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위한다는 거짓말
아이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작은 손가락이 건반 위를 더듬거리며 어설픈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그 순간 부모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아이의 즐거운 표정일까, 아니면 이웃집 아이와 비교한 진도일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후자에 가깝다. 우리는 자녀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자신을 위한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접근 방식을 들여다보면, 크게 두 가지 동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진정으로 자녀의 행복과 성장을 위한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 자신의 만족과 체면을 위한 교육이다. 문제는 후자가 전자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그 이면에는 종종 부모의 욕망이 숨어있다.
현대 사회에서 자녀는 부모의 성공을 증명하는 하나의 지표가 되어버렸다. 아이가 명문대에 진학하면 부모가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아이가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부모의 교육 방식이 성공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부모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녀를 자신의 연장선으로 여기게 된다.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와 "오늘 시험에서 1등 했어요"라고 말할 때, 부모는 진심으로 아이의 성취를 기뻐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부모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생겼다고 안도하는 걸까? 이 미묘한 차이가 자녀교육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부모의 허영심이 개입된 교육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이가 하기 싫어하는 것도 "너를 위해서"라며 억지로 시키거나, 아이의 관심사보다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분야로 유도하거나, 아이의 현재 상태보다는 미래의 스펙 쌓기에만 집중하는 것들이다. 이런 교육 방식은 겉으로는 자녀를 위한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부모 자신의 불안과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복잡하고 지독한 상황이 있다. 부모가 스스로는 자녀를 위한 교육을 한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경우다. 이런 부모들은 자녀교육서를 열심히 읽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한다. 머리로는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아이의 선택을 믿어야 한다",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이런 교육철학을 당당하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아이가 "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 입으로는 "네 꿈을 응원해"라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음악으로 어떻게 먹고 살려고"라며 불안해한다. 그리고 곧바로 "그래도 공부는 해야지", "일단 대학은 가고 생각해보자"라며 아이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때 부모는 자신이 아이를 위해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고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아이의 꿈을 짓밟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이런 부모들의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의 이중성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이중심 교육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부모 자신의 불안과 기대에 따라 움직인다.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으면 진심으로 기뻐하지만, 그 기쁨의 실체는 아이의 성취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성공적인 부모라는 확인을 받았다는 안도감이다. 아이가 실패하면 아이를 위로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체면이 깎였다는 분노와 실망감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비대칭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부모는 스스로가 자녀를 위한 교육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아이는 부모의 진짜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다. 아이들의 직감은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다. 부모가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아이는 부모의 눈빛에서, 목소리 톤에서, 미묘한 반응에서 진실을 감지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시험 점수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열심히 했으면 됐어"라고 말했다고 하자. 하지만 아이가 시험 결과를 말했을 때 부모의 첫 번째 반응이 점수에 대한 것이었다면, 아이는 부모의 진짜 관심사가 무엇인지 즉시 안다. 부모가 "너의 꿈을 지지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꿈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때는 온갖 현실적인 제약을 들며 반대한다면, 아이는 부모의 지지가 공허한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느끼는 혼란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부모를 믿고 싶은 마음과 현실에 대한 직감 사이에서 갈등한다. 부모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자신이 느끼는 직감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혼란 속에서 아이는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자아 정체성의 혼란까지 겪게 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부모들은 자신의 모순을 지적받으면 강하게 반발한다는 점이다. "나는 항상 아이를 위해 생각한다", "내가 언제 아이에게 나쁜 마음을 가졌다고 그러느냐"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심지어 아이가 직접 "엄마는 항상 자기를 위해서만 생각해"라고 말해도 "네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 "내가 얼마나 너를 위해 희생하는데"라며 아이의 말을 일축한다. 이런 반응은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이 틀렸다는 메시지를 계속 받으면서 아이는 점점 더 위축되거나 반대로 더 강하게 반항하게 된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부모의 진짜 의도를 꿰뚫어 본다. 부모가 아무리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해도, 정작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보다는 성적표나 상장에 더 관심을 보인다면 아이는 그것을 감지한다. 부모의 사랑이 조건적이라는 것, 자신이 성과를 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순응형이다. 이런 아이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고 부모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겉으로는 모범적인 자녀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한 채 부모의 대리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둘째는 반항형이다. 이런 아이는 부모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에 저항한다. 공부를 거부하거나, 부모가 원하지 않는 길을 일부러 선택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가족과의 관계를 단절하기도 한다. 이들의 반항은 단순한 반항기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성을 지키려는 몸부림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모와의 관계는 악화되고, 아이 자신도 상처를 받게 된다.
셋째는 혼란형이다. 이는 가장 안타까운 경우로, 부모의 이중적인 메시지 때문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이다. 부모를 믿고 따르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직감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런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세 경우 모두 건강하지 못하다. 순응형 아이는 자아를 잃고, 반항형 아이는 관계를 잃고, 혼란형 아이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어느 쪽이든 온전한 성장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교육 방식이 세대를 거쳐 전수된다는 점이다. 부모를 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 같은 방식으로 자녀를 교육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자신의 부모가 이중적인 메시지를 주었던 경우, 그 혼란이 대물림된다. 자신이 받은 교육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한 채 부모가 되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순응형으로 자란 사람은 자신의 아이에게도 순응을 강요한다.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이 안전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했듯이, 자녀에게도 같은 희생을 요구한다. 반항형으로 자란 사람은 두 가지 극단 중 하나를 선택한다. 부모와 정반대로 아이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거나, 아니면 자신이 받았던 억압을 그대로 재현하거나. 혼란형으로 자란 사람은 가장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일관성 없는 양육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자녀도 같은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자녀교육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이를 빨리 경쟁력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성찰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신이 받은 교육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할 뿐이다. 특히 자신의 마음과 행동 사이의 괴리를 깨닫지 못하는 부모들의 경우, 이런 악순환을 끊기가 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부모 자신이 자신의 동기를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아이에게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불안이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특히 자신은 아이를 위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성찰은 쉽지 않다. 자신의 이기심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더욱 충격적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는 불가능하다. 부모 자신이 자신의 한계와 욕망, 그리고 자기기만까지도 인정할 때, 비로소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특히 자신의 말과 행동 사이의 괴리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아이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 체면을 위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정작 아이가 내 기대와 다른 선택을 하면 불안해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런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아이와 솔직하게 공유하는 것도 필요하다. "엄마가 너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엄마 자신을 위한 행동을 할 때가 있었구나. 미안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솔직함이 아이에게는 큰 위로와 해방감을 준다. 자신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동시에 부모도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히려 더 편안해진다.
진정한 자녀교육은 아이 고유의 특성과 관심사를 발견하고 이를 키워주는 것이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재능이 있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아이가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부모의 마음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점이다. 입으로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 깊이에서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믿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의 선택이 부모가 원하는 방향과 다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가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단순한 말이 아니라 일관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부모를 위한 교육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의 목표 자체를 재정의해야 한다. 기존의 교육이 성공과 성취에 초점을 맞췄다면, 새로운 교육은 행복과 성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부터 자신의 가치관을 점검해야 한다. 성공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행복을 무엇으로 여기고 있는지, 교육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이 사회의 압력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닌지, 정말 자신과 자녀에게 의미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또한 아이와의 소통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대신, 아이의 생각과 감정을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아이를 통제의 대상이 아닌 대화의 상대로 여겨야 한다. 이런 관계에서 아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교육이다.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아이가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 어려움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회복력,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런 내적 역량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먼저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는 부모가 하는 말보다는 부모가 사는 모습을 더 많이 배운다. 부모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 아이도 그런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
이 모든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습관과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자신의 이중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부모의 경우, 그 변화는 더욱 어렵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면 된다.
오늘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오늘 시험은 어땠니?"가 아니라 "오늘 하루는 어땠니?"라고 물어보는 것.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 아이의 실수나 실패를 탓하지 않고 함께 해결 방법을 찾아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첫 번째 반응을 점검해보는 것. 내가 지금 한 말과 행동이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내 체면이나 불안 때문이었는지 솔직하게 돌아보는 것. 이런 작은 성찰과 변화들이 모여서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한 부모가 되려고 하지 말고, 성장하는 부모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아이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부모.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아이에게 사과할 줄 아는 부모. 자신의 이중성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부모.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자신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우고, 실수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과 직감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자녀교육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아이를 통해 자신의 만족을 얻으려 하지 말고, 아이 자신이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도움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진정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세대를 이어온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변화가 하나둘씩 모여서 우리 사회 전체의 교육 문화를 바꿔나간다면, 다음 세대는 더 이상 부모의 허영을 위한 도구가 아닌,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작은 바로 지금, 우리 각자의 작은 성찰에서 시작된다. 특히 자신이 정말로 자녀를 위한 교육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을 속이면서 자신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솔직하고 용기 있는 성찰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