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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게요 Mar 31. 2024

닿고자 하는 노력

-심심한 사과에 대하여

    

  책이야 늘 읽고 있지만, 책을 덮자마자 내용은 물론이고, 제목까지 잊어버리기 일쑤라 책을 제대로 소화하며 읽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성인과 대화다운 대화를 하고 싶기도 했다. 포켓몬스터 얘기만 하는 8살과 지내는 것은 아주 피곤한 일이다.

  독서모임은 어떻게 골라야 할까.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모임이 활성화된 요즈음, 모임을 만들고 실행하기는 쉬워졌지만, 우리나라 성인 문해력이 그렇게 바닥이라던데 그래서 그런가 독서모임은 그렇게 흔한 모임은 아니었다. 관심이 가는 모임은 그놈의 ‘강남’에서 이루어지고 멀기도 드럽게 먼 강남은 30대 후반인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공간인 느낌이다. 심지어 평일의 강남이라고? 그건 열정 혈기 그런 것이 넘치는 20대 중반에나 가능한 일정 아닌가. 나도 그 나잇대에는 그러기도 했다. 잠깐이었지만. 여하튼 그리하여 독서교사들이 모인 독서모임에 들어갔다. 아이들 책을 읽느라 성인 독서를 못 하니 자기 계발의 목적으로 독서모임을 하자는 것이었다. 아주 왕성하게 활동을 하시는 분이길래 끼어서 콩고물을 얻어먹어 볼까 싶기도 했고. 

  결과적으론 아주 실패였다. 베스트셀러 위주로 도서를 선정했는데, 대학을 졸업한 뒤 성인 베스트셀러를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인스타에서 광고를 엄청 하던 일본 추리소설인 《백광》, 이어령 선생님께서 작고하신 뒤 불티나게 팔린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었고, 박상영 작가님이 부커상 후보가 된 기념으로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었으며, 김영하 작가님께서 유퀴즈에 나오신 덕분에 《작별인사》를 읽었다. 사실 첫 모임 책이 백광이었을 때부터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여태 살면서 많은 것을 빠르게 포기하며 살았기에 좀 더 버텨보자고 그래도 성인과 책 이야기를 하는 게 어디냐 생각했다. 이미 형성된 모임에 낀 거라 발언권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백광에서 불륜에 초점을 맞춰 정조관념 없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참 들었고,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할 말은 많지만 참겠다는 느낌으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 상관은 없지만 이런 이야기는 ‘아름답지 않잖아요.’라는 발언과 문란한 여자들 결혼 잘해서 잘만 살더라 이야기를 듣고는, 밤새 못다 한 말을 더듬으며 잠을 설쳤다. 작별인사를 읽고는 김영하 작가님 책을 처음 읽어본다는 사람이 8명 중 6명인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친구들과 술을 먹다 그만두겠다고 문자를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독서모임을 하자고 졸랐다. 이 친구들은 내 대학 동기들로 거의 매일 연락을 하는 단톡방 멤버들이었다. 책은 내가 정했다. 김지연 작가님의 《마음에 없는 소리》. 우리는 일요일 을지로 금샤빠에서 만났다. 어떤 단편이 제일 좋았어? 어떤 부분이 좋았어? 몇 가지 대화를 나누었는데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 정확하게 일치했고 감탄한 부분도 일치했다. 우리의 대화는 주로 이랬다. “마지막 단편 〈공원에서〉에서 비명이라는 표현 너무 정확하지 않냐?”, “어, 맞아.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너무 정확하게 적어서 좋았어.” “맞아. 맞아.” 우리는 신났고, 샴페인을 세 병을 마셨으며 모든 말들은 덧붙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야 거기 있잖아. 그 부분!” 하면 친구가 “그래, 나도 거기!” “그거 진짜 좋았지?” 하면 “맞아. 진짜 좋았어!” 이런 식이었다. 친구가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작가가 주로 이야기하는 주제는 예전부터 우리의 관심사였고, 우리는 서로의 사고의 배경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신났고, 괜찮은 술안주가 되어줬지만 이럴 거면 굳이 같은 책을 읽고 얘기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독서모임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으로 다시 돌아갔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길 바랐고, 다른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부분을 짚어 정확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번 모임에서도 나는 그러지 못했고, 자신도 못하는 주제에 더 나은 상대를 바란다는 것은 웃긴 일이다. 

  더 나은 대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겠다는 의지라고 생각했다. 꼬아보지 않고 상대가 하는 표현이 상대의 역사를 담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무엇보다 호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호감이 없다면 상대가 권력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말은 경청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대화라는 것은 결국 잘 말하겠다는 것보다 잘 듣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상대에게 더 다가가려 애쓸 때 우리는 상대의 말과 행동에 더 집중하게 된다. 호감이나 권력을 가진 상대에게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가닿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고 보니 종전에 화제의 표현이었던 심심한 사과가 생각이 났다. 이에 대해 이미 수많은 기사와 칼럼이 쏟아졌지만, 심심한 사과 논란은 무엇보다 태도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심심한 사과’,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에서 구어로 주워듣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모르는 단어를 만났을 때 우리는 보통 상황과 맥락에서 힌트를 얻는다. 정말 성인들이 추론능력, 문해력이 부족해서 심심한 사과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보통 그럴 때 ‘심심한’에 다른 의미가 있나 생각하지, 말하는 이가 틀렸다고 지적하지 않는다. 아니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주요 내용이 아니라면 넘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과를 왜 심심하게 하냐며 화를 내기 시작했고, 제대로 사과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것은 받아들여져 사과문이 올라오고야 말았다. 그래서 이 문제는 권력 문제라고 읽힌다. 상대를 이해하고 싶지 않고, 자신에게 모를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상대가 사과를 구할 땐 자신을 알아서 이해시켜야지 내가 상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어떻게 이러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권력은 누가 준 것일까. 나는 온라인에서 말도 안 되는 억지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자주 보았다. MZ세대라는 신조어가 생겼고, 요즘 젊은 사람을 이해하려고 과하게 노력한 나머지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해준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심심한 사과’가 뜨거워지자 사람들은 ‘심심하다’의 뜻도 모르는 젊은 세대를 우리에서 분리해내 멍청하고 무례한 무리라고 손가락질했기 때문이다. 이 논란이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배려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문제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어쩌면 우리는 어떻게든 사람을 구분지어 내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권력을 가진 사람은 들을 필요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가 없어진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는 원인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권력과 호감이 없는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알고 싶지 않은 상대와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 기댈 곳은 기준조차 모호한 예의밖에 없는 것일까. 어쩌면 이 끈질긴 코로나의 시대에 맞춰 우리는 상대에게 닿기보다는 멀어지는 쪽을 택한 걸지도 모른다. 앞에 있지 않은 상대의 표정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우리는 상대의 표정으로 상처받을 일이 없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고, 우리는 네이버에 ‘심심한 사과’를 검색해 보는 노력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심심한 사과가 무슨 뜻이에요? 라고 묻는 것이 부끄럽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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