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지 않는 밤

by 이루체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루체 씨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검사지 봉투를 내려다보았어요.


약봉투는 가방 안에 넣어두었고, 검사지 봉투만 무릎에 올려두고 있었어요. 가방에 넣기에는 두꺼웠거든요. 하지만 봉투에는 병원 이름이 적혀있었기 때문에 루체 씨는 뒷면이 보이도록 뒤집어 두었습니다. 누가 보고, 뭔가 생각을 할 것 같아서요.


그런 생각들이 무색하게도, 지하철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사람들이 타고 내렸지만 아무도 루체 씨의 무릎 위에 놓인 봉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고, 건너편에 앉은 사람은 졸고 있었어요. 방금 전까지 느꼈던 오묘한 위로는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곳은 너무 평범했습니다.


괜찮다고 그랬지.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남았습니다. 괜찮다는 말을 들은 게 오래되기는 했나 봐요.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루체 씨는 멍하니 바라보았어요. 터널 안이라 창밖은 까맸고, 까만 탓에 유리에 비치는, 봉투를 안고 있는 피곤해 보이는 사람의 얼굴이 더욱더 선명히 보였습니다.


별로 괜찮아 보이진 않는데.


아직 세 정거장이 남아있었어요.




집에 도착한 루체 씨는 현관문을 열기 전에 잠깐 멈추었습니다. 가방 안에 약봉투가 들어있다는 것이 갑자기 의식되었거든요.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여는 문이었는데, 오늘은 손잡이가 묘하게 무거웠어요.


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았습니다. 약봉투를 어디에 둘지 잠깐 고민했어요. 책상 서랍은 어머니가 가끔 정리하시고, 옷장도 빨래를 넣으시면서 여시니까요. 결국 가방 깊은 곳, 참고서들 사이에 다시 끼워 넣었습니다. 루체 씨의 가방을 열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밥 먹어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루체 씨는 검사지 봉투를 일단 책상 서랍에 넣고 방문을 열었습니다. 식탁에는 된장찌개와 반찬 몇 가지가 놓여있었어요. 아버지는 이미 드시고 계셨습니다. 루체 씨는 자리에 앉아서 밥을 떴어요.


"오늘도 종일 도서관에 있다 왔어?"
"...네."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사실 거짓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지만, 병원에 다녀왔다고 말하면 분명히 또 식탁의 분위기가 무거워질 거예요. 늘 이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서 죄책감과 중압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걸 더 늘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걸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는 걸까요.


"이것도 좀 같이 먹어."


어머니가 루체 씨의 밥그릇에 반찬을 하나 올려주었어요. 루체 씨는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었습니다. 된장찌개가 따뜻했어요. 목구멍으로 넘기는데 왜인지 코끝이 시큰했습니다.


이 밥값도, 저 찌개도, 전부 부모님 돈인데.


7만 2천 원. 그 돈이면 이 밥상을 몇 번 더 차릴 수 있을까요. 루체 씨는 밥을 빨리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어요. 문을 닫는 순간, 식탁에서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습니다. 꺼이꺼이 울지 않기 위해 루체 씨는 긴 숨을 한 번 깊이 내쉬었어요.




책상에 앉아 봉투를 열어보았습니다. 대충 훑어만 봤는데도 문항이 정말 많았어요. 아까 병원 대기실에서 쓴 아홉 문항짜리 설문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양이었어요. 용지에 빼곡하게 인쇄된 문항들이 여러 장. 루체 씨는 그 두께를 보고 잠시 멍해졌습니다.


이걸 다 써야 하는 거야?


첫 장 상단에 안내가 적혀있었어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현재 기분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응답하세요.'


루체 씨는 자기감정을 설명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슬프냐고 물으면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화나냐고 물으면 화난 것 같기도 하고, 괜찮냐고 물으면 괜찮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어떤 감정이든 뒤에 '것 같기도 하다'가 붙었어요. 자기 자신의 감정인데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현재 기분이 어떤지 모르는 경우는 어떡하지?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생각이니까, 루체 씨는 일단 펜을 들고 하나씩 문항에 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2주 동안, 일상생활에서 흥미나 즐거움을 느끼기 어려웠다.'


루체 씨는 '매우 그렇다'에 동그라미를 쳤어요.


'최근 2주 동안, 기분이 가라앉거나 우울하거나 희망이 없다고 느꼈다.'


이것도 '매우 그렇다'였습니다. 반복되는 '최근 2주 동안'이라는 조건이 루체 씨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2주일이 기준이라면, 루체 씨는 이미 너무 늦은 건 아닐까요.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났다.'


루체 씨는 잠깐 멈추었어요. 짜증이나 화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에 동그라미를 치려고 하다가 다시 문항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습니다. 기쁨, 화, 즐거움, 흥미. 그게 어떤 감정이었죠?


감정을 안 느끼는 것도 증상일까?


루체 씨는 '보통이다'에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가끔씩 스스로에게 답답해서 짜증이 나기도 했던 것 같아서요.

한 장을 넘기자 또 한 장이 나왔어요.


수면에 대해서, 식욕에 대해서, 집중력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 하나하나 답을 하다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답을 고르려면 자기감정을 들여다봐야 했어요. 루체 씨에게 그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피로감을 느끼거나 기운이 없었다.'
'식욕이 줄었거나, 반대로 과식을 했다.'


세 장째를 넘길 때 루체 씨는 펜을 내려놓았어요. 손이 뻣뻣했습니다. 힘을 너무 주고 있었나 봐요. 방 안은 조용했고, 거실에서는 TV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습니다. 부모님이 뉴스를 보고 계신 모양이에요.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느끼거나, 자신 때문에 가족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자신 때문에 가족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루체 씨에게 그건 '그런 적이 있다'가 아니라 거의 매일이었습니다. 시험 준비를 2년 반이나 하면서 돈만 쓰고, 결과는 내지 못하고, 부모님께 짐만 되고 있다는 생각. 그건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루체 씨는 믿고 있었어요.


TV 정도는 더 큰 소리로 보셔도 될 텐데, 괜히 내가 집에 들어와 있어서...


방금 식탁에서 어머니가 올려준 반찬이 떠올랐습니다. '매우 그렇다'에 동그라미를 치는 손이 바르르 떨렸습니다.




루체 씨는 마지막 문항에 동그라미를 치고 펜을 내려놓았습니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어요. 손가락이 뻣뻣했습니다. 목도 뻣뻣했어요. 고개를 숙인 채 너무 오래 앉아있었나 봅니다. 목을 돌리자 뚝 소리가 났어요. 작성한 검사지를 봉투에 다시 넣었습니다. 봉투가 처음보다 좀 더 무거워진 것처럼 느껴졌는데, 잉크 무게가 더해져서 그런 거겠죠.


시계를 보니 열한 시가 넘어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앉은 게 일곱 시 반쯤이었으니까, 세 시간이 넘게 검사지 앞에 앉아있었던 거예요. 책상 스탠드 불빛만 켜져 있었고, 창밖은 까만 밤이었습니다. 거실의 TV 소리는 언제 꺼졌는지 모르게 사라져 있었어요. 부모님은 이미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


검사지 봉투를 넣으려고 가방을 열었더니 약봉투가 보였어요. 저녁을 먹고 바로 먹었어야 했을 텐데, 놓치고 말았습니다. 컵에 물을 떠다 놓고, 루체 씨는 잠시 고민에 빠졌어요.


'내성이 생기거나 중독되는 종류는 아니에요.'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어쩐지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왠지 이 약을 먹기 전과 먹은 뒤의 루체 씨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았어요. 지금의 자신이 건강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약에 의존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겁이 났습니다. 마약처럼 평생 끊을 수 없게 되면? 약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면?


루체 씨는 약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어보았습니다. 안에는 작은 알갱이가 들어있었어요. 정말 조그마한 약이었습니다. 이 작은 알갱이 하나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루체 씨의 우울은 10년이 넘었는데, 이 조그만 게 무슨 수로 그걸 어떻게 한다는 걸까요.


어차피 이 이상 나빠질 것도 없잖아.


루체 씨는 알갱이를 입에 넣고 물을 마셨어요. 애써서 삼키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꿀떡하고 넘어갔습니다. 그게 전부였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지도 않았고, 몸이 달라지지도 않았어요. 루체 씨는 왜인지 모르게 허무했습니다.




약을 먹은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요? 침대에 누워 평소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의 루체 씨라면 이러고 있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껴왔습니다. 안 잘 거면 공부를 더 하든가, 안 할 거면 잠을 자든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하는데 뇌에게 휴식을 주지도, 공부를 하지도 않는 최악의 상태를 계속 만들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어요. 그러면서도 핸드폰을 내려두고 눈을 감았을 때 느껴지는 고독감과 불안감에, 핸드폰을 내려두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왠지 핸드폰을 내려두고 눈을 감아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쩐지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고, 어쩐지 잠에 잘 들 것 같았어요. 상담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일지, 약이 뭔가를 도와준 건진 모르겠지만, 분명히 뭔가 달라졌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빨리 다시 병원에 가고 싶다.


병원에 가고 싶다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을 하면서 루체 씨는 눈을 감았습니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어요. 오래간만에, 아무 꿈도 꾸지 않는 밤이었습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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