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루체

루체 씨는 수시로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성적이 떨어지기 전에 넣어둔 원서 덕분이었어요. 나름 나쁘지 않은 대학이었습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뒤, 루체 씨는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해서 출석일수만 채우는 것으로 합의를 봤어요. 더 이상 그 교실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선생님은 생각보다 쉽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누가 괴롭히고 누가 괴롭힘을 당하는지보다, 문제가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을까요.


응, 역시 내가 귀찮았던 거네.


그렇게 고등학교의 마지막 시간은 텅 비었습니다. 졸업식 같은 추억도 없었어요. 같은 반 아이들이 롤링 페이퍼를 교환하고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루체 씨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루체 씨는 그저 빨리 떠나고 싶었어요. 아무도 루체 씨를 모르는 곳으로.




대학에 가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아무도 루체 씨를 모르는 곳이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이 되어줄 거예요.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새터라는 행사에도 가봤습니다. 리조트에서 1박 2일을 함께 보내는 신입생 행사였는데, 루체 씨는 거기서 열심히 웃었고, 누군가 말을 걸면 대답하려고 애썼어요. 밤에 다 같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 원 안에 있었습니다. 광대가 아플 정도로 웃었지만 조금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어요. 이번에는 잘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자, 루체 씨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겼어요. 등록금은 어떻게든 해결이 됐지만, 생활비까지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거든요.


아무래도 알바를 좀 해야겠어.


루체 씨는 근로장학생으로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반납된 책을 정리하고, 대출 데스크에서 학생증을 받아 바코드를 찍는 일이었어요. 주말에는 학교 근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그렇게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다 보니 사람들과 가까운 듯 먼 듯 미묘한 거리가 생겼어요. 루체 씨는 그게 편하면서도 불안했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상처가 아직 루체 씨 안에 있었거든요. 누군가 다가오면 반갑다가도 어느 순간 두려워졌어요.


이 사람도 언젠가 등을 돌리면 어쩌지.

불쌍해서 같이 있어주는 거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스치면 루체 씨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가까워지면 무섭고, 혼자이면 외로운, 그 사이 어딘가에 루체 씨는 서 있었습니다. 바쁜 일상이 그 어딘가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준 셈이었어요. 밥을 같이 먹자는 말에 '알바 있어서'라고 대답하면, 그건 거절이 아니라 사정이 되니까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연애도 하게 되었어요. 근로장학생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루체 씨도 평범한 것들을 원했거든요. 같이 밥을 먹고, 같이 걷고, 가끔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누군가 다가왔을 때,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나란히 앉아 있는 시간은 좋았어요. 루체 씨가 말이 없어도 그 사람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억지로 뭔가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구나, 하고 루체 씨는 생각했어요.


좋은 사람이야.


고마웠고, 안심했습니다. 조금씩 루체 씨의 마음에서도 그 사람과의 거리감이 좁혀지고 있었어요.


"무슨 생각해?"


루체 씨는 머릿속에 있던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어떤 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별거 아니야"


라고 대답했어요. 그 사람은 기다려줬지만, 루체 씨의 침묵이 벽처럼 느껴지는 날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루체 씨에게 이야기했어요.


"꽤 오래 만났는데도, 우리가 가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같이 있어도 자꾸 외로워.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 틈이 느껴져."


늘 그랬듯, 루체 씨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요.


역시 나는 혼자가 어울리는 사람인가 봐. 잘하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기만 하고.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루체 씨는 3층 서가 끝에 있는 작은 틈을 알게 되었어요.


벽과 책장 사이, 의자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었습니다. 반납할 책을 들고 3층을 오갈 때마다 그 자리가 항상 비어 있었어요. 사람들은 열람실에 앉았지, 이런 구석까지는 오지 않았거든요.


쉬는 시간에 루체 씨는 그 틈에 앉아보았어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창문 하나가 있었고,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어요. 서가의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습니다.


루체 씨는 그 냄새를 좋아했어요.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초등학교 때 동네 도서관에서도 이런 자리를 찾아 앉곤 했어요. 서가 뒤편의 조용한 자리. 그때도 루체 씨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장소를 좋아했었죠.


달라진 것은 없었어요. 루체 씨는 여전히 틈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발표가 있는 날이면 전날 밤에 잠을 못 잤어요. 머릿속으로 수십 번 리허설을 했습니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 목소리가 떨리면 어떻게 할지, 질문이 들어오면 뭐라고 대답할지. 그 리허설이 새벽까지 이어져서, 정작 발표 때는 밤을 샌 얼굴로 서 있곤 했어요.


발표가 끝나면 루체 씨는 곧장 3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서가 끝의 틈에 앉아서 숨을 쉬었어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숨을 쉬는 것. 그때 루체 씨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주말 카페는 학교 근처 프랜차이즈였어요.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들고,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면 끝. 정해진 말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평일에는 도서관, 주말에는 카페. 루체 씨의 일주일은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빈틈없음이 루체 씨에게는 오히려 편했어요.


카페에는 선배 알바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리스타를 꿈꾸는 사람이었는데, 프랜차이즈 카페의 에스프레소 머신으로는 성이 안 찼는지 자기 핸드드립 도구를 매장에 들고 와서 쓰고 있었어요. 실력이 좋은 모양인지 점장님이 눈감아 주셨습니다.


어느 날 오전, 손님이 없는 시간에 그 선배가 물었어요.


"핸드드립 해본 적 있어?"


루체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해볼래? 어렵지 않아."


선배는 루체 씨에게 서버와 드리퍼를 내밀었어요. 필터를 접는 법, 원두를 담는 양, 물의 온도. 하나씩 알려주었습니다.


"천천히 부어. 급하면 맛이 탁해져."


루체 씨는 주전자를 기울였어요. 뜨거운 물이 가는 줄기로 떨어졌습니다. 원두 위에 물이 닿자 동그란 거품이 부풀어 올랐어요. 빵을 굽는 것처럼 도톰하게.


"잘하네."


선배가 말했어요. 루체 씨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물줄기에 집중하고 있었거든요.


물을 붓는 동안 루체 씨의 머릿속은 조용해졌어요. 물줄기의 굵기, 원두가 부풀어 오르는 속도, 서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커피의 색깔. 그것들에 집중하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


틈.


루체 씨는 또 틈을 찾은 거예요. 도서관 서가 끝의 틈이 아닌, 물줄기와 원두 사이의 틈.


완성된 커피를 마셔보았어요. 쓰고, 시고, 그 뒤에 무언가 달았습니다.


"괜찮은데?"


선배가 한 모금 마시고 말했어요. 루체 씨는 그 '괜찮은데'라는 말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그 뒤로 루체 씨는 주말마다 카페에 출근하면 핸드드립을 한 잔씩 내렸어요. 메뉴에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손님에게 팔 수는 없고, 자기가 마실 커피를 직접 내린 거예요.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이고, 천천히 붓고, 기다리는. 그 과정이 좋았어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잖아요.


에스프레소 머신은 버튼을 누르면 알아서 나왔지만, 핸드드립은 전부 손으로 해야 했어요. 물줄기를 조절하고, 들이고, 참고, 다시 붓고. 그 느린 과정 안에서 루체 씨의 손은 떨리지 않았습니다. 사람 앞에서 말할 때는 목소리가 떨렸는데, 물을 부을 때는 손이 안정되었어요.


물은 루체 씨를 판단하지 않을 테니까요.




카페 아르바이트는 졸업을 앞두고 끝이 났어요.


마지막 날, 선배가 작은 드리퍼 세트를 건네주었습니다.


"집에서도 내려 마셔. 아침에 한 잔 하면 좋아."


루체 씨는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막상 입을 열자 "네"라는 말만 나왔어요. 선배는 웃었습니다. 루체 씨가 말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드리퍼 세트는 루체 씨의 방 한쪽에 놓여 있다가, 이사할 때 상자 깊숙이 들어갔어요. 오랫동안 쓰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버리지는 않았어요.


화, 금 연재
이전 02화가라앉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