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처음 헤어졌던 순간이 떠오른다. 만난 지 거의 1년 정도가 흘렀던 시점이었다. 우리는 참 많이 싸웠지만 섣불리 이별을 입에 담진 않았다. 난 내 삶의 첫 연애가 끝 연애가 되기를 바라서였지만, 넌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와 여행을 가봤던 것도, 밤새 전화기가 뜨거워지도록 수다를 떨던 것도, 누군가와 같이 아침에 눈을 떠 본 것도. 그 모든 것의 처음에는 네가 있었다.
내가 너의 집에서, 네가 좋아하는 기름떡볶이를 해주겠다며 재료를 찾다가 고춧가루를 담아둔 통을 엎는 바람에 온 거실 바닥이 뻘겋게 뒤범벅이 되어버렸던 날이었다. 황망한 얼굴로 사과하는 나에게, 너는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는 이 사달을 내느냐며 무안을 줬지. 대꾸 없이 묵묵히 걸레로 바닥을 닦던 내 옆에서, 너는 조금의 도움도 없이 무릎을 끌어안고 머리를 숙인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때 내 귀에 들려온 것은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불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는 너의 한숨이 전부였다.
고춧가루를 모두 닦아내고 너의 앞에서 너와 같은 자세로 앉아 너의 기분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1초 1초가 지나가는 게 오롯이 느껴질 만큼 긴 침묵이었지만, 나는 어쩔 도리도 없이 물에 불려둔 새끼손가락 만했던 떡이 엄지 손가락만큼 붇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내가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무안을 줄 수 있나.
이따 기분 풀리면 투정을 부려야지. 그럼 너는 쩔쩔매는 웃음을 지으며 미안하다고 나를 안아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집 앞 마트에 가서 맥주와 떡볶이를 사 와 요기를 할 것이다. 다음에는 내가 진짜로 맛있게 만들어주겠노라 말하면 오늘처럼 사고나 치지 말라며 농담을 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에 너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내가 들은 말이 맞는지 다시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왜?'라는 물음만을 반복했다. 고춧가루를 쏟은 건 잘못이지만 그게 이별의 이유가 되진 못할 것 같았거든.
집에 와서 욕조에 물을 받았다. 욕조에 들어앉아 아직도 손톱 밑에 낀 고춧가루를 빼냈다. 이왕 쏟을 거였으면 소금이나 설탕이었으면 좋았을 걸.
왜 헤어진 거야?
내가 고춧가루를 쏟았거든.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소금이나 설탕을 쏟았다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엄지손가락이 쭈글쭈글해질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너는 굉장히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고춧가루가, 아직 다 치워지지 않았어. 내가 청소를 잘 못 하잖아. 네가 와서 좀 정리해주면 좋겠는데.
이유야 어찌 됐든 너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두 번 다시는 그 집에 들어갈 명분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냉장고의 모터 소리와 고장 난 수도꼭지의 불규칙적인 물방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그렇게 우리의 첫 이별이 끝났다.
그 뒤로 우리는 제법 많은 이별과 만남을 가졌지만 대개 이별의 말도, 만남의 말도 출처는 너의 입이었다. 너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사랑스럽고 믿음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잦은 이별과 만남에서 너의 말 무게는 점차 가벼워져갔다. 어차피 또 이렇게 헤어지자고 해놓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길어야 이틀 뒤엔 다시 연락이 오겠지.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고, 나는 이제 너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가볍게만 느껴졌다.
이런 건 사랑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무슨 말을 들어도 상처 받지 않을 것 같은데, 거기에 어떻게든 생채기를 내보려 독한 말로 헤어짐을 고하는 너의 모습을 보며, 나에 대한 너의 마음이 그저 충실한 감정 배출구가 사라져 아쉬운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이전까지 그리도 올곧았던,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내 마음이 가엾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낼 것이다. 너는 매우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볼지도,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나에게 너의 감정은 별 무게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