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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민 Jul 10. 2024

논리는 전부가 아니다

납득시키기 - 수학으로부터 배운 인문학의 중요성

슬견설

고등학교 시절 문학 시간에 '슬견설'이라는 고전 문학을 공부했던 적이 있다. 고려시대 문인인 이규보가 쓴 '설'이라는 장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손(客)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제저녁엔 아주 처참(悽慘)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불량한 사람이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쳐서 죽이는데, 보기에도 너무 참혹(慘酷)하여 실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맹세코 개나 돼지의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하는 화로(火爐)를 끼고 앉아서, 이를 잡아서 그 불 속에 넣어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손이 실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는 미물(微物)이 아닙니까? 나는 덩그렇게 크고 육중한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한 말인데, 당신은 구태여 이를 예로 들어서 대꾸하니, 이는 필연(必然) 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대들었다.
나는 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무릇 피(血)와 기운(氣)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벌레,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찌 큰 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즉,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큰 놈과 작은놈을 적절히 대조한 것이지, 당신을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십시오. 엄지손가락만이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습니까? 한 몸에 붙어 있는 큰 지절(支節)과 작은 부분이 골고루 피와 고기가 있으니, 그 아픔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각기 기운과 숨을 받은 자로서 어찌 저 놈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놈은 좋아할 턱이 있겠습니까? 당신은 물러가서 눈 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동일시하도록 해 보십시오. 연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도(道)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의 정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보통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각 상황에 대입해 보면 "무엇이 옳은가?"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논리가 진리인 줄 알았던 시절이 있다. 논리적으로 옳고,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능하면 그것은 옳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곤 했다. 과거의 나라면 위의 슬견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화자가 펴는 논리는 흠잡을 곳 없이 옳은 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슬견설 속 청자로 등장하는 손(客)의 MBTI가 T였다면 그조차도 말문이 막힌 채 인정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ZFC 공리계


내가 논리만큼이나 좋아하는 논리의 친척뻘 되는 학문이 있다. 바로 수학이다. 그리고 수학에서도 가장 근간이 되는 세부 분야들 중에는 '집합론'이라는 분야가 있다. 중고등학교 수학책의 가장 처음 장을 보면 항상 집합론이 자리 잡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대학교에 와서 배우는 수학의 여러 갈래들도 대부분 집합을 통해 그 과목에서 다루고자 하는 기본 알맹이들을 정의하고 넘어간다. 예를 들어 자연수라면 "이런 수들을 자연수라고 한다"는 표현보다는 "이런 특성을 지닌 집합을 자연수의 집합이라고 하고, 그 원소를 자연수라고 하자"는 식으로 정의한다.


집합론 위에 쌓인 많은 분야들이 집합을 이용한 약속에서 출발했다면, 집합론이라는 학문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보통은 'ZFC 공리계'라는 10가지 공리로부터 출발하는 편이다. "수학의 근원을 쫓고 쫓고 쫓아가다 보면 결국 몇 가지 약속에서 출발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본 적 있을 텐데, 보통은 이 10가지 약속을 말하는 것일 것이며 "공집합은 존재한다"와 같이 얼핏 들어보면 당연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10가지 공리가 옳다는 건 어떻게 증명하는가? 이미 말했지만 이 10가지 공리는 약속이기 때문에 증명하지 않는다. 약속이라는 말은 때때로 반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누구 맘대로...?) 보통 나는 이 표현보다는 믿음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이 10가지 공리를 옳다고 믿는 것이다. 약속이라고 해봤자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모아 놓고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수학도 어딘가에 유용하게 쓰이기 위해서는 세상을 잘 추상화하여 담고 있어야 하므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 10가지 공리를 읽었을 때 충분히 납득이 가기 때문에 믿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것을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야 비로소 집합론과 그 위에 쌓인 학문들을 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선택 공리


그렇지만 1개도 아니고 10개나 되는 약속을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믿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 걱정대로 ZFC 공리계의 마지막 공리인 '선택 공리'는 다른 공리들과는 다르게 납득하거나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나 존재한다. 그래서 특정 명제를 증명할 때 선택공리를 사용하였다면, 이 증명으로는 선택 공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어렵다. 선택공리를 사용하지 않은 증명을 찾아내야만 이들까지 납득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꽤나 큰 충격을 받고 한편으로는 굉장히 흥미로운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선택공리를 믿는 사람이 50명이고 안 믿는 사람이 50명이라고 치면 선택 공리를 이용해서 증명을 하면 50명만 납득을 하고 선택 공리 없이 증명을 하면 100명이 납득한다는 사실은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수학에 대한 이미지를 무너뜨렸다. 수학적으로 옳으면 항상 옳은 것이고 틀리면 항상 틀린, 굉장히 깔끔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옳고 그름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도 아닌 수학에서, 그것도 다른 많은 분야의 근간이라고 될 수 있는 공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무엇이 목적인가?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는 많은 일들은 보통 '타인을 납득시키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도 연구를 업으로 하고 있지만, 연구라는 것도 내가 무언가를 발견해서 나의 언어로 나만 알고 있다면 그 가치를 잘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를 누군가에게 그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그 대상은 작게는 동료 연구원이나 상사가 될 수도 있고, 크게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류 전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우리가 아무리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지 않는 학문을 연구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납득시켜야 하는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은 살아온 환경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고, 심지어는 같은 사람이더라도 시간과 장소가 바뀜에 따라 그 생각이 시시각각 변한다.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며, 감정에 이끌려 이성과는 먼 판단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선택 공리조차도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는데 오죽하겠는가?


우리는 스스로 아무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어떠한 결론이나 사실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이를 위와 같은 불안정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해야만 한다. 논리적으로 A가 아무리 옳은 것 같다 하더라도, 100명 중에 70명이 이를 납득했고 30명이 이를 여전히 믿지 않는다면? 그건 "A를 받아들일 수 있는 70명과 그걸 이해 못 하는 나머지 30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70명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고 30명을 설득시키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철수와 영희가 토론을 해서 철수가 이겼고 영희는 철수의 논리에 반박하지 못했다. 철수는 그럼 옳은 것인가? 아니다. 철수의 논리력과 토론 실력이 영희보다 뛰어났을 수도 있으며, 철수의 목소리가 커서 영희가 두려운 나머지 항복했거나, 또는 사실 영희가 철수를 짝사랑해서 봐준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이성과 합리와 논리로만 사는 동물이 아니며, 논리가 모든 것을 대변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다시 슬견설로


다시 슬견설로 돌아와 보자. 과거의 나와는 다르게 지금의 나는 오히려 슬견설의 화자가 살짝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청자가 했던 말이 너무 와닿는다. "이는 미물(微物)이 아닙니까? 나는 덩그렇게 크고 육중한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한 말인데, 당신은 구태여 이를 예로 들어서 대꾸하니, 이는 필연(必然) 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닙니까?" 맞다. 필연코 청자를 놀리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은 이보다는 개에게 더 큰 동정심을 느낀다. 생김새만 하더라도 이보다 개가 인간과 닮아 있으며, 역사적으로 인간과 더 많은 유대감을 쌓은 존재 또한 개다. 개와 이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이중잣대와 같은 오류라고 여겨질 수는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이보다는 개를 더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논리적으로 이겨서 무엇을 얻었는가? 설령 그 사람이 "맞네요, 제가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네요. 반성하겠습니다"라고 꼬리를 내렸다 한들, 그것으로 인해 무엇을 얻었는가? 우월감? 승리감?


개고기 취식을 반대하는 집회 등을 다룬 기사에는 "그래놓고 돼지고기나 소고기는 잘만 먹죠?"와 같은 조롱 섞인 댓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물론 본인의 신념을 남에게 강요하려는 태도가 불편하거나 아니꼬울 수는 있다. 그러나 "돼지고기나 소고기는 잘만 먹으면서 개고기를 먹는 것을 반대하는" 행동 자체가 이중적이고 비논리적인 것 같다고 해서 이를 비난할 수 있는가? 그저 개에게 돼지나 소보다 더 불쌍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이렇게 집회가 종종 열릴 정도로 많아진 것이다. 그들이 논리적으로 옳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그 사실이 어떠한 가치를 만들지는 않는다.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들이 논리적으로 틀렸음을 지적하기만 할 것이고, 누군가는 "저 사람들은 다른 고기보다도 개고기를 먹는 행위를 싫어하는 사람들이구나"라고 받아들일 것이며, 누군가는 이 사실로부터 어떤 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그다음을 고민할 것이다.




인문학


어릴 적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해준 적이 있다.

"우리 윗세대는 목소리가 크면 이긴 줄 아는 사람들이 많고, 우리 세대는 논리적이면 이긴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의 나는 더 논리적인 쪽이 이긴 게 맞지 않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A랑 B랑 토론하다가 결국 B가 A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한다면 A가 옳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이러한 좁은 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학문이 인문학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세상엔 다양한 인간들이 있으며, 철저한 논리로부터 도출된 결론이더라도 그들을 납득시키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누군가는 이 글을 보고 당연한 글을 왜 이렇게 길게 써놨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저 이런 인문학의 중요성을 역설적이게도 ZFC 공리계를 공부하다가 깨닫게 된 경험이 나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보니 그 경험을 공유하고자 글로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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