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의 짐

by 이루체

해마 일기를 쓴 다음 날, 루체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병원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바로 전화를 해서 예약을 잡으면 될 텐데, 루체 씨의 손은 핸드폰 위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먹는 것과 행동을 하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어요.


무서웠거든요.


병원에 전화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소리 내어 인정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머릿속으로 '나는 우울한 거구나'하고 생각하는 것과, 낯선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에요. 하나는 혼잣말이고, 다른 하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니까요. 루체 씨는 혼잣말에는 익숙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후기'


루체 씨는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처음 병원에 갔을까. 루체 씨는 그게 궁금했어요. 검색 결과에는 여러 글들이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막상 가보니 괜찮았다는 글, 선생님이 친절했다는 글, 약이 생각보다 도움이 됐다는 글. 반대로 병원에 가봤지만 별로였다는 글도 있었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포기했다는 글도 있었어요.


루체 씨의 눈에 유독 오래 머문 것은, 이런 문장이었습니다.


'처음 가는 게 제일 어렵고, 두 번째부터는 좀 나아져요.'


맞아요. 고등학교 입학 첫날 교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것도, 도서관에 처음 공부하러 갔을 때도,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도 '처음'은 늘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어떻게든 발을 내디뎠어요. 하지만 지금은 왜 이렇게까지 어려운 걸까요.


정신과에 다닌다는 것. 그 문장에는 루체 씨의 부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무언가 따라붙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기록이 남는다, 취업에 불이익이 있다, 정신이 약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중에 사실인 것은 얼마나 되고 거짓인 것은 얼마나 되는지, 루체 씨는 알지 못했어요. 다만 그런 말들이 루체 씨의 발목에 추처럼 무겁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어차피 취업도 못 하고 있는데 무슨 불이익이 더 있다고.


루체 씨는 이불속에서 피식 웃었어요. 웃긴 상황은 아니었는데, 웃음이 나왔습니다. 잃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 어떤 종류의 용기를 준다는 걸 루체 씨는 그때 알았어요. 어쩌면 조금 비참한 용기이긴 했지만, 어쨌든 용기는 용기였습니다.




다음 날 루체 씨는 검색을 좀 더 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보았어요. 너무 가까우면 아는 사람을 마주칠 것 같고, 너무 멀면 가기 귀찮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지하철로 예닐곱 정거장쯤 되는 거리에 있는 병원을 하나 골랐어요. 후기가 많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이 말을 잘 들어주신다'는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루체 씨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어요. 루체 씨에게 필요한 것은 실력이 뛰어난 의사보다도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말을 들려주려면, 먼저 전화를 걸어야 했습니다.


루체 씨는 핸드폰에 병원 번호를 저장해 두고, 통화 버튼 위에 엄지손가락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그 상태로 있었어요.


전화를 받는 사람이 뭐라고 할까.

'어떤 증상이세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우울해서요'라고 하면 되나.

그런데 그건 너무 막연하지 않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야 하나. 잠을 못 잔다든가, 밥을 못 먹겠다든가...


루체 씨는 머릿속에서 전화 통화를 세 번 리허설하고 나서야 버튼을 눌렀습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전화가 연결되었어요.


"네, 병원입니다."


"...예약 하고 싶은데요."


목소리가 너무 작았을까요. 상대방이 "네?"라고 되물었습니다. 루체 씨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어요.


"예약을 하고 싶습니다."


"네, 초진이세요?"

"...네."

"증상이 어떠세요?"


루체 씨는 리허설한 문장을 꺼냈습니다.


"우울감이 있어서요."


그 한마디를 하는데 손바닥에 땀이 났어요.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가능하신데, 어떠세요?"

"네, 괜찮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어요. 한 통의 전화를 걸었을 뿐인데 온몸에서 힘이 빠졌습니다. 루체 씨는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어요.


했다. 전화를 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매일 수십 통의 전화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루체 씨에게 이 한 통의 전화는 꽤 무거운 것이었어요. 무거웠지만, 해냈습니다.




금요일이 되었습니다.


루체 씨는 아침 일찍 눈을 떴어요. 오전 10시 예약이니까 넉넉하게 준비하면 됐는데, 어째서인지 7시에 눈이 떠졌습니다. 오래도록 아침이라는 것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이, 알람도 없이 일어난 거예요.


세면대 앞에 서서 양치를 했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루체 씨는 한참 들여다보았어요. 볼이 좀 꺼져 있었고, 눈 밑에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하회탈이라고 불리던 시절의 얼굴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그땐 그 별명이 참 싫었는데. 루체 씨는 거울에서 눈을 떼고 얼굴에 로션을 발랐습니다. 피부에 뭔가를 바른 게 얼마 만인지.


옷을 골라 입는 것도 이상하게 오래 걸렸습니다. 정신과에 갈 때 뭘 입어야 하는지 같은 건 정해져 있지 않을 텐데, 괜히 단정하게 입어야 할 것 같았어요. 너무 꾸미면 별로 안 아파 보인다고 할 것 같고, 너무 허름하면 이상하게 볼 것 같고.


결국 평소에 입던 옷 그대로 나갔습니다. 어차피 루체 씨의 평소 옷차림은 그냥 평범하니까요.




오전 10시를 향해 달려가는 지하철 안에는 출근 러시가 끝난 뒤의 한산함이 깔려 있었습니다. 빈자리가 몇 개 있었지만 루체 씨는 문 옆에 서 있었어요. 앉으면 일어나기 싫어질 것 같았거든요. 지금 이 발걸음을 멈추면 다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도 있었습니다.


창밖으로 지하 터널의 어둠이 빠르게 지나갔어요. 가끔씩 형광등 불빛이 번쩍였다가 다시 어두워지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루체 씨는 그 불빛의 깜빡임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생각했어요.


나는 지금 심해에서 올라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더 깊이 내려가고 있는 걸까.


해마 일기를 쓸 때 떠올렸던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아있었습니다. 뇌수라는 바닷속에서 슬픈 기억을 등에 짊어진 해마. 10년이 넘도록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해마. 그 해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루체 씨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무거운 짐을 업고 있을 거예요.


해마의 짐이 어떤 것들인지, 루체 씨는 알고 있었습니다.


H가 복도에서 던진 한마디.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던 교실. 서랍 속의 뭉개진 빵. 부모님에게 병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돌아온 침묵.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움켜쥐었던 결과지. B가 "이미 충분히 기다린 것 같아"라고 말했을 때의 떨리지 않던 목소리.


전부 다 해마가 들고 있었어요. 루체 씨는 잊으려고 했지만 해마는 잊지 못했습니다. 그게 해마의 일이니까요. 기억을 저장하는 것. 주인이 잊으라고 해도, 해마는 충실하게 자기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가엾은 녀석.


루체 씨는 해마에게 미안했어요. 나쁜 기억만 잔뜩 안겨주고 돌봐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적어도 한 발짝 내딛는 날이에요. 해마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러 가는 길이니까요.




병원은 건물 3층에 있었어요.


루체 씨는 1층 로비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숫자가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잠시 멈칫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어요.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루체 씨는 3초쯤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어요. 문이 닫히는 동안에도 '열림'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누르지 않았습니다.


3층. 문이 열립니다.


복도 끝에 유리문이 보였고, 유리문 위에 병원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루체 씨는 천천히 걸었어요. 복도가 유독 길게 느껴졌습니다.


해마의 짐을 덜어줄 책임이 나에게는 있으니까.


루체 씨는 유리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문을 밀었어요.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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