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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게요 Mar 31. 2024

핵폭발이든 기후위기든

어린이들이 희망이라는 희망고문

《핵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을 읽었다. 6학년 수업 도서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청소년 도서로 분류되어 있던데, 그래서인지 제법 잘 읽혔고 우리 6학년들은 잘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찾아보니 이 책은 1983년에 발표된 책이라고 한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읽기 편하다니 번역의 힘이겠지. 역자 후기는 2005년으로 되어있던데 우리나라에 늦게 들어온 덕분일 수도 있겠다. 

스토리는 아주 간단하다. 주인공은 10대초반의 소년이고, 가족은 동생과 누나 부모님까지 다섯인데, 조금 떨어진 할머니댁에 가는 길에 핵폭탄이 떨어졌고. 그 후 얼마나 무섭고 비참한 삶이 이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우리를 왜 낳았느냐고 어른들을 공격하는 모습이었다. 또 어른들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핵폭탄을 보유했고, 그것이 우리를 이렇게 고통으로 밀어넣었다며 어른을 싸잡아 비난하는 모습이다. 이 모습은 우리나라에선 벌어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어린 사람이 반기를 들면 괘씸죄가 아주 크게 적용되니까. 장애인들에게도 착하지 않다고 욕을 하는 곳이니까. 분명히 배고파서 힘이 없어도 어른끼리 똘똘 뭉쳐서 고아들에게 해를 가했을 것이다. 또 동시에 그레타 툰베리도 생각난다. 그레타 툰베리도 어른들이 우리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고 주장했고, 그건 백 번 맞는 말이니까. 하지만 지도자들은 어린애가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면서 떠든다고 무시했지 않는가.

환경도 전쟁도 어른의 잘못이다. 이걸 누가 모르겠는가. 우리는 어른이기에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고, 아이들이 살아갈 터전을 보존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른은 나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힘이 없다. 내가 지금 일회용품 덜 쓰기와 에너지 좀 줄여 보기 말고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이런 생각들은 사람을 참 무기력하게 만든다. 내가 브리타 정수기를 닦아가며 필터를 재활용하며 지내고 있는 것으로 무엇이 달라질까? 세상은 온갖 굿즈를 만들며 플라스틱을 쏟아내고 있는데. 나는 그저 나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만큼 나는 그냥 주변 사람들이 눈꼴시려지는 것을 참아내야 할 뿐이다. 

그래서 언제나 아이들에게 기후 위기와 핵폭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죄책감이 든다.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태어난지 십 년이 조금 지난 아이들에게 우리는 왜 세상의 가장 어두운 면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답은 정해져 있다. 아이들도 세상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알아야 한다는 것. 아이들은 얼마나 어처구니없을까. 나는 그냥 태어났을 뿐인데, 너희가 미래에 세상을 구해야 한다며 온갖 암울한 미래를 알려주다니. 어른들은 방법을 알면서도 안하고 있는데, 왜 어린이들한테 이러는 걸까. 어른은 이제 교육이 안되기 때문일까. 어린이들은 언제나 희망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사실 나에게 그렇게 반문하지 않는다.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산성비는 그냥 공포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아이들도 나의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가보다 한다. 좀 더 나이를 먹어서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려보면, 나는 그때 미군이 미선이, 효순이를 죽인 일에 정말 놀랐고, 분노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퍼킹 유에스에이를 불렀다. 그리고 노무현 탄핵때는 어땠는가. 야자시간에 몰래 뉴스를 들으며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20년을 더 산 나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저 무기력할 뿐이다. 문재인 때는 국민청원이라도 열심히 했는데, 박근혜 때는 탄핵시위 나가서 울면서 자리를 지키기도 했지만. 피부로 느끼기에는 현재가 가장 나쁜데, 나는 네이버 부동산에서 매일 집값을 확인하는 중년이 되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겐 희망이 있는 걸까. 30대 후반이 되기 전까진 힘을 내주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나라는 노령국가인데. 애들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만 든다.

우리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세상은 철저한 이해논리와 윗대가리들의 욕심으로만 굴러가는 것을 누가 모르냔 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켰다면 그것은 그저 우리의 힘과 운이 아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리는 무기력을 매번 학습한다. 대통령은 뻘소리를 백번해도 아무 일도 없고, 나는 뻘소리 한 번하면 벌금을 내는 세상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더러운 현재를 보여주며 희망을 말하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말하는 것 말고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희망없는 삶보다 괴로운 현재는 없으니까. 모른 척하는 것이 가장 쉽다는 것을 어른들은 알고 있고, 그저 눈감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어린이가 희망인 걸까. 나는 이미 정해진 몸이고, 어린이들은 미래가 무궁무진하니까?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정말 괴롭다. 우리나라 여성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것 다음으로 괴롭다. 전세계 문제니까 약간 나눠가지는 느낌이라서 그런가. 여하튼 정권을 심판하면 나아지려나. 우리는 독안에 든 쥐처럼 무기력하게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겠지. 발버둥쳐도 힘만 들고 독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은연중에 알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가 발버둥 안쳐서 그렇지 치기만 하면 나갈 수 있어하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 것이겠지. 그것이 가장 덜 괴로운 삶의 태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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