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먼 생장피에드포르
샤를드골 공항에서 다시 만난 루카는 편히 잠을 자다 나온 모습이다. 켄넬 문을 열었을 때도 다급히 나오는 게 아니라 평소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추측건대, 인천공항에서 켄넬에 물병 달아주고 준비할 때부터 루카는 '개고생의 서막'이란 걸 깨닫고 배변을 충분히 하는 느낌이다. 아무튼 처음이 어렵지, 한번 성공하고 나면 세계일주도 꿈꾸게 된다.
항공사마다 켄넬 규격, 물병 부착 여부 등 규정이 다르니 꼭 확인하자. 예를 들어,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는 물병을 달아야 하는데 에어프랑스는 물병 없이 보내야 한다. 루카는 행복켄넬400에 소동물 물병 250ml를 케이블타이로 고정했다.
에펠탑, 루브르 등 파리의 랜드마크는 루카탄신일 전에 다녀온 적이 있다. 같이 재방문하는 것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겠으나 (내 마음대로 정한) 우리의 목적은 관광이 아닌 모험이다. 비아리츠행 국내선까지 15시간 남은 상황. 숙소를 잡기에는 애매해서 노숙 아닌 노숙을 하기로 한다. 루카 ‘하우스’가 있으니 어디든 집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2~3시간마다 배변 산책을 했으니 파리에 자취는 남긴 셈이다.
낯선 장소에서 가까운 잔디를 찾고 싶을 때는 구글 지도 위성 모드를 활용하고 있다. 구글 지도는 원하는 영역을 선택해 미리 다운 받아가면 데이터 없이 사용 가능하다. 순례길을 걸을 때는 Camino Ninja 앱을 이용했다.
구석진 자리에서 쉬고 있던 중 빈자리도 많은데 히피스러운 젊은 남성이 옆에 털썩 앉았다.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소매치기 얘기가 많아 경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라이터를 몇 번 칙칙 돌리더니 자기가 헤로인 중독인데 목이 너무 마르다고 한다. 나도 물이 없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루카를 힐끔 보더니 슬금슬금 후퇴한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1층은 노숙자가 몰릴 것 같아 자리를 옮겼다.
2층 에어프랑스 카운터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독일 여행을 간다는 한 가족이 바로 옆에 자리 잡고는 루카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루카를 발견하고 가까이 가자고 한 것 같다. 이름, 성별, 나이를 물어본 후 다정한 목소리로 ‘루까‘를 부른다.
“루까, 프랑스는 어쩐 일이야?”
“까미노를 같이 걸을 거예요. 생장에서 출발해요.”
“까미노?”
“산티아고까지 800km 걷는 순례길이요.”
“Oh no! 기차를 타는 게 낫지 않겠어요?”
“하하, 걸어야 재밌죠.”
불순한 의도가 있는 이들에게 루카는 보디가드처럼 인식되고, 착한 사람(즉,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이스브레이커 역할을 한다. 루카를 한번 만난 사람들은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며 다음에 또 보일 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여행을 위해 인식표를 영문으로 주문 제작했다. 나도모르개 똑딱이 인식표는 덜렁거리지 않아서 장시간 걸어도 신경 쓰일 일이 없다. 앞면에는 LUCA, 안쪽에는 국가번호를 포함한 연락처를 적었다. 인식표를 보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한국에서 프랑스까지 왔는데, 프랑스 안에서 더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게 그보다 더 어려울 리가 없지 않나? 이렇게 또 자기 세뇌를 해본다. 국내선은 2시간 전 도착하면 된다지만 여기서는 내가 외국인에다 반려견 동반이니 변수가 있을 것 같아서 3시간 전 터미널 2G에 도착했다. 루카 관련 서류는 대충 훑기만 하고 케이블타이 4개를 주며 문을 고정해 달라고만 하셨다. 추가 결제도 끝나서 마음 놓고 있었는데 좌석 확정이 아니라 스탠바이(대기)라 하는 거다.
“왜 스탠바이죠? 항공권 결제는 다 했어요, 강아지까지요.”
“승객의 잘못이 아닙니다. 못 타게 되면 에어프랑스에서 보상을 해줄 거예요.”
“이번 걸 못 타면 어떻게 되는데요?”
“3시간 후에 다음 비행기가 있어요.”
“강아지는요? 그때까지 또 기다려요?”
“다음 비행기로 트랜스퍼될 거예요.”
“비아리츠 도착 시간에 맞춰 셔틀도 예약했는데요. 스탠바이 기준을 알 수 있을까요?”
“대기 4번이십니다. 혼자만 스탠바이가 아니에요.”
“4번이면 더 확률이 낮잖아요…”
곽튜브 영상에서만 보던 오버부킹이 나에게도 일어나는구나.
“오케이, 그럼 보딩 40분 전에 와서 대기 풀렸는지 확인하면 되죠?”
포기하고 가려던 중 직원이 누군가와 무전을 치더니 갑자기 내 자리가 확정이란다. 대기 4번에서 급승급했다. 루카 때문에 더 복잡해질 것 같은 건지, 코리안이 생각보다 영어를 잘해서 당황한 건지… 아무튼 비아리츠까지는 계획대로 갈 수 있겠다. 출발 20분 지연은 애교로 봐준다.
비아리츠 공항은 규모가 작은 편인데 루카가 컨베이어벨트에 짐짝처럼 실려 나왔다. 이곳 컨베이어벨트는 경사가 없고 거리도 매우 짧아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놀이기구 탄 것처럼 나오는 모습이 귀여웠다. 여기서 사전예약한 셔틀을 타고 1시간만 이동하면 출발지 생장!
셔틀에서 한국인 순례자도 만났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실 일은 없겠지만, 부엔 까미노!
"강아지랑 걸을 생각을 하다니, 대단한 용기네요."
"혼자 걷는 것보단 나은 거 같아서요."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용기 없는 순례자는 없지 않을까 싶다.
익스프레스 부리코 셔틀은 탑승 인원에 따라 요금이 달라진다. 7~8인이면 인당 €19, 반려견 요금은 별도로 €10다. 동일 업체를 통해 불필요한 짐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보낼 수 있다. 일반 캐리어가 20kg까지 €70이며, 산티아고에서 무제한 보관해 주니 도착일이 확실하지 않아도 괜찮다. 루카 켄넬도 캐리어와 같은 가격이 책정되었다.
인천에서 출국 후 25시간 만에 생장에 도착했다. 머나먼 길을 왔는데 아직 순례자 여권도 받기 전인 예비 순례자다. 마침 순례자 사무소 점심시간이라 근처 까르푸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사무소 오픈 10~15분 전부터 순례자들이 줄을 서서 우리 차례가 되기 전까지 대기가 좀 있었다. 직원 앞에 2~3명씩 모여서 설명을 듣고 숙소 안내를 받는다.
"여긴 셋이 아니라 넷이네요." 직원이 루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숙소는 잡았나요?"
"네, 에어비앤비로 했어요."
"다행이네요. 알베르게는 반려견 동반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요."
€2 동전을 건네고 순례자 여권, 그리고 첫 쎄요(도장)을 받았다.
에어비앤비에서 잡은 Mais Uhaldia는 생장에서 3km 떨어진 곳인데 피레네 방향이라 다음 날 걸을 거리가 그만큼 줄어든다. 숙소에서 1km만 걸으면 나폴레옹 루트에 합류하게 된다. 다만 에어비앤비의 단점은 알베르게처럼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니라 동키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다.
Mais Uhaldia
주소 : District Escanda 64220 Uhart-Cize
사이트 : https://www.airbnb.com/rooms/40335183
비용(24년4월) : 1인 1견 기준 77,850원
* 에어비앤비는 네이버페이로 원화 결제가 유리함
개인적으로, 인천에서 생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까미노 자체보다 난도가 높게 느껴진다. 순례길은 처음 며칠만 지나고 루틴화가 되면 힘들지 않게 완주할 것 같다. 이미 걸었던 경험이 있고 우리의 체력을 믿는다. 내일 악명 높은 피레네를 겪은 후 같은 스탠스를 유지할지는 모르겠다.
더 생생한 기록은 아래 영상에서 4K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