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뱅이

by 이루체

다음 날, 루체 씨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을 떴어요. 거실에서는 부모님이 준비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곧 현관문이 닫히고 집이 조용해졌어요. 루체 씨는 천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일어났습니다.


오랜만에 일찍 눈을 뜬 김에 공부를 좀 해볼까 하고 참고서를 폈어요.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은 페이지가 펼쳐졌습니다. 언제 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밑줄이었어요. 하지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문장을 세 번 읽었는데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신에 어젯밤 검사지의 문항들이 참고서 위에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자신 때문에 가족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루체 씨는 참고서를 덮었습니다. 생각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들었거든요.


괜히 평소에 일어나지도 않는 시간에 일어나서 그래. 잠깐만 눈을 붙이자. 30분만.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아직 밝았어요.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30분만 자려고 했는데 네 시간이 넘게 잔 거예요.


책상 위에 덮어놓은 참고서, 마시다 만 물컵. 전부 아침에 루체 씨가 놓아둔 그대로였어요. 루체 씨만 침대로 옮겨간 것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창밖에서는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어요. 세상은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루체 씨가 있는 곳은 멈춰있습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요. 아침도 먹지 않았으니 당연한 거였습니다. 부엌에 가면 먹을 것이 있을 텐데, 루체 씨는 책상 위에 있던 마시다 만 물컵을 들었어요.


밥을 먹을 자격이 있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물을 한 모금 마셨습니다. 미지근한 물이 빈속으로 내려갔어요. 한 모금 더 마시니까 배에서 나던 소리가 잠잠해졌습니다. 루체 씨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벌주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밥을 굶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벌이었거든요. 다른 벌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밥을 굶는 건 그저 아무것도 안 하면 되니까요. 집에 식량을 축내지 않아도 되었고요.


씻고 나가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세면대 앞에 설 수 없었어요. 오늘도 양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거울 앞에 서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았어요. 세수, 양치, 로션. 그 하나하나가 전부 귀찮았습니다.


게으른 거야. 나는 그냥 게으른 사람인 거야.


루체 씨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의지가 약하고, 나태하고, 자기 관리를 못 하는 사람. 그게 루체 씨가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다시 참고서를 펼쳤어요. 하지만 세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머릿속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글자가 눈 위를 미끄러져 나갔어요. 루체 씨는 참고서를 덮고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들었습니다.


SNS는 이미 오래전에 지웠어요. 핸드폰에 남아있는 건 뉴스 앱과 커뮤니티뿐이었습니다. 읽고 싶은 글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손가락이 움직였어요.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리고. 뭘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재미있지도 않았어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생각이 밀려오니까요.


창밖의 빛이 주황색으로 바뀌고, 어느새 어두워졌어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부모님이 돌아오신 거겠죠.


"루체야, 저녁 먹자."


루체 씨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자는 척을 했습니다. 잠시 뒤에 어머니가 방문을 살짝 열었다가 닫으셨어요. 발소리가 멀어졌습니다.


저녁 8시쯤, 가방을 열어 약봉투를 꺼냈어요. '식후에 드세요'라고 적혀있는 글씨를 무시하고 알약을 꺼내 들었습니다. 어제 먹은 것과 같은 작은 알갱이를 물 한 컵으로 삼켰습니다. 부디 이 알약이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며.




이틀 뒤, 루체 씨는 두 번째로 병원에 갔습니다.


이번에는 전처럼 무섭지는 않았어요. 지하철을 타고 병원 건물에 들어서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련의 과정이 처음과는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아직 익숙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낯설지는 않았어요.


'처음 가는 게 제일 어렵고, 두 번째부터는 좀 나아져요.'


인터넷에서 읽었던 그 문장이 맞았습니다.


접수를 하고 간호사에게 집에서 작성해 온 검사지를 건넸어요. 간호사는 두꺼운 검사지를 받아 들고 평범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채점하는 데 좀 걸리니까 좀 기다려주세요."


루체 씨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어요. 지난번에 왔을 때와 같은 클래식이 흘렀습니다. 아니, 같은 곡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분위기의 음악이었어요. 루체 씨는 오래도록 고민하면서 작성한 검사지가 단 몇 분 만에 검토가 끝나버리면, 그것도 왠지 마음이 아플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채점이 오래 걸린다는 말에 오히려 안도했어요.


"이루체 씨, 1번 방으로 들어가세요."


두 번째 1번 방이었어요. 문을 여는 손에 힘이 좀 덜 들어갔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니까요."


선생님은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말했어요. 루체 씨는 의자의 팔걸이를 살짝 움켜쥐었습니다. 성적표를 받는 기분이었어요. 이번에는 합격일까요, 불합격일까요.


"루체 씨가 인식하고 있는 우울감의 정도보다, 실제로 우울한 정도가 더 큰 것 같아요."


루체 씨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내가 느끼는 우울이 있고, 내가 느끼지 못하는 우울이 있다고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선생님이 덧붙였습니다.


"그러니까, 검사지에 체크해 주신 증상들을 보면 꽤 높은 강도의 우울감을 느끼고 계실 텐데, 루체 씨 본인은 그걸 그만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뜻이에요."


루체 씨는 멍하니 선생님을 바라보았어요.


분명히 무기력하고, 잘 씻고 싶지 않고, 뭔가 먹고 싶지도 않아서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으면서. 루체 씨는 그 모든 것을 '게으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라서 안 씻는 거야. 의지가 약해서 공부를 안 했으니까 밥을 먹어선 안 되는 거야. 나태한 성격이라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고, 미워한 만큼 더 움직이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한 만큼 더 자신을 미워하는 순환 속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우울증의 증상이었다니요. 루체 씨의 눈에 갑자기 물기가 맺혔어요. 울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나왔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는데, 눈물이라는 건 허락을 구하고 나오는 게 아니었어요.


자기 자신에게 미안해서 그랬습니다. 아파서 못 일어나는 사람을 게으르다고 다그쳤으니까요.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은 루체 씨가 울어도 아무 말하지 않았어요. 티슈 박스를 조금 가까이 밀어주었을 뿐이었습니다. 루체 씨는 티슈를 한 장 뽑아서 눈가를 닦았어요. 소리를 내서 울지는 않았습니다. 루체 씨는 원래 조용히 우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약은 잘 드시고 계시죠?"

"...네."

"몸에 이상은 없었고요?"

"네, 별로..."

"그럼 같은 약으로 용량 조금 높여서 계속 처방해 드릴게요. 다음에 오실 때 좀 더 이야기해 봐요."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 다음 예약을 잡아주었어요. 이번에는 2주 뒤였습니다. 루체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진료실을 나왔어요.


수납 창구에서 이번에는 비용이 좀 적게 나왔습니다. 첫 방문 때보다는 나았어요. 루체 씨는 영수증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면 좀 더 다닐 수 있겠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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