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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체 Apr 01. 2021

남는 건 사진뿐

About the old memories of you.

나에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인연이 하나 있습니다. 그에 관한 것들은,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남김없이 불태워졌거나, 버려졌거나, 지워졌습니다. 이별이란 그렇잖아요. 시쳇말로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들 하는데, 그럼 사진이 없으면 남는 것도 없다는 걸까요. 나도 그렇게 믿고 사진 한 장, 편지 한 통 남기지 않고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그게 마음을 정리하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일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꽤나 훌륭한 시도였나 봐요. 정말 이따금씩 그의 이름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얼굴의 생김새는 완전히 잊혀, 떠올리려고 노력을 해봐도 전혀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기억나는 건 어렴풋한 실루엣 정도. 억지로 어떻게든 떠올리려고 하면 못 떠올릴 것도 없겠지만, 글쎄요.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면 될 일입니다.


어느  저녁, 아무도 없는 집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입가에 맴돌던 단어를 내뱉습니다.

이안?

내 입에서 단어가 흘러나온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다시 한번 읊조리고 나서야 이것이 그의 이름이었음을 알아차립니다. 저것을 발음할 때 내 입술이 부드럽고 달콤한 걸 보니 한때는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불렀던 이름이었을까요. 함께 나눴던 추억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데, 이것 하나만큼은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헤어질만했고,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는 걸요. 그런데 그건 어째서였을까요.


모든 걸 없앤 건 어쩌면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뭉게뭉게 떠다니는 이 감정이, 그리움이 어째서 나타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사진을 없앴더니 사진 같은 것으로는 남을 수 없는 어딘가에 박혀버릴 줄이야.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 느낌을 가지고 그와 다시 마주쳐, 추억을 팔아 다시금 연애를 시작한대도, 사랑을 하진 못할 거란 걸. 우릴 기다리는 건 비슷한 싸움과 비슷한 결말일 거란 걸.


나는 그를 떠올리는 대신, 그때의 나를 떠올리기로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를 사랑하던 때의 나를요. 어쩌면 나는 그를 사랑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던 때의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나조차 사랑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나에게 애정을 주고 싶은 걸지도. 마치 유령과도 같은 이 느낌만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불러도 된다면요.


싱크대 청소를 마저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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