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갱이의 마법

by 이루체

약을 먹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어요.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루체 씨는 여전히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건 힘들었어요. 참고서를 펴면 글자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세하게 달라진 것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예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의 밤에 자기 자신을 심하게 비난했었는데, 요즘은 그 비난의 강도가 살짝 줄었습니다. '오늘도 아무것도 못 했다'는 생각은 여전히 들었지만, 거기에 '그러니까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문장이 한 줄 짧아진 거예요.


또 하나 달라진 것이 있었어요. 어느 아침, 루체 씨는 세면대 앞에 섰습니다. 이를 닦고 얼굴을 씻었어요. 그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거울 앞에 서는 것조차 버거웠어요. 세수, 양치, 로션. 그 하나하나가 산처럼 느껴졌거든요.


오늘은 산이 아니라 그냥 세수였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을 때, 물기가 차갑게 느껴졌어요. 그 차가움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루체 씨는 가방에서 약봉투를 꺼내 알갱이를 삼켰어요. 도서관에 가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들쭉날쭉했지만, 약 먹는 시간만큼은 정확했어요. 시계를 안 봐도 저녁 8시쯤이 되면 몸이 알아서 약봉투를 찾았습니다.


어느 날은 저녁을 굶은 채로 약을 먹었어요. 빈속에 알갱이가 내려가니까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습니다. '식후에 드세요'라는 약봉투의 글씨가 눈에 밟혔어요. 루체 씨는 부엌에 가서 식빵 한 장을 꺼내 꼭꼭 씹어 먹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밥상 위에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와 시금치나물이 올라와 있었고,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루체 씨네 식구들은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뉴스를 보시고, 루체 씨는 밥만 떴습니다.


"루체야."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셨어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올 거라는 걸 루체 씨는 느꼈습니다.


"이제 다른 걸 알아보는 건 어떠니?"


다른 것. 루체 씨는 숟가락을 든 채로 멈추었어요.


아버지는 TV를 보고 계셨지만 볼륨을 줄이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동의 표시라는 걸 루체 씨는 알았어요. 어머니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엄마 아빠는 계속 응원해 줄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용돈도 조금 줄 수 있어. 하지만 걱정되는 건... 이렇게 몇 년이나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다가..."


어머니는 말끝을 흐리셨어요. 폐인이 될까 봐. 루체 씨는 그 삼켜진 단어를 들었습니다. 부모님도 나름대로 말을 고르느라 오래 고민하셨겠구나, 하고 루체 씨는 생각했습니다. 식탁 위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어요. 침묵을 견딜 수 없어서, 루체 씨는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습니다. 천천히 씹었어요.


"...며칠만 생각해 볼 시간을 주세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TV 볼륨은 여전히 낮은 채였습니다.


그날 저녁, 약을 먹을 때 물이 평소보다 시원하게 느껴졌어요. 같은 정수기에서 받은 같은 물인데. 루체 씨는 컵을 내려놓고 잠깐 멈추었다가 한 모금 더 마셨습니다.




며칠 동안 루체 씨는 도서관에 가지 않았어요.


이상하게도 그게 편안했습니다. 매일 아침 도서관에 가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니까,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조금 덜 무거웠어요.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여전했지만, 그 죄책감의 종류가 달랐습니다.


사실 루체 씨도 더 이상 공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봐 준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먼저 포기하고 싶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포기한다는 말을 먼저 꺼내면, 그동안 부모님이 믿고 기다려준 시간들이 전부 부정되는 것 같았으니까요.


도서관에 가지 않는 날들은 비슷비슷했어요. 늦게 일어나서, 거실 소파에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다가, 핸드폰을 보다가, 다시 방에 들어가서 누웠어요. 하지만 예전처럼 그 하루가 루체 씨를 짓누르지는 않았습니다. 짓누르는 것과 그냥 지나가는 것은 다르니까요.


한 번은 부엌 창문 너머로 비가 오는 걸 한참 바라보았어요. 빗방울이 유리에 부딪혀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물 한 잔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서 있기만 한 시간이 한 20분쯤 됐을 거예요. 예전 같으면 그 20분이 죄책감으로 남았을 텐데, 그날은 그냥 20분이었습니다.


밤에 침대에 누우면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어요.


다른 걸 알아보는 건 어떠니.


'다른 것'이 뭔지 루체 씨는 몰랐습니다. 시험을 빼면 남는 게 뭐가 있을까요.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건 1년도 안 되는 경력 하나뿐이었고, 자격증도 없었고, 특기도 없었어요. 시험을 놓으면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며칠째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시험에 붙으면 나는 행복해지는 걸까? 애초부터 스스로 원해서 했던 공부는 아니었잖아.


약을 먹기 전에는 그런 질문을 할 여유가 없었어요. 합격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 더 이상 갈려나가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 위에서 2년 반을 걸었는데, 루체 씨는 이 길의 끝에 뭐가 있는지 한 번도 제대로 상상해 본 적이 없었어요. 합격한 뒤에 어떤 부서에서 일하고 싶은지, 공무원이 되면 어떤 하루를 보내고 싶은지.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합격이라는 단어 자체가 목적이었어요. 합격 뒤의 삶은 공백이었습니다.


목적지 없이 2년 반을 걸었구나.


차라리 누가 '어차피 너는 안 될 거야'라고 확신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면 이 헛된 희망을 내려놓고 차라리 마음 편하게 다른 일을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루체 씨 자신 뿐이었어요.


루체 씨는 책상 서랍을 열어 참고서들을 바라보았습니다.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페이지들. 포스트잇이 빼곡하게 붙은 문제집들. 2년 반이라는 시간이 종이와 잉크의 형태로 쌓여있었어요.


이걸 버리면 2년 반이 진짜로 없어지는 걸까.


루체 씨는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문제집 세 권을 서랍 안쪽으로 밀어 넣고 서랍을 닫았습니다.




"시험 준비 그만하려고요."


저녁을 먹고 난 뒤였습니다. 이번에는 루체 씨가 먼저 입을 열었어요.


그 한 문장을 꺼내기까지 밥 한 공기를 다 비웠습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제야 입을 열었어요. 며칠 동안 입 안에서 굴렸던 말이었는데, 막상 소리로 내보내니까 생각보다 가벼웠습니다. 아니, 가볍다기보다는 허무했어요. 2년 반을 접는 데 한 문장이면 됐으니까.


어머니는 젓가락을 든 채로 멈추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아버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루체 씨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래."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그 한마디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다시 TV를 보고 계셨어요. 표정이 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볼륨은 여전히 낮은 채였고, 숟가락은 내려놓은 채였어요.


부모님도 기다리고 계셨구나. 내가 먼저 말해주기를.


그날 밤, 약을 먹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루체 씨는 가방에서 약봉투를 꺼내 알갱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어요. 새끼손톱보다 작은 하얀 알갱이. 이 작은 게 루체 씨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건 아니었어요. 다만 떨어지던 걸 멈추게 해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루체 씨는 알갱이를 입에 넣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어요.


2년 반이 끝났습니다. 합격도 불합격도 아닌, 그냥 끝이었어요. 천장에 얼룩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있었는데 오늘 처음 본 것 같았어요. 매일 이 천장을 보면서 잤는데, 이상하게 이 얼룩은 한 번도 눈에 들어온 적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뭘 하면 좋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없었어요. 루체 씨는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좀 일찍 일어나 볼까.

화, 금 연재
이전 09화게으름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