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널다 멈춘 순간

by 이루체

젖은 수건을 건조대에 건다. 탈탈 털어서 구김을 펴고, 끝을 맞춘 뒤 집게를 끼운다. 다음 수건도, 그 다음 수건도 같은 순서다. 생각 없이 손만 움직이면 알아서 끝나는 일이니까.


밤 열한 시의 베란다. 퇴근하고 밥 먹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항상 이 시간이다. 열어둔 창문 틈으로 겨울 끝자락의 찬 공기가 밀려든다. 건조대 위로 수건에서 빠진 물기가 한 방울씩 맺히고 있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찬 공기랑 섞여서 묘하게 깨끗하다. 세탁기 돌리고 빨래 너는 게 하루의 마지막 할 일인데, 이것만 끝내면 눕겠지. 내년에는 꼭 건조기를 사야지. 작년에도 같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검은색 양말 한 짝을 집어 들었을 때, 문득 손이 멈췄다.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가 서늘하다. 집었으면 널면 되는데 왜 멈췄는지 모르겠다. 뚜렷한 슬픔 같은 건 아니다. 오늘이 특별히 힘들었던 것도 아닌데. 아마 어제도 그저께도 딱히 힘든 날은 아니었을 거다. 안 힘든 날들이 이렇게 쌓이면 어느 순간 멈추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양말에서 물이 똑, 떨어져 발등에 닿는다. 차갑다. 그 감각이 선명한데도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젖은 양말을 든 채 서 있는 자세가 우스울 텐데, 볼 사람이 없으니 상관없겠지. 밤 열한 시에 베란다에서 양말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사람. 누가 보면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줄 알겠다. 고민이 있으면 오히려 나을 것 같기도. 뭐라도 생각할 게 있으니까.


가끔 이런 순간이 온다. 양치를 하다가 거울 속 얼굴이 낯설 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 앞까지 왔는데 도어락을 열지 않고 한참 서 있을 때. 몸이 먼저 멈추고 나서야 머리가 뒤늦게 알아챈다. 아, 멈춰 있었구나. 그 사이에 뭘 생각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무것도 안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못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베란다 바닥으로 물방울이 툭, 떨어진다. 작은 물 얼룩이 번져가는 걸 가만히 내려다본다. 바깥은 조용하다. 낮에는 들리던 아이들 소리, 택배 차 소리 같은 것들이 전부 사라지고, 간간이 바람 소리만 창문 틈으로 들어온다. 이 시간에 누군가도 빨래를 널다 멈춰 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든다. 그 사람도 별다른 이유는 없겠지.


양말을 건조대에 건다. 딸깍. 남은 티셔츠들을 털고 끝을 맞춘다. 다 널고 나니 건조대가 빈틈없이 찼다. 내일 아침에 마를지 모르겠다. 안 마르면 또 내일 밤에 이 앞에 서 있겠지. 이번에는 걷고, 개러. 창문을 닫으니 찬 공기가 끊기고 베란다가 조용해진다. 바닥의 물 얼룩은 내일 아침이면 마를 거다. 빨래보다는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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