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문 너머로 로비가 보였어요.
차분한 분위기의 음악이 흘렀습니다. 루체 씨는 클래식을 잘 모르지만, 이런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조금은 진정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이런 음악을 틀어놓고 잠을 청한 적이 있었거든요.
로비에 다른 환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루체 씨는 안도했어요. 괜히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은 싫었으니까요. 덕분에 로비를 천천히 둘러볼 여유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네.
루체 씨가 상상했던 정신과는 무섭고 차갑고 어두운 곳이었거든요. 주사기를 든 간호사가 구속복을 입은 환자를 끌고 가는 모습이 일상인 그런 곳이요. 하지만 실제로 들어선 이 로비는 그냥 조용하고 깨끗한 대기실이었습니다. 음악이 흐르고, 소파가 푹신하고, 조명이 은은한. 치과 대기실보다 훨씬 편안했어요.
접수를 마치자 간호사가 클립보드에 끼운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습니다.
"대기하시면서 이거 먼저 작성해 주세요."
예진 설문지였어요. 이름, 생년월일, 방문 사유 같은 기본 사항 아래에 체크 문항들이 있었습니다. 0에서 3까지의 숫자에 동그라미를 치는 방식이었어요.
'최근 2주 동안 기분이 가라앉거나 우울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최근 2주 동안 일상적인 일에 흥미를 잃었다'
이제는 어느새 익숙해진 질문지를 읽으며 루체 씨는 소파에 앉아서 펜을 들었습니다.
문항은 아홉 개뿐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 걸렸습니다. 숫자 2와 3 사이에서 펜이 왔다 갔다 했어요.
이걸 그대로 내도 되는 걸까.
남들보다 심각한 사람이면 어쩌지.
평범함 우울증이 아니라서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하진 않을까.
하지만 있는 그대로 응답하라고 적혀있었으니까, 루체 씨는 솔직하게 적기로 했어요. 거짓말을 하면 여기 온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어쩐지 이런 분위기의 병원이라면, 그런 강요는 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설문지를 간호사에게 돌려주고, 다시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10분쯤 지났을까요. 간호사가 루체 씨의 이름을 불렀어요.
"이루체 씨, 1번 방으로 들어가세요."
루체 씨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습니다.
1번 방. 루체 씨의 새로운 시작은 1번이었어요. 멋진 숫자라고, 루체 씨는 생각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진료실에는 저걸 정말로 다 읽었을까 싶은 수많은 책들이 책장에 꽂혀있었고, 이름은 잘 모르지만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있는 유명한 그림들의 모작도 걸려있었어요. 편안하도록 연출되었지만 어딘가 엄숙한 분위기에, 마치 점쟁이를 만나러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심리상담의 전문가니까 루체 씨가 말을 하지 않아도 뭐든지 알아차릴 것 같았고, 거짓말을 하면 꿰뚫어 보실 것 같기도 했어요.
"안녕하세요?"
선생님이 먼저 인사를 건네주었습니다. 루체 씨도 가볍게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어요. 팔걸이가 있고 푹신한 의자였습니다. 앉는 순간 몸이 살짝 뒤로 기울어졌어요.
이 의자는 사람을 방심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이렇게 만든 걸 거야. 뭐든지 술술 말하게 하려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어요. 선생님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었습니다. 루체 씨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멋쩍게 웃었어요. 선생님은 루체 씨가 작성한 설문지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하게 질문을 시작했어요.
"설문지를 보니까 말씀대로 우울감이 좀 있으신 것 같아요. 혹시 이런 증상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나세요?"
루체 씨는 당황했어요. '언제부터'라니. 루체 씨에게 우울은 언젠가 시작되었다기보다 그냥 항상 거기 있던 것 같았거든요. 정확히 짚으라고 하면 어렵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날 이후가 아닐까요?
"...고등학교 때부터요. 한 10년쯤 됐을 거예요."
"10년이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적었어요.
"그 10년 동안 치료를 받아본 적은 없으시고요?"
"아, 네."
"가족분 중에 우울증이나 다른 정신건강 관련 질환을 겪으신 분이 계세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수면은 어떠세요? 잠드는 데 어려움이 있거나, 자다가 자주 깨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사실은 잠드는 게 좀 어려워요. 매일 새벽 서너 시쯤 되어서야 겨우..."
"식사는요? 규칙적으로 하시는 편이에요?"
"...아뇨."
질문이 빠르게 이어졌습니다. 수면, 식사, 운동, 음주, 흡연. 루체 씨는 의사 선생님이 TV에서 보던 것처럼 '그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셨겠네요.' 같은 질문이나 공감의 대화를 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건강검진 문진표를 채우는 것에 더 가까웠어요. 생각보다 담백하고 효율적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루체 씨에게는 편했어요. '네', '아뇨', '잘 모르겠어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었으니까요. 긴 문장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됐습니다.
한참 문진을 하던 선생님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루체 씨를 바라보았어요. 이번에는 조금 다른 톤이었습니다.
"루체 씨가 생각하기에는, 우울한 기분이 어디에서 오는 것 같아요?"
이런 질문에는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요. 감기에 걸렸다면 '목이 좀 칼칼하고 머리가 아파요'처럼 간단하게 말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마음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물론 주절주절 이야기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냥 기분이 자꾸 처지고, 스스로가 가치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다고. 그런데 그 말들을 내뱉으려니 어딘가 어색했어요.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는 단어들을 초면인 사람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시험에서 자꾸 떨어져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연인과 이별한 후유증 때문일까요?"
루체 씨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시험에서 떨어지고 연인과 이별했다고 저처럼 우울증을 앓지는 않잖아요. 그냥 제가 유난히 남들보다 마음이 약한 건 아닐까요?"
루체 씨는 그 질문의 답이 '그렇다'일 것을 각오하고 있었어요. '네, 루체 씨는 남들보다 마음이 약한 편이에요.', '그러니까 더 노력해야 해요.' 그런 대답이 올 줄 알았습니다.
선생님은 잠깐 멈추었어요. 그리고 짧게 말했습니다.
"사람마다 우울감을 느끼는 이유나 정도는 전부 다 달라요. 그러니까 스스로가 자주 우울감을 느낀다고 해서 루체 씨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마음이 약하다고 볼 수는 없어요. 그렇게 생각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이 낯설었어요. 그런 류의 위로를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루체 씨의 마음까지 가닿지 못하고 귓가를 스쳐 그냥 지나갔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내가 남들보다 약한 게 아니라면 왜 나는 유별나게 구는 거지.
루체 씨는 정말로 자기가 왜 우울한지, 어떤 부분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건지 몰랐어요. 짚이는 곳은 많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말을 해도 되는지 판단이 되질 않았어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오래도록 입만 달싹거렸습니다.
"오늘 다 말씀하시기 어렵다면 다음에 오셔서 천천히 해주셔도 괜찮아요. 무리하지 마세요."
또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괜찮다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네요.
"일단 설문 결과를 보면 우울 점수가 꽤 높은 편이에요. 자세한 부분까지 지금 당장 알기는 어렵지만, 그 기분이 불편하실 테니 우선 기분을 좀 안정시킬 수 있는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약을 먹어야 하나요?"
약이라는 단어에 몸이 살짝 굳었는데, 선생님은 자주 있었던 일인 것처럼 담담하게 설명했어요.
"약이라고 하면 다들 비슷한 걱정을 하시는데요, 내성이 생기거나 의존이 생기는 종류는 아니에요. 물론 그런 강력한 약을 처방해야 하는 분도 계시지만, 지금 루체 씨에게 드리는 건 최소 용량의 안정제예요. 우선은 수면을 잘하셔야 하고, 이 약이 루체 씨와 잘 맞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혹시 복용하시다가 조금이라도 몸이나 기분이 이상하다고 느껴지시면 바로 연락 주세요."
약에 대해 이야기하는 톤이, 내과에서 감기약을 처방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게 루체 씨에게는 오히려 안심이 됐어요. 대단하고 무서운 약이 아니라 그냥 약이구나, 하는 느낌.
"그리고 이거." 선생님은 두꺼운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어요. "좀 더 정밀한 검사를 해봐야 해서, 이 검사지를 집에서 작성해 와 주세요. 문항이 좀 많은데,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떠오르는 대로 체크하시면 됩니다."
봉투가 묵직했습니다. 아까 대기실에서 쓴 설문지와는 차원이 다른 두께였어요.
"다음 예약이 빠르면 이틀 뒤에 가능하신데, 그때로 잡아드릴까요?"
루체 씨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진료실을 나왔습니다.
간호사에게서 약봉투를 받았어요. 정신건강의학과는 약국에 가지 않고 병원에서 직접 약을 주는 모양이었습니다. 봉투 겉면에 복용법이 적혀있었어요. '1일 1회, 저녁 식후 복용.'
"7만 2천 원입니다."
비싼데.
루체 씨는 약간 놀라면서 카드를 내밀었어요. 통장에 남은 돈이 200만 원. 한 번 오는 데 7만 원이면, 2주에 한 번 온다고 치면 한 달에 14만 원. 일 년이면 168만 원이에요.
...200만 원으로는 1년도 못 오겠네.
최소 용량이라던 약값이 얼마인 건지, 다음에도 이만큼 나올 건지, 용량이 커지면 약값이 얼마나 비싸지는지 같은 걸 물어봤어야 했는데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너무 돈돈 거리는 사람처럼 보이는 게 부끄러웠거든요. 루체 씨는 영수증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병원을 나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루체 씨는 양손에 든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오른손에는 약봉투, 왼손에는 두꺼운 검사지 봉투가 있습니다.
이 돈을 나를 살리는 데에 쓰기로 했잖아.
건물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눈부셨어요. 아직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우울의 원인도 모르고, 치료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이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어쩐지 조금은 앞으로 나아간 기분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이전까지의 루체 씨를 모릅니다. 병원은 언제든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돼요. 그러면 앞으로 루체 씨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선생님은 모를 거예요. 그렇다면 그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털어놔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완전히 낯선 사람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위로라는 것도 있는 걸까.
루체 씨는 조금의 나른함을 느끼며 역으로 걸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