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년이 끝났습니다.
졸업식에도 갔어요, 이번에는. 부모님이 오셨거든요. 학사모를 쓴 루체 씨를 보고 어머니가 웃으셨습니다. 루체 씨도 웃었어요. 오랜만에 짓는 웃음이라 얼굴 근육이 어색했지만, 그래도 웃었습니다.
사진을 찍었어요. 루체 씨와 부모님, 세 사람 다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는 사진. 그 사진 속 루체 씨의 눈은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었을까요.
도서관 3층 서가 끝, 벽과 책장 사이의 틈.
주말 카페에서 혼자 핸드드립을 내리던 시간.
혼자서도 괜찮은 장소가 있다는 것.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대학교 4년은 루체 씨에게 그런 걸 남겨주었습니다.
졸업 후, 루체 씨는 하고 싶었던 분야의 작은 회사에 취직했어요. 면접 때 손이 떨렸지만 수십 번 리허설을 한 덕분에 어떻게든 해냈습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날,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어요.
루체 씨는 출근 첫날을 위해 하늘색 드레스 셔츠를 한 벌 샀습니다. 옷걸이에 걸어두고 바라보면서 생각했어요.
이제 시작이야.
하지만 그 설렘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출근 첫 주에는 하늘색 셔츠를 다려 입었어요.
둘째 주부터는 다림질을 하지 않게 되었고,
한 달이 지나자 셔츠는 의자 등받이에 걸린 채로 밤을 보내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사무실에 혼자 남아있는 밤이 잦았어요. 모니터 불빛만 켜진 사무실은 조용했고, 건물 밖 편의점의 간판만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배가 고프면 그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다 먹었어요. 책상 위에 삼각김밥 비닐이 하나씩 쌓여갔습니다. 루체 씨가 며칠 밤을 새웠는지를 세는 건 달력보다 그 비닐이 더 정확했어요.
어느 새벽, 모니터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습니다. 목이 뻣뻣했어요. 의자 등받이에 걸린 셔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구겨져 있었어요. 처음 옷걸이에 걸어두고 바라보던 그 셔츠가.
이러려고 샀던 건 아닌데.
당시에 유행하던 것은 '열정페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열정이 있으니까 적은 돈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루체 씨는 매일을 밤새워 일하면서도 돈은 100만 원 남짓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인턴이 끝나면 급여를 올려주겠다고 했어요. 6개월을 버텼습니다. 인턴이 끝나고 올라간 급여는 고작 20만 원.
대표는 말했습니다.
"월급을 20%나 올려줬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100만 원의 20%는 20만 원이 맞으니까요. 하지만 120만 원이라는 숫자 앞에서 루체 씨가 느낀 것은 수학적 정확성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모멸감이었습니다.
밤을 새우는 날이 잦아지면서 몸도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어요. 손가락이 저리고, 눈이 뻑뻑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납덩이같았습니다. 하고 싶었던 일이긴 하지만, 몸을 버려가면서까지는 아니었어요.
루체 씨는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공무원이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높은 연봉보다도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었거든요.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고, 주말에는 쉬고, 적당한 월급을 받는 것. 루체 씨에게 그것은 꿈이라기보다는 최소한의 바람이었습니다.
사실 루체 씨 자신도 알고 있었어요. 공무원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해본 결과가 이 모양이었으니까, 이번에는 하고 싶은 일 대신 살아남을 수 있는 일을 골랐습니다.
루체 씨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차분히 준비하면 1년 안에 충분히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국어와 영어와 한국사는 고득점을 노려볼 수 있는 수준이었고, 선택과목만 잘 보면 무난하게 합격할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공무원 시험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네 도서관 열람실에 자리를 잡고, 아침에 가서 밤에 돌아오는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도서관에는 루체 씨와 비슷한 사람들이 앉아있었습니다.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참고서를 펼쳐놓고,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숙인 채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어요. 과묵한 곳이었습니다. 루체 씨에게는 그게 오히려 편했어요.
하지만 편한 것과 견딜 만한 것은 다릅니다.
도서관 열람실에는 소리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있었어요. 형광등이 지지직거리는 소리, 에어컨이 돌아가는 낮은 웅웅 거림, 누군가 페이지를 넘기는 바스락 소리. 그 소리들은 너무 작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지 못했지만, 하루 종일 앉아있는 루체 씨에게는 다 들렸어요.
점심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열람실이 텅 비었습니다. 루체 씨는 가져온 김밥을 복도 벤치에서 먹었어요. 도서관 밖으로 나가면 돌아오기가 싫어질 것 같아서, 건물 안에서 해결했습니다. 김밥을 다 먹고 나면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 참고서를 폈어요. 오후의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왔지만, 루체 씨의 자리까지는 닿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도서관 폐관 음악이 흘러나오면, 루체 씨는 참고서를 덮고 가방에 넣었어요. 오늘 몇 페이지를 넘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내일도 같은 자리에 앉을 거라는 건 확실했습니다.
그게 루체 씨의 하루였어요. 어제와 같고, 내일과도 같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서관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무거워졌어요. 같은 문제를 세 번째 풀고 있는데 답이 달라져요. 어제 외운 것을 오늘 까먹어요.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데, 이미 밑줄이 그어져 있어요. 언제 그은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1년이 지났어요. 불합격. 아슬아슬한 점수 차이였습니다. 올해는 운이 없었다고, 다음에는 되겠지, 하고 루체 씨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어요.
2년이 지났습니다. 불합격. 또 아슬아슬했어요.
루체 씨의 시간은 멈춰있었습니다.
어느 날 도서관을 나서는데, 건물 앞 느티나무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어요. 분명 얼마 전까지 초록이었는데. 루체 씨는 잠깐 멈춰서 그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계절이 바뀐 줄도 몰랐어요. 도서관 안에는 계절이 없었거든요. 형광등은 항상 같은 밝기였고, 에어컨은 항상 같은 온도를 유지했습니다.
도서관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있었어요.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같은 시간에 나가던 사람. 어느 날 그 자리가 비어있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합격한 건지, 포기한 건지. 루체 씨는 그 사람의 이름도 몰랐지만, 빈자리를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여기서 빠져나갔구나.
시험을 보고 나면 언제나 아슬아슬한 점수 차이로 불합격이었어요. 0.5점, 1점, 2점. 칼로 자른 듯한 합격선 바로 아래에 루체 씨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몇 점 차이 안 났으니까 다음에는 되겠지, 라는 생각이 루체 씨를 계속 의자에 붙들어 매었어요.
어차피 불합격일 바에는 차라리 희망이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시험을 못 봤으면 깨끗하게 포기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이 루체 씨를 놓아주지 않았어요. 포기하기에는 아깝고, 계속하기에는 지쳤습니다.
그 사이에 루체 씨의 친구들은, 친구라기보다는 지인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하겠지만,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SNS를 열면 누군가는 여행 사진을 올리고, 누군가는 승진을 축하받고 있었습니다.
루체 씨는 SNS를 지웠어요. 들어가 보지 않으면 되니까. 그래도 가끔씩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이 앱이 있던 자리를 누를 때가 있었습니다. 이미 없어진 자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