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그만둔 다음 날 아침, 루체 씨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찍'이라기보다 '알람 없이'라고 해야 맞을 거예요.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 막바지에는 알람을 맞춰놓아도 끌뿐이었거든요. 알람을 끄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 시간쯤 뒤에 죄책감에 겨우 일어나는 것이 루체 씨의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알람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눈이 떠졌어요.
해야 할 일이 없는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섭지 않았어요. 2년 반 동안은 '해야 할 일'이 항상 있었고, 그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루체 씨를 매일 아침 짓눌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해야 할 일'이 사라졌습니다. 참고서도, 도서관도, 합격선도 없는 아침은 오랜만인 것 같았어요.
텅 빈 아침이었지만, 짓눌리는 아침보다는 나았어요. 루체 씨는 세면대 앞에 서서 양치를 하고 얼굴을 씻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았어요. 볼이 꺼져있고 눈 밑에 그림자가 있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 얼굴이 예전만큼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병원에 처음 갈 때 거울을 보면서 느꼈던 '이게 나인가' 하는 당혹감은 조금 줄어들어 있었어요.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낮에는 핸드폰을 보거나 누워있거나 했습니다. 가끔 산책을 나가기도 했어요. 산책이라고 하기엔 그냥 편의점이나 근처 마트에 걸어갔다 오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밖에 나갔다는 사실 자체가 꽤 환기가 되었습니다.
어느 오후에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한참 들었어요. 웅, 하는 낮은 진동이 벽을 타고 왔습니다. 오후 햇살이 바닥을 천천히 가로질렀어요. 그 빛이 소파 끝에 닿을 때쯤이면 하루가 거의 끝나 있었습니다.
저녁에 아버지가 퇴근하시면 식탁에 셋이 앉아 밥을 먹었어요. 아버지는 뉴스를 보시고, 어머니는 반찬을 건네시고, 루체 씨는 밥을 떴습니다. 시험 얘기는 아무도 꺼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날이 일주일쯤 이어지자, 루체 씨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마트까지 걸어갔다 오는 것만으로 다리가 무거웠고, 앉았다 일어날 때면 눈앞이 잠깐 깜깜해졌습니다.
2년 반 동안 도서관 의자에 앉아서 공부만 했으니까요. 몸을 움직인 거라곤 도서관과 집을 왕복한 것, 그리고 가끔 화장실에 간 것뿐이었습니다.
이대로는 뭘 하든 못 하겠다.
일을 하든, 공부를 다시 하든, 뭔가를 시작하려면 일단 몸이 따라줘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집 앞 야트막한 언덕만 올라가도 숨이 찼어요.
"구청에서 요가 수업을 한다더라."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잠깐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데 불쑥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뭔가를 강하게 권유하시는 분이 아니었어요.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지시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루체 씨는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 때는, 이미 알아보신 뒤라는 걸.
"한 달에 4만 5천 원이래. 일주일에 세 번이고."
가격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면 확실히 이미 알아보신 거였어요. 루체 씨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한 달에 4만 5천 원. 병원비에 비하면 훨씬 저렴했어요.
"네, 해볼게요."
루체 씨가 대답하자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래" 하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설거지를 하시는 어머니의 등이 어쩐지 조금 가벼워 보였습니다.
첫 수업은 월요일 오전이었어요.
루체 씨는 구청 건물 앞에 서서 입구를 바라보았습니다. 건물 안으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어요. 아이를 데리고 문화센터에 가는 엄마들, 민원을 보러 온 사람들, 경비 아저씨. 루체 씨는 그 사이에 서서 잠시 망설였습니다. 오랜만이잖아요. 목적을 가지고 어딘가에 가는 것이.
병원에 가는 것도 목적이 있는 외출이긴 했지만, 그건 아프기 때문에 가는 거였어요. 요가 수업은 달랐습니다. 아프기 때문이 아니라, 나아지기 위해서 가는 거였으니까요.
강의실은 3층에 있었어요. 루체 씨는 엘리베이터를 탈까 계단을 걸어 올라갈까 잠깐 고민했습니다. 운동을 하러 가면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좀 웃기잖아요. 하지만 계단을 올라가다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 모습을 누군가 보면 창피할 것 같았어요.
결국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운동은 강의실 안에서 하면 되니까.
강의실 문을 열자 요가 매트가 바닥에 깔려있었어요. 십여 명 정도의 수강생들이 이미 와있었습니다. 루체 씨보다 한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가끔 젊은 사람도 있었지만, 루체 씨처럼 창백하고 마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눈에 띄겠구나.
루체 씨는 가장 뒤쪽 구석 자리에 매트를 깔고 앉았어요.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교실에서 항상 뒷자리에 앉았어요. 앞자리에 앉으면 뒤에서 누가 자기를 보고 있을 것 같았거든요.
요가 선생님이 들어왔어요. 선생님은 작고 단정한 분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조용했어요. 루체 씨는 그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큰 소리를 내는 사람 앞에서는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거든요.
"오늘 처음 오신 분이 있으시죠? 괜찮아요, 천천히 따라오시면 됩니다. 못하는 동작이 있으면 쉬셔도 되고요."
선생님이 루체 씨 쪽을 보면서 말했어요. 루체 씨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습니다.
수업이 시작되었어요.
선생님은 먼저 눈을 감고 호흡을 하자고 했습니다.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뱉는 것. 루체 씨는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게 뭐가 대단한 건지는 잘 모르겠었지만, 몇 번 반복하니까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 풀렸습니다.
"자, 이제 고양이 자세를 해볼까요? 무릎을 꿇고 양손을 바닥에 대세요."
루체 씨는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 했어요.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바닥에 대었습니다. 등을 둥글게 말아 올렸을 때, 척추에서 뚝뚝 소리가 났어요. 오랫동안 구부정하게 지내온 등이 항의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쉬면서 등을 내렸어요. 등 근육이 늘어나면서 뻐근한 시원함이 느껴졌습니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어요. 옆 사람이 루체 씨를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몸이 말을 하고 있었거든요. 여태 나를 이렇게 방치해 놓고 뭐 했냐고.
그동안 정말 미안한 짓을 해왔구나, 내 몸에게.
"잘하고 계세요. 무리하지 마시고 편한 만큼만 하세요."
선생님이 루체 씨 옆을 지나가면서 말했어요. 루체 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편한 만큼만.
그 말이 루체 씨에게는 생소했어요. 지금까지 루체 씨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항상 '최선을 다해야' 했으니까요. 시험은 합격선을 넘어야 했고, 회사에서는 야근을 해야 했고, 연인에게는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편한 만큼만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본 적이 없었어요.
수업이 끝났을 때 루체 씨의 몸은 뻐근했습니다. 여기저기 쑤시고 당겼어요.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어요. 뻐근함은 뭔가를 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까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런 종류의 피로였습니다.
구청 건물을 나서니 바람이 불었어요. 들어올 때는 못 느꼈던 바람이었습니다. 뻐근한 몸으로 바람 속에 잠깐 서 있었어요.
요가 수업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이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루체 씨의 일주일에 리듬이 생겼어요. 약을 먹는 것이 하루의 리듬이었다면, 요가 수업은 일주일의 리듬이었습니다.
월요일에는 조금 뻣뻣한 몸을 풀었고, 수요일에는 월요일보다 조금 더 유연해진 것을 느꼈고, 금요일에는 일주일 중 가장 몸이 잘 움직였어요. 그리고 주말이 지나면 다시 조금 굳어지고, 월요일에 다시 풀고. 그 반복이 루체 씨는 싫지 않았습니다. 2주쯤 지나자 아침에 일어나는 게 조금 수월해졌어요. 예전처럼 납덩이가 올려진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루체 씨는 요가 수업이 없는 날에도 아침에 매트를 깔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이 알려준 동작 중에 기억나는 것 몇 가지를 따라 했습니다. 고양이 자세, 산 자세, 그리고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양팔을 위로 쭉 뻗는 동작. 5분이면 끝나는 짧은 루틴이었지만, 그 5분이 루체 씨의 아침을 바꿔놓았어요.
어느 수요일,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책상 위에 새 수건이 한 장 놓여있었어요. 반듯하게 접혀서, 책상 모서리에 가지런히 맞춰져 있었습니다.
나갈 때는 없었는데.
루체 씨는 수건을 집어 들었어요. 네 번 접힌 반듯한 접기. 아버지가 빨래를 갤 때 수건을 접는 방식이었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까요.
루체 씨는 요가 수업에 가기 위해 마을버스를 탔어요. 구청은 집에서 걸으면 15분쯤 되는 거리였지만, 걸어가기에는 아직 체력이 부족했어요. 마을버스를 타면 좁은 골목길을 돌아서 세 정거장이면 도착했습니다.
오전 시간이라 버스 안은 한산했어요. 앉을 수 있었습니다. 루체 씨는 창밖을 보았어요. 작은 버스가 골목을 돌 때마다 동네 풍경이 지나갔습니다. 세탁소, 문구점, 김밥집, 부동산. 매일 보는 것들인데 버스 안에서 보니까 왠지 달라 보였어요.
병원에 처음 갈 때는 지하철을 탔었어요. 그때는 문 옆에 서서 앉지도 못했어요. 앉으면 일어나기 싫어질 것 같았으니까요. 마을버스는 지하철과 달랐습니다. 작고, 느리고, 골목을 끼고 돌았어요. 그 느린 속도가 오히려 편안했습니다.
루체 씨는 버스 안의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장을 보러 가는 사람, 병원에 가는 어르신, 학원에 가는 아이. 동네 사람들이었습니다. 루체 씨도 지금 이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어요. 구청 3층의 요가 강의실.
나도 이 사람들과 함께야.
그 사실이 마냥 좋았습니다. 도서관과 집만 오가던 시절의 루체 씨는 세상의 바깥에 있었어요. 세상은 흘러가고 있었고, 루체 씨만 멈춰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루체 씨도 이 동네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어요. 마을버스가 골목을 도는, 그 느린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