학교에 가곤 했다. 엄마는 일찍 자라고 화내고 소리도 치셨고 무서운 표정도 지으셨지만 PC통신을 해지하진 않으셨다.
나는 PC통신에서 신의 손이라는 타자 게임을 하곤 했다. 게임방에서 타자를 빨리 치는 순서대로 랭킹이 매겨지는 게임이었는데, 그 덕분에 지금도 타자 치는 속도가 빠르다. 그 게임은 한컴의 산성비와 비슷한 게임인데 게임방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친다는 점이 다르다. 한판만 더 하고 자야지 하면 어느새 2시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부모님이 일찍 주무셔서 PC가 거실에 있었지만 나는 늦게까지 PC통신 세계에 머물 수 있었다. 그만큼 현실 세계는 나에게 버겁고 어려운 곳이었다.
늘 진취적이고 사교적인 엄마는 나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이랑 잘 지내는 것이 뭐가 어려운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엄마는 네가 뭐가 부족하냐, 공부만 하면 되는데라고 말하곤 하셨다. 엄마는 여고생의 섬세한 감정선을 읽어내기 어려운 현실에 부대끼며 하루하루 살아내기도 바쁜 어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먹고사는 걸로 모든 것이 만족되는 시절을 지나버린 우리 세대에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감사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성격이 외향적인 친구들이 부러웠던 거 같다.
집단의 중심에서 인기를 누리는 아이들처럼 되고 싶었으나, 나는 내향적이었고 누군가를 리드하고 앞에 나서는 것이 귀찮았다. 요즘 말로 인싸는 아니었지만 행정적인 인싸였다. 뭔가 믿음직스러웠는지 전학 가기 전 학교에서도 임원을 하다가 전학을 갔고, 전학 간 다음 해를 제외하고 전학 간 학교에서도 고3 때 반장을 했다. 고3 반장은 수업 시작할 때 인사하는 것 외엔 딱히 할 것도 없는 반장이긴 했다. 분명히 아이들의 투표로 임원선거를 했는데 나는 줄곧 임원을 했다. 재미나 인기가 있는 인싸는 아니었지만, 임원을 맡기기에 적당해 보이는 행정 인싸였던 거 같다.
엄마는 공부를 웬만큼 하고 임원도 줄곧 하는 나에게 꽤 많은 기대를 걸었던 거 같다. 임원을 하는 딸 뒷바라지하러 학교에도 자주 오고 무언가 계속하셨다. 학교에서 뭘 하셨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들 모임에 열심히 나가셨던 거 같다. 그러다가 외고에 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내가 거절해서 외고는 시험도 보지 않았다.
중학교까지 알아서 잘했으니 고등학교 전학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생각하셨던 부모님은 막상 고등학교 전학 후 변하는 내 모습에 여러 번 놀라셨을 거다. 지나고 나서도 그때 얘길 많이 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우리 딸이 사춘기인가 보다 생각하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님이 원하는 테두리 안에서 움직였으니까 딱히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다. 그만큼 우리 부모님은 내가 고등학교 때 참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계셨다. 난 그 틈을 이용해서 내 나름의 삶을 살아갔다.
엄마는 늘 든든하게 내 곁을 지켜주는 지원군이었다. 내가 대학교에 가서도 대학원에 가서도 엄마는 늘 내 곁에서 한결같이 막강한 포스를 내뿜으며 살아가셨다.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던 엄마는 사업을 정리하고 나서 부쩍 힘겨워하셨다. 본인이 꿈꾸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서인지 엄마는 갈수록 말랐다. 어느 날엔 급하게 연락이 와서 돈 얼마를 보내달라고 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엄마는 사업 정리 후에 빚을 갚느라 고생하고 계셨다. 그래서 아무리 밤에 하는 알바를 그만하시라고 건강에 안 좋다고 해도 관두지 않으셨던 거였다. 딱히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보이니 엄마는 도움도 청하지 못하고 그렇게 혼자 끙끙 앓으셨던 거였다. 아빠도 나도 몰랐는데 엄마가 편찮으시면서 아빠가 엄마 빚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엄마가 통장이나 카드 관리를 할 수 없게 되면서 아빠가 엄마 통장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었다.
요즘 부쩍 그 시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엄마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던 나를 생각하면 그것도 짠하다. 나도 엄마가 한참 힘드실 때 무척 바쁘고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회사가 전부가 아니고 일이 인생이 아닌데, 나는 늘 인정받고 칭찬받고 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게 나도 모르게 몸에 배어서 회사에서도 정말 헌신적으로 일했다. 어떻게든 성과가 나게 하려고 혼신을 다했던 시절이다.
내가 무언가를 하면 남다르고 싶었고 칭찬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던 시절이기도 하고, 정말 좋은 성과를 내고 싶었다 내 욕심도 한몫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던 와중에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나면서 나는 인생을 회의하는 깊은 늪에 빠져서 허욱적거리고 있었다. 그 늪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상담도 받고 미술치료도 받고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그 후에는 그와 별개로 늘 나를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며 간섭하고 내 인생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엄마에 대한 나의 분노를 해결하고 싶어서 상담을 받고 상담심리대학원도 다녔다.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긍정과 부정적인 영향을 생각하며 가능하면 덜 나쁜 부모가 되는 일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 부모교육을 하기도 했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덜 나쁜 부모’가 되는 것은 누구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나의 부모님은 늘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나를 잘되게 하려고 애썼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날 많이 힘들게 한 것을 생각하면 엄마에게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토록 사랑한 자녀들이 엄마의 어떤 부분으로 인해서 상처받고 힘들었다는 걸 알면 엄마도 참 속상할 것이다.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덜 나쁜 부모’가 되고 싶어서 최대한 아이들의 생각을 듣고 존중하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아이들도 나에게 아쉬운 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내가 답을 정해놓고 아이에게 내 생각을 강요한 적도 있을 것이고 더 좋은 것을 주는 거라며 아이에게 원치 않는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 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그런 자녀 양육 방식도 자녀를 위하여 최고를 주기 위하여 늘 노력한 엄마의 그림자가 아닐까 한다. 늘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참 감격적이다. 눈물 나게 고마운 우리 엄마에게 찬사를 보낸다.
2019년부터 엄마가 자꾸 길을 잘못 찾고 차 사고를 내기 시작했다. 경찰서에 갔는데 엄마는 계속 본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우겨서 경찰이 블랙박스 영상을 보여주었다. 엄마는 끝까지 본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엄마를 집에 모시고 가려면 합의를 해야 한다고 해서 상대방과 합의금을 마련해서 보내기로 한 아빠 덕분에 집에 모시고 갈 수 있었다. 엄마는 그 후로도 여러 번 차 사고를 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우리는 엄마 차를 가지고 와서 팔았다. 엄마는 차도 없이 알바를 다닐 수 없었고 엄마가 전과 다르다고 느낀 알바 사장님으로부터 이제 그만 나오셔도 된다는 통보를 들었다. 이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과 운전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엄마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엄마와의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길을 잃기도 하고 택시 기사에게 길을 설명하지 못해서 아빠에게 전화가 온 적도 있다. 다행히 엄마가 휴대폰 통화를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어느 날은 휴대폰 통화가 되지 않아서 엄마를 몇 시간 동안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불안한 날들이 이어져서 아빠에게 엄마를 잘 보시라고 했지만, 아빠가 깜박 잠이 든 틈에 엄마가 택시를 타고 사라진 적도 있다. 엄마는 자꾸 답답하다며 밖에 나가려고 했고 우리 집에 찾아온 적도 있다. 엄마에게 휴대폰에 위치추적기를 걸어드리고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목걸이도 해 드렸다. 엄마는 실내에 있으면 자꾸 나가자고 했고, 어느 날부터는 섬망 증세가 나타나서 가장 사랑하는 첫 손녀인 우리 딸이 없는데도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얘기를 하기도 했다.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는 것을 내내 지켜봐야 했던 아빠 마음은 상상조차 하기가 어렵다. 아빠는 처음에는 엄마를 잘 보시라고 하고 약도 잘 챙겨드리라고 하면 화를 내기도 하고 짜증도 냈는데, 어느 순간 엄마 병의 심각성을 깨닫고 엄마를 열심히 돌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2021년에 엄마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면서 병은 심각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경도성인지장애에서 치매로 진행되던 엄마의 병이 신체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다리의 힘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후 대퇴부골절로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2번 하느라 전신마취를 해야 했다. 재활치료를 하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지팡이를 잡기 시작했고 점점 다리의 힘이 빠져만 갔다.
병원에서 주는 약을 꾸준히 먹는데도 병세가 지연되지도 않고 차도를 보이지 않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나도 아빠랑 같이 병원에 가 보았지만, 의사는 울상을 지으며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그때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엄마 치료에 개입했어야 하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처음 엄마가 이상한 증세를 보였을 때 치매센터에 가서 치매검사를 받게 했고 치매전문센터와 연계된 집 가까운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으시게 했으니, 그 후엔 병원에서 잘 치료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마 병은 갈수록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결국엔 2022년 엄마 70번째 생신에 온 가족이 함께 가기로 한 제주도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다리에 힘이 현저히 약해져서 걷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엄마를 돌보느라 충분히 쉬지 못하면서 2022년에 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엄마를 혼자 집에 있게 할 수 없어서 엄마도 함께 응급실에 가게 되었다. 엄마를 돌보기 위해서 아빠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새벽 3시에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엄마를 모시고 응급실에서 나와 대기실에서 기다렸고 아빠는 스탠스 시술을 받게 되었다. 아빠가 치료를 받아야 해서 엄마를 모시고 집에 왔다. 엄마는 1주일 정도 우리 집에 계셨다.
그때는 코로나 시국이라서 재택이 보편화되어 있던 시기라서 나는 재택을 하며 엄마를 돌볼 수 있었다. 엄마는 계속 나가겠다고 하셨지만 잘 이야기해서 집에 머물게 했고, 아빠가 퇴원하는 날에 엄마를 모시고 아빠 엄마 집으로 갔다. 편히 쉬실 수 있게 엄마를 더 돌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나도 회사에 나가야 하니 엄마는 다시 아빠가 돌보게 되었다. 아빠는 회복이 잘되어 엄마를 다시 돌보게 되었고 엄마가 자꾸 침대에서 떨어져서 너무 위험하게 되어 엄마 방에 환자용 침대를 드려놓고 요양등급을 받았다.
요양보호사가 집에 오게 되어서 요양보호사가 엄마를 돌봐주는 4시간 동안 아빠는 볼일을 보고 사람도 만나고 휴식도 취했지만 그 시간은 아빠가 충분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다행히 좋은 분이 오셔서 엄마를 돌봐주셨지만, 엄마는 요양보호사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해서 요양보호사가 조금 힘들었던 거 같다. 아빠랑 있을 때는 순하게 얘기하시는데 요양보호사랑 둘이 있을 때는 말을 좀 강하게 하기도 하셨던 거 같다. 의식도 많이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잠을 자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다리가 굳어져갔다. 그때부터는 병원에서 파킨슨 증후군이라고 이야기해서 신경외과와 정신과에서 치료를 같이 했다. 하지만 엄마의 병세는 급격하게 나날이 악화되었고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편찮으시고 나서 시간이 나면 갈 수 있을 때 가려고 아빠랑 셋이 동해에도 다녀오고 칠순에는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더 자주 갈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제주도에 다녀온 후에 날이 많이 더워지고 나서 하루에 한 번씩 산책하는 걸 못 하게 되면서 엄마는 걷기가 힘들어졌다. 화장실까지 가는 것도 어려워져서 결국엔 환자용 패드를 착용하게 되었다. 점점 쇠약해져 가는 엄마를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고 엄마를 만나러 가기 전과 다녀와서 늘 마음이 무거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엄마는 음식을 삼키기가 어려울 정도로 연하 기능도 약해져서 의사가 음식을 삼키게 하다가 폐렴에 걸리면 더 위험하다고 이야기했다. 결국에 엄마는 2023년 봄에 배로 영양을 공급하는 줄을 꽂게 되고 목으로 음식을 삼키기 어려운 환자들을 위한 뉴케어로 영양을 공급받게 되었다.
하루 3번 뉴케어를 배에 꽂은 튜브로 영양을 공급하고 물과 약도 튜브로 넣게 되었다. 그때부터 아빠는 더욱더 엄마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 하루 4시간 요양보호사가 오는 시간을 제외하곤 눈코 뜰 새 없이 엄마를 돌보고 변비에 걸리지 않도록 유산균도 먹이고 늘 배를 살폈다. 한 번은 변비에 심하게 걸려서 배가 부풀어 올라서 응급실에 다녀온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아빠는 엄마가 변비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변비 횟수를 매일 체크한다. 가만히 누워 있는 환자를 가장 괴롭히는 건 ‘욕창’이다. 아빠는 2~3시간 간격으로 엄마의 위치를 바꿔주며 욕창에 걸리지 않도록 돌봤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체위를 바꿔주고 패드를 교체했다. 아빠의 지극정성으로 엄마는 욕창 없이 지낼 수 있었고 하루종일 라디오도 찬양을 들으며 찬양을 따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면서 목이 마르게 되어서 점점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면서 나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면 엄마가 찬양 부르던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엄마랑 수요 예배, 오후 예배를 종종 드리고 새벽 기도도 같이 가기도 했는데 엄마는 맑고 예쁜 중저음의 알토였다. 찬양하기를 좋아해서 늘 찬양대를 했다.
치료될 길 없는 병을 앓고 있는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저며든다. 이제는 엄마가 쉴 때가 된 것인지 자문하게 된다. 손과 발이 점점 구부러지고 마비되어 가는 엄마를 만나고 오면 가슴이 메어지고 숨이 벅차다.
파킨슨증후군을 앓고 있는 부모님을 만나고 온 많은 가족들이 느끼는 기분이 아닐까 한다. 몸이라는 껍데기가 건재하지 못하고 뇌는 점점 제 기능을 잃어가고 영혼이 육체 안에 갇혀 있는 엄마를 보며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 기도의 길피를 잡기가 어렵다.
하나님, 부디 엄마의 몸과 마음이 주 안에서 평안하게 하시고 외로운 영혼을 보살펴 주소서.
#갈 곳 잃은 기도 #엄마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