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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재이 Jan 02. 2019

평생을 사춘기에 머무를 우리들의 이야기

김행숙「사춘기」

‘사춘기’. 누구나에게 찾아오는 청춘의 불꽃. 『사춘기』에서는 삶의 열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솔직한 고백들을 담았다. 화자는 꾸며지지 않는 담백한 느낌의 어조로 담담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나간다. 억지로 독자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없다. 그저 화자의 의식에 흐름에 충실한다. 때로는 아이, 여자, 또는 귀신의 목소리를 빌려 객관적인 느낌을 더욱 사실화시킨다.



코피를 흘리는 코끼리 속에는//펌프질을 하는 아기코끼리가 있다. 세상에선 어떤 노동을 통해 죽음에 다다르나요? 엄마, 나는 나의 천국에서 일하다 죽겠어요//코끼리의 귀가 펄럭거렸다. 거대한 몸이 헐렁헐렁해진다./엄마, 우린 청소를 하는 거예요. 엄마의 코는 훌륭한 호스예요. 좀 더 힘을 내서 뿌리세요//코끼리의 피가 원형 경기장을 만든다. 피가 불러 모은 관중들/우리의 死鬪는 같은 방향이니 평화로워요. 그런데 엄마, 저들의 오르가슴이 무서워요.//코끼리의 가죽은 축, 축, 걸쳐져 있다. 코끼리의 외관을 받치고 있는 뼈대는 늠름하다./엄마, 여기는 비었어요. 약간 춥고 배는 고프지만 노동은 즐거웠어요. 엄마, 여기는 여전히 나의 천국이에요.

-「성스러운 피」 전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영화 ‘성스러운 피’를 모티브로 한 시, 「성스러운 피」다. 영화 초반, 코끼리는 인간들에 의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이용당하다 코로 피를 쏟으며 죽음까지 맞이하게 된다. 영화에서의 코끼리의 코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그와 달리 이 시에서는 코끼리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나타냈다. 어미 코끼리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새끼 코끼리의 시선으로 말이다. “엄마, 우린 청소를 하는거예요. 엄마의 코는 훌륭한 호스예요. 좀 더 힘을 내서 뿌리세요.”에서 어미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죽음의 고통을 단 하나의 ‘일’로 치부하고 있다. 그리고 어미의 죽음을 응원하고 있다. 인간들에 의해 이용당하고 쓸쓸히 죽어가는 어미코끼리의 모습을 단적인 ‘일’로 바라보는 새끼의 시선으로 인해 비극이 더욱 극대화되는 것이다. 또한, “코끼리의 피가 원형경기장을 만든다. 피가 불러 모은 관중들”이란 표현은 코끼리가 죽어가며 피를 흘리는 모습을 참신한 표현 방법으로 시각화하여 비극을 강조한다. 새끼 코끼리는 “그런데 엄마, 저들의 오르가슴이 무서워요.”라고 말하며 인간의 욕망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엄마, 여기는 비었어요. 약간 춥고 배는 고프지만 노동은 즐거웠어요.” 작가는 담담하게 의식의 흐름을 써내려감으로서 인간의 욕망을 더욱 악랄하게 나타냈다. 


소년이 손을 열어 보여준건 칼이었다. 분홍색 손바닥 위로 슬몃 피가 비쳤다. “연필이나 깎지 그러니?” 소녀는 분명히/비웃었다. 소녀는 뚫어지게 소년을 응시했다//여자애에게 위로를 받아본 일이 있었던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는 여자애가 무서웠다. 소년은 소녀의 집에 놀러 가보지 못했다. 소년도 소녀를 초대한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해수욕장의 모래밭에 누워 있는 소녀와//볼록한 가슴에 얹어주는 뜨거운 모래에 대해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생일 파티 같은 것은 부유한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짓이다. “아무한테나 손을 벌리진 않겠지?”소녀는 똑똑하다./소년은 히, 웃으며 천천히 손을 오무렸다. 손가락과 함께 칼이 사라져갔다.

-「칼-사춘기 3」 전문


소년의 손에 쥐어진 ‘칼’을 통해 소녀는 소년의 내면의 상처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소녀는 이를 보고 놀라기는커녕 “연필이나 깎지 그러니?”하며 비웃는다. 마치, ‘그깟 상처가 대수냐?’고 말하듯이. 소년은 소녀의 마음을 안 적이 없었고, 소녀 또한 소년의 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소년의 상처 하나를 공유함으로서 그 둘의 마음은 이미 해수욕장에 나란히 누워 가슴에 뜨거운 모래를 얹어주고 있는 것이다. 소년이 손을 접자 칼은 사라진다. ‘어떤 상처’에도 놀라지 않는 소녀가 소년의 마음을 치유해주었다. 서로 아는 것이 분명히 없어도 서로를 그리며 상상한다. 사춘기 시절, 소나기처럼 내리는 사랑. 서로를 몰라도 불꽃이 튀는 사랑. 사춘기의 소년 소녀의 목소리를 통해 서로를 채워주는 풋사랑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그가 오늘 아침에도 가시를 부러뜨린다. 찔끔, 눈물이 난다./처음 가시를 발견하고 그는 열다섯 살 소년처럼 몸을 뚫고 나오는 털에 대해 생각했다. 이상한 기분으로 소년은 털이 집중적으로 자라는 부위를 만지곤 했다. 그렇지만 그는 열다섯 살 소년이 아니고/가시는 부드럽게 쓸리지 않는다. 당신은 나를 찔러요. 여자가 했던 말은 감각적인 것이었다. 빼야 할 건 가시겠지만/그는 여자를 빼고 눕는다. 그는 다시 오늘 아침에도 가시를 부러뜨리며 눈물을 흘린다.

-「가시」 부분


그가 ‘가시’를 부러뜨리는 행위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묵인하고 애써 무시하는 행위이다. “처음 가시를 발견하고 그는 열다섯 살 소년처럼 몸을 뚫고 나오는 털에 대해 생각했다”에서의 열다섯 살 소년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춘기 소년에게 ‘털이 집중적으로 자라는 부위’, 는 남성성의 욕망을 상징하며 2차 성징을 시작한 소년의 ‘성욕’이 앞선 사랑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열다섯 살 소년이 아니고/가시는 부드럽게 쓸리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성욕이 앞서는 감정이 아닐뿐더러 상처의 깊이 또한 결코 얕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나를 찔러요.” 여자는 그에게 그의 ‘사랑’은 자신을 아프게 한다고 말한다. “빼야 할 건 가시겠지만/그는 여자를 빼고 눕는다. 그는 다시 오늘 아침에도 가시를 부러뜨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에게 지워야할 것은 ‘사랑’의 감정이지만 사랑의 감정은 날마다 제멋대로 자라난다. ‘사랑’의 감정은 간직한 채 그는 “여자를 빼내며” 그녀를 잊으려 애쓴다. ‘가시’라는 시어를 통해 ‘사랑’의 감정은 서로를 다치게 하는 ‘양날의 검’일뿐더러 사춘기 소년의 ‘사랑’이 아닌 성숙한 ‘사랑’은 더욱 조심스럽고 위태롭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랑’을 애써 지우려 애쓰며 그는 날마다 ‘가시’를 뽑으며 눈물을 흘린다. 소년의 키가 한 뼘 자라난 만큼, 사랑의 깊이 또한 자라났다. 사랑의 고통을 알고,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원치 않는 그는 애써 그의 사랑을 묵인하며 ‘가시’를 뽑아내고 있는 비극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김행숙의 시는 의식의 흐름을 여과 없이 표현한다. 화자도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 소녀에서 그녀로, 소년에서 그로, 귀신이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만큼 독자들은 갈팡질팡하겠지만, 시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음미하는 그녀의 시만의 재미가 있다. ‘사춘기’의 알 수 없는 누군가로 나타나는 시적 화자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혼란을 헤매는 나이가 지나서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끝없이 우리 자신을 탐구해야하고 마주해야한다. 때론 사춘기보다 더한 위기와 고통이 오기도 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우리 자신 본연의 모습과 본성, 사람과 사람사이의 마음을 주고받는 일들은 어른이 되고 난 지금도 여전히 어렵다. 사춘기의 소년 소녀들처럼, 우린 오래도록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헤맬 것이다. 아무리 그런들 어떠랴. 청춘의 불꽃 못지않을 무언가가 늘 우리 가슴을 뜨겁게 달궈놓을 터인데.


김행숙은 이렇게 말했다. 


“‘위기’니 ‘죽음’이란 말은 ‘이동’과 ‘탄생’을 우울하고 과격하게 예언한다. 문학이 사라지는 곳에서, 문학은 새로운 육체로 또 다른 생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사라지는 곳으로부터 나는 더 멀리에서 나타나고 싶다.”


그녀는 죽음의 우울함과 고통의 슬픔을 시적 화자로서 멀리 떠나보낸다. 물 흘러가듯 그 감정을 흘려보내고, 찾아오는 의식을 새롭게 맞이한다. 마치 죽었다 다시 태어나듯이. 그리고 이동과 탄생을 조심스럽게 속삭인다. 그녀의 작품을 쉬이 이해할 순 없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대로, 그녀는 우울하고 과격한 예언과는 달리 그녀의 작품으로부터 보다 더 멀리에서 탄생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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