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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카미노 Apr 03. 2024

개 데리고 산티아고를 또 간다고?

출국을 앞둔 견주의 심정

한국 출신 1호 순례견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은 최소 100km를 걸으면 순례 증명서를 받을 자격이 된다. 출발을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이 아닌 중간지점에서 했지만 이 기준으로 우리는 프랑스길과 포르투갈길 각 한 번씩 완주한 셈이다.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턱걸이로 컷오프 시간을 맞춘 느낌이랄까. 그래서 성격상 언젠가는 프랑스길에 재도전할 거라 직감했다.


2022년 산티아고 순례길의 추억

2022년 9월 사리아~산티아고 100km 구간을 걸으며 순례길을 짧게 경험했다. 엄마의 로망을 실현하면서 루카가 마음껏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코스. 여행 계획을 사람 위주로 짰다가는 북적이는 관광지 앞에서 인증샷만 겨우 찍고 내부는 구경도 못 할 것이다. 유럽이 아무리 펫프렌들리 해도 성당, 박물관이나 유적지는 대부분 반려동물 출입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순례길은 (보호자와 반려견의 체력이 받쳐준다면) 반려견 동반 여행지로 훌륭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귀여운 순례견 여권, 더 귀여운 루카 발

"왜 개까지 고생시켜?"

2018년부터 APACA라는 단체에서 반려견을 위한 여권(크레덴시알)과 순례 증명서(콤포스텔라)를 발급하고 있다. 반려견 동반 순례길 패키지를 운영하는 현지 여행사도 있고, 일부 사립 알베르게는 그릇, 침대 등 반려견 용품을 제공한다. 제주 올레길과는 다르게 코스를 이탈하지 않고도 전구간 펫프렌들리 숙소를 예약하는 데 성공했다. 인프라가 갖춰졌다는 건 반려견도 충분히 걸을 수 있다는 거 아닐까?

순례견 여권은 온라인 주문이나 오프라인 판매처에서 €3에 구입할 수 있다. 아쉽게도 판매처는 생장에 없고 산티아고 100km 남짓 사리아(Sarria)부터 만나볼 수 있다. 보호자의 순례 증명서가 있다면 반려견 증명서도 발급을 해주는 분위기니 나중에 보일 때 구입해도 괜찮다. 더 많은 정보는 APACA에 나온다.


반려견과 함께 걷는 순례자

"Bonito, 네 발이라 그런지 사람보다 잘 다니는군요!"

루카는 힘들어하기는커녕 나보다 총총총 앞서 나갔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의 이쁨을 받고 인싸견처럼 사진도 찍히고. 이베리코 돼지고기 섭취로 체중은 늘어난 상태로 귀국했다. 장거리 비행이 1도 걱정 안 된다면 거짓말이지만... 이 단계만 거치면 함께 걸으며 성장할 수 있는 모험이 기다린다.


네 발로 세상의 끝에 서다

"석 달 만에 또 순례길을 간다고?"

같은 해 12월, 약 2주에 걸쳐 포르투갈길 250km를 걸었다. 목적지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점에서는 재방문이라 볼 수 있으나, 계절, 인원, 코스 등 모든 것이 달랐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고, 남은 거리는 순식간에 꺼지는 노을처럼 줄어들었다. 순례길의 종착지인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 성취감보다 아쉬움이 컸다. 심지어 0.000km 이정표가 있는 세상의 끝, 피스테라(Fisterra)에서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지나 묵시아나 피스테라로 가야만 0.000km 이정표를 볼 수 있다. 렌터카를 빌려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페인 곳곳을 둘러보는 걸 추천한다. 소형견이 아니라면 스페인 내 이동은 자동차나 비행기가 수월하다. 중대형견(40kg까지) 탑승을 허용하는 렌페 열차 구간은 마드리드-바르셀로나, 마드리드-말라가 등이 있다. 운전 계획이 없어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국제운전면허증(한국 면허증 지참 필수)을 준비하자.


출국 D-200. 그러니까 2023년 9월, 아시아나 마일리지 소멸 안내를 받고 파리행 항공권을 구입했다. 이번에는 우리 둘만의 여정으로 생장부터 출발해 피레네를 넘는 800km 풀코스로 정했다. 드디어 끝내지 못한 숙제를 할 수 있겠다!

반려견 동반 출국은 4~5개월 전부터 준비하는 게 일반적이다. 농림축산검역본부에 정보가 상세히 나와 대행사 없이 혼자 처리했다.
EU부속서류 작성법 : https://youtu.be/ZL3HxYXacJo


여행에서 체력은 자산이다

체력적인 준비는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다. 추운 겨울 동안 열심히 훈련하여 3월 서울마라톤 풀코스 서브4, 뉴발란스 하프레이스 PB를 달성했다. 인터벌 훈련은 루카를 운동시킬 겸 같이 달리기도 했다. 순례길 하루 평균 거리는 겨우 20~25km. 방심하지 말고 살살 다니자.


집에서 30분 거리인 인천공항

40일 일정을 부모님 몰래 진행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계획을 되돌릴 수 없는 시점에 통보했다.

"루카랑 여행 갈 때 우리 공항에 데려다줄 수 있어?"

"응. 어디 가는데?"

"산티아고."

"또 가?"

"전체 ㅋㅋ"

"전체? 800km?! 안돼, 죽어!"

"안 죽어."

"한 달 넘게?"

"응."

"그건 안되지."

"왜 안돼?"

"혼자서는 안되지."

"괜찮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꽤 빨리 받아들이셨다.  


혼자서도 잘해요

어느덧 출국 D-1. 루카 관련 출국 서류를 대행사 없이 준비하다 보니 혹시라도 부족한 게 있을까 봐 살짝 불안하다. 늘 그렇듯 하고 나면 별 거 없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나는 시바 견주다. 2년 전 처음으로 화물칸 위탁 운송을 했을 때는 비행기 타는 내내 루카의 생사를 걱정했다. 12시간 후 하품 쩍쩍하며 느긋하게 나오는 모습에 곧 허탈해졌지만. 너 여행 체질이구나!

화물칸 위탁 운송은 자리가 한정되고 지원하지 않는 기종도 있다. 비행 일정을 알아본 후 항공사에 전화해 확인을 거쳐야 하는데, 통화량이 많아 기다리다 지친다. 이때 처음부터 언어를 '영어'로 선택하면 훨씬 빠르게 연결된다. 물론 통화는 영어로 진행해야 한다. 대한항공은 앱에서 반려동물 정보를 직접 입력할 수 있지만 아시아나는 이런 기능이 없었다.


어깨가 무거운 루카 견주

이번에 제일 우려가 되는 부분은 인천-파리가 아닌, 파리-생장 이동이다. 순례길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네이버 카페 까미노의 친구들 연합에도 자주 올라오는 질문이다. 배낭에 켄넬에 루카까지 챙기며 샤를드골 공항을 빠져나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미션임파서블. 버스나 기차보다 비용이 들어도 비아리츠까지 비행기로, 생장까지는 셔틀을 타기로 했다.

순례길을 준비한다면 '까친연' 카페에 가입하고 자주 하는 질문 40가지부터 정독해 보길 권한다.
참고 : https://cafe.naver.com/camino2santiago/40259


잘못된 배낭 선택의 예

세 번째 순례길을 나서는 순례자인 만큼 짐 꾸리기 고수가 되었을 법도 한데 이제야 내 몸에 맞는 배낭을 준비했다. 사진에 보이듯, 첫 순례길에는 루카의 체력을 과소평가해 가끔은 업고 다닐 생각(?!)으로 반려견 이동가방을 직구했다. 루카도 들어갈 수 있는 가방을 발견하고 매우 뿌듯했던 걸로 기억한다. 사용 빈도가 떨어져 결국 다른 시바견 친구(료코야, 잘 쓰고 있니?)에게 넘겼다. 두 번째 순례길에는 체격 좋은 남동생의 도이터 배낭을 빌렸다. 저 말도 안 되는 이동가방보다 훨씬 편했지만 구형 모델이라 배낭 자체가 무거웠고 토르소가 맞지 않았다.


메인 배낭 & 보조가방

시행착오 끝에 선택한 메인 배낭은 그레고리 제이드 38L. 매장에서 피팅을 해보고 오케이몰에서 구입했다. 배낭 무게는 체중의 10%가 적당한데 훨씬 무거운 9kg가 되었다. 배낭을 다음 숙소로 보내는 동키서비스를 이용할 때는 써미트 15L 접이식 배낭을 메려고 한다.

배낭 기내 반입을 원한다면 이용하는 항공사의 휴대 수하물 허용 기준을 참고하자. 일반적으로 36~38L 배낭은 기내로 가져갈 수 있는 크기다. 대한항공아시아나는 세 변의 합이 115cm 이내, 각 변의 최대치는 55 x 20 x 40cm로 제한한다. 휴대 수하물 무게는 10kg를 초과하면 안 된다.


출국 D-1 레디샷

루카를 위한 준비물만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류 : EU펫여권, EU부속서류, 검역증명서, 예방접종 및 건강증명서 2부, 광견병 항체가 결과지

용품 : 목줄, 리드줄, 우비, 배변봉투, 빗, 접이식 그릇, 사료, 넥스가드

켄넬 관련 : 물병, 부착용 그릇, 매트, 케이블타이


루카 식량부터 우비까지 알차게 꾸린 배낭, ISTJ스러운 엑셀 계획표, 마라토너의 체력 3박자가 갖춰졌다. 2년 전 걸었던 순례길은 사전답사에 불과했다. 루카미노, 그 세 번째. 가보자고!


더 생생한 기록은 아래 영상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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