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등불을 밝히며 선으로 향하는 길
그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하고 선행으로 보이는 일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의 방향이 조금이라도 틀어져있다면 그것은 복받을 일이 아니다. 이 말은 단순히 행위의 결과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우리 마음의 나침반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대신 해주었다. 숙제부터 친구 관계의 갈등까지, 아이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미리 제거해주었다. 그녀의 사랑은 진실했고, 의도는 선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 아이는 스스로 일어설 힘을 잃어버렸다. 작은 좌절 앞에서도 무너지는 연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사랑한다고 했지만, 정작 그 사랑이 향한 방향은 아이를 약화시키는 쪽이었던 것이다. 이때 우리는 외부의 기준이나 방법론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일기를 써보고,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고, 육아서를 읽어본들, 그것들이 과연 이 어머니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회사의 한 팀장이 있었다. 그는 직원들을 배려한다며 힘든 일은 모두 자신이 떠맡았고, 부하들의 실수는 조용히 덮어주었다. 피드백을 주는 것도 직원들이 상처받을까봐 주저했다. 그의 마음에는 분명 선의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팀은 무기력해졌고, 성장은 멈춰버렸다. 직원들은 책임감을 잃었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 팀장 역시 각종 리더십 교육을 받고, 관리 기법을 배우고, 멘토를 두었다고 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의 내면에서 진정으로 무엇이 옳은지 느끼는 감각이 깨어나지 않는 한, 그는 계속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선행을 할 때도 자신도 모르게 우월감을 품는다. 노숙자에게 음식을 건네며 "술 사먹지 말고 이걸로 끼니 해결하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 선행에는 이미 판단과 편견이 스며들어 있다. 자선 활동을 하면서도 SNS에 인증 사진을 올리고, 봉사를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의 선한 이미지를 기대한다. 이런 미묘한 마음의 동기들을 외부의 체크리스트나 가이드라인으로 걸러낼 수 있을까? 아무리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어도, 그것들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형식적인 선함에 안주하게 만들 뿐이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선으로 향하는 내재적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감각이 있다. 그것은 학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떤 가르침도 받지 않았는데도 불공평한 상황에 분노하고,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감각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본질에 새겨진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감각을 점점 둔화시킨다. 사회의 기준에 맞추려 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부모가 아이를 과보호하는 것도, 상사가 직원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것도,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도, 모두 이 내재적 감각을 신뢰하지 않고 외부의 기준에 의존하려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하셨다. 이는 맹목적인 자기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내면에 이미 있는 깨달음의 씨앗,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혜의 빛을 믿고 그것을 키워나가라는 뜻이다. 그 빛은 외부의 어떤 가르침보다도 정확하고 순수하다. 그것은 이기심과 욕망에 가려져 있을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나침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나침반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것을 다시 믿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해석이나 교리서에 쓰인 조문들이 아니라, 기도와 묵상 중에 마음에 직접 울려오는 그 목소리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고, 판단이 없으며, 모든 존재를 품는다.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엇이 옳은 방향인지 알게 된다. 과보호가 진정한 사랑이 아님을, 무책임한 배려가 오히려 상대를 해치는 일임을, 우월감이 섞인 도움이 진정한 선행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내면의 감각보다 외부의 검증에 더 의존하려 한다는 점이다. 일기를 쓰고, 조언자의 말을 듣고, 원칙을 세우는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법들에만 의존하면 오히려 더 큰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일기에서도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고, 조언자도 잘못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으며, 원칙도 경직되어 살아있는 지혜를 막을 수 있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런 외부적 장치들이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변화는 내면에서 시작된다. 과보호하는 어머니가 진정으로 변하려면, 양육 기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집착을 들여다봐야 한다. 아이가 실패할까봐 두려워하는 그 마음, 아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그 욕망을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녀는 언제 도와야 하고 언제 아이 스스로 해결하게 내버려둬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팀장도 마찬가지다. 관리 기법을 익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팀원들의 성장을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욕구, 갈등을 피하고 싶어하는 두려움을 솔직히 인정하고,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 엄격해야 하고 언제 따뜻해야 하는지, 언제 도전을 주어야 하고 언제 지지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내면의 감각을 기르는 것은 어떤 기술이나 방법론을 익히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분노도, 두려움도, 욕심도, 질투도 모두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에 휘둘리지 않는 더 깊은 지혜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아무 생각 없이 놓아두면 똑바로 나가지 못하는 존재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부의 감시나 통제에 의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깊은 자각이다. 매 순간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그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화가 날 때 그 화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도움을 주고 싶을 때 그 동기를 정직하게 점검하는 것이다. 이런 자각이 쌓여갈 때, 우리는 점점 더 섬세하게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고, 자연스럽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실수는 피할 수 없다. 아니, 실수야말로 우리가 성장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실수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더 겸손해지며, 더 세심해진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했을 때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움도 외부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깨달음이어야 한다.
결국 지금 가는 방향이 악의 방향이 아닌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반성하며 가는 방향을 체크하고 조금씩 조정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내면의 나침반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그것을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나침반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고 있는 온갖 잡념과 욕망들을 걷어내고 그 순수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모든 행동이 진정한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