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체 씨에게는 오래도록 만나던 연인이 있었습니다. B라고 부를게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루체 씨가 아직 작은 회사에 다니던 때였어요. B는 루체 씨의 재미없는 농담에도 웃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루체 씨가 말이 없어도 어색해하지 않았어요. 그냥 옆에 앉아서, 자기 할 일을 했습니다.
루체 씨는 그런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편했어요.
아무래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겠다고 말했을 때, B는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루체 씨가 하면 금방 될 거야. 원래 공부 잘하잖아."
그 말이 루체 씨는 좋았어요. 의심 없이 믿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이.
B는 루체 씨가 도서관에 있는 동안 가끔 도시락을 싸다 주었어요. 반찬통 뚜껑을 열면 계란말이가 들어있었습니다. B는 루체 씨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하나 기억해 주었습니다.
주말에는 가끔 B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B는 소파에서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고, 루체 씨는 바닥에 앉아 참고서를 펼치고 있었어요.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B가 가끔 "배고프지 않아?" 하고 물으면, 루체 씨가 고개를 젓는 것. 그게 한 시간에 한 번 정도 오가는 대화의 전부였어요. B의 집에서는 이상하게, 도서관에서보다 글자가 잘 들어왔습니다. 옆에 숨소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달랐어요.
시험이 끝난 날에는 B가 루체 씨를 끌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어서 나와. 오늘은 맛있는 거 먹어야지."
루체 씨에게 B는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연결된 줄 같은 사람이었어요. 도서관 천장만 보다가 B 옆에 앉으면, 세상이 그 천장보다 훨씬 넓다는 것이 다시 느껴졌습니다.
처음 불합격 통보를 받던 날, 루체 씨는 B에게 문자를 보냈어요. 짧게, '미안해'라고만. B는 금방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괜찮아. 아직 만 1년도 준비 안 했잖아. 내년엔 되겠지."
"응, 내년에는 될 것 같아."
이듬해에는 만남도 줄였습니다. 연락의 빈도도 줄였어요. 오랜만에 한 번씩 얼굴을 봤는데, B가 루체 씨를 대하는 온도감이 어딘가 어색했어요. 루체 씨는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어요.
두 번째 불합격 소식을 전한 날엔 답장이 조금 늦게 왔어요.
"오래 걸려도 괜찮아."
텍스트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 메시지에는 말줄임표가 붙어있었습니다. 루체 씨는 보이지 않는 말줄임표를 한참 바라보았어요. B도 그 말을 하기 전에 잠깐 고민했을 거예요. 자기도 그 말을 믿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겠죠.
B에게도 나름대로 힘든 시기였을 텐데, 루체 씨는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묻고 나선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 힘든 시기를 견딜 힘을 줘야 하는데, 루체 씨는 B에게 힘을 줄 수 없었어요. '요즘 어때'라는 질문에 '도서관 다니고 있어'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B가 말했어요.
"우리 그만 만나자."
루체 씨는 밥을 먹다 말고 B를 바라보았습니다. B의 표정은 단호했지만 눈은 빨개져 있었어요.
B도 이 말을 꺼내는 데 오래 걸렸구나.
"조금만 더 기다려줘. 이번에는 될 것 같아."
양치기 소년 같다고 루체 씨는 생각했습니다. 또 1년만큼, 루체 씨의 자신감도 줄었습니다.
"나도 충분히 기다린 것 같아."
눈은 빨간 데도 B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러 번 연습했을 거예요. 루체 씨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알아요. 상대방에게 할 말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어야 비로소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되거든요.
B가 밉지는 않았어요. 힘든 사람이 힘든 사람을 돌볼 여유는 없습니다. 루체 씨도 B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잖아요. 하지만 루체 씨는 B에게 꼭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지해 줘서, 믿어줘서, 잘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만 했어요.
이대로는 너무 면목이 없잖아.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루체 씨는 '조금만 더'라고 말했고, B는 '이미 충분히'라고 말했어요. 조금과 충분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었습니다.
B가 나간 자리에 아직 따뜻한 그릇이 있었어요. 루체 씨는 그걸 바라보다가, 결국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음날부터 루체 씨에게 이상한 습관이 생겼습니다.
도서관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곤 했어요. 하지만 누가 메시지를 보낼 리가 없었습니다. 이제 B는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손가락은 잠금화면을 켜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B의 부재를 부정하듯이.
B의 연락처를 구태여 지우진 않았어요. 연락처를 지워봤자 머릿속 전화번호까지 지워지진 않을 테니까.
공부를 하면서 B를 제외한 외부인들과는 전혀 연락을 하지 않던 루체 씨는, 이제 정말로 완전히 혼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서관 책상 위의 참고서와, 도서관 의자와, 도서관 천장의 형광등. 그것이 루체 씨의 세상 전부였어요.
시험이 끝나도 아무도 나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계란말이도 없었습니다.
오래도록 다른 사람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하고 살아온 탓에, 루체 씨는 이제 간단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조차 어려워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넘쳐났어요. 하고 싶은 말도 있었고, 전해야 할 감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입 밖으로 나올 때쯤이면 다 엉켜버렸어요. 주어와 서술어가 따로 놀고, 문장이 중간에 끊기고, 결국 루체 씨 자신도 뭘 말하려고 했는지 모르게 되는 거예요.
편의점에서 "봉투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도 버거운 날이 있었습니다. 그 짧은 문장을 내뱉기 위해 머릿속에서 세 번을 리허설해야 했어요.
나는 이제 사람이랑 대화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루체 씨는 속이 상했어요. 그 속상함 아래에서, 억지로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H의 말. 교실. 서랍 속. 그것은 제대로 치유되지 못하고 루체 씨의 마음속 깊은 곳에 그냥 그렇게 방치되어 있던 기억이었어요.
그때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좀 나았을까.
루체 씨는 통장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일하면서 모아둔 돈은 공부하면서 조금씩 까먹다 보니 이제 200만 원 남짓 남아있었어요.
정신과는 비싸다던데...
루체 씨는 고민에 빠졌어요. 이 돈을 다 써버리면 정말 무일푼이 됩니다. 하지만 이대로 바보처럼 살아갈 수도 없었어요.
부모님은 루체 씨를 재촉하거나 한심하다고 말하지 않으셨어요. 그게 오히려 루체 씨를 더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두 분은 루체 씨에게 최선을 다해주고 계시는데, 루체 씨만 자꾸 실패하고 있었으니까요. 아무것도 돌려드리지 못하는 못난 자식. 루체 씨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밤이 되면 생각이 더 심해졌어요. 천장을 보고 누워있으면 어둠 속에서 이상한 생각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러다가는 정말 안 좋은 선택까지 하게 될 것 같았어요.
응, 이렇게 살아가는 건 의미가 없어.
그 생각이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생각이 루체 씨에게 위안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비상구 표지판처럼, 최악의 순간에 도망칠 곳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루체 씨를 붙잡아 두었어요. 그리고 루체 씨는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인지를 느꼈습니다.
이대로는 진짜 안 되겠다.
루체 씨는 이 돈을 자신을 살리는 데에 쓰기로 마음먹었어요.
아래는 그때 루체 씨가 적은 일기입니다.
어떤 책에서 뇌에 있는 해마체에 대해 읽었다. 해마는 바다에 사는 해마랑 비슷하게 생겼다고 했다. 결국에 뇌라는 기관도 뇌수라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니까, 결국에 그 해마가 그 해마다. 이 해마는 나의 장기 기억을 저장한단다. 그러면 내 해마는 벌써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불행하고 슬픈 기억을 등에 업고 나도 모르는 저 깊은 심해 속에서 계속 아파하고 있었을 것 같다. 가엾게도. 철저하게 방치돼 온 해마의 짐을 이제는 덜어줄 책임이, 나에게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