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인 시간을 견디는 것.

‘독(獨)’해지는 법

by 성휘

혼자인 시간을 견디는 건 스트레칭과도 같다. 처음엔 괴롭기만 하다. 아프다. 왜 이걸 하나 싶다. 자꾸 피하게 된다. 차라리 군대 얼차려가 더 쉽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우스꽝스럽고 창피해져 현타(현자타임)를 부른 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런데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몇 번의 호흡만큼만 참아보면 견딜만해진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조금 더 견디다 보면 통증 대신 시원한 저릿함이 온다. 어느새 바닥에 다리를 펴고 앉아 허리를 굽히면 발바닥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유연한 인간이 되는 거다.


고등학교 때 소질 없던 과목 중 하나를 꼽으라면 ‘한문’이다(이거 말고도 수많은 과목에 소질이 없었다). 그때 배운 것 중 무엇이 남았을까 생각해보니 ‘확률과 통계’ 만큼 아무 것도 없다. 내 이름 석자 까먹지 않은 데 감사할 따름이다(문과다).


그럼에도 하나 남은 게 있다. ‘신독(愼獨)’이다. ‘혼자 있을 때를 조심한다’는 뜻이다. 좀 더 풀어쓰자면,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어 어긋나는 행동이나 그릇된 생각을 하지 않는 마음과 태도’다.


18살의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확률과 통계만큼 싫어했다. 불과 100걸음 도 안 되는 기숙사 밖 슈퍼에도 혼자 가기 싫어서 같이 갈 친구를 찾아 조르다가 욕을 듣곤 했다(준모야 미안해).


그때 난 왜 혼자 있기를 싫어한걸까. 이제 와 생각해보니, 혼자 있는 내 모습이 싫어서 였던 것 같다. 기숙사 침대에 혼자 누워 인터넷 강의를 핑계로 산 PMP로 ‘커피프린스 1호점’을 몰아 본다든가, 하릴없이 잠을 잔다든가 했다.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생각도 못한 채 죽였다. 희대의 연쇄 과실치사범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면 시험이 코앞이었고, 혼자였던 시간은 후회로 치환돼 마음 언저리에 쌓였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려면 혼자인 내 모습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혼자인 내 모습이 부끄러워선 안 되고, 그러려면 혼자 있을 때를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독(獨)’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독해질 필요는 없다. 주말 이틀 내내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 납득할만한 이유만 있다면. 치열했던 한 주의 보상이라든지, 다가올 한 주를 위한 충전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그런 식의 의미부여가 없으면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다. 과실치사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싸이코패스밖에 더 되나.


우리는 혼자일 때 비로소 한 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독(獨)’해지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 확률과 통계를 한 방에 풀어 설명하는 명강의를 들어도 혼자 복습하지 않으면 가위바위보에서 이길 확률 밖에 계산하지 못하듯 일상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오롯이 혼자인 시간에 다시 꺼내 반추해야만 진정한 경험치가 돼 쌓인다. 하다못해 이불킥도 혼자 있을 때 할 수 있는 거다.


혼자일 때 우리는 밖보단 안을 더 들여다보게 된다.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그저 뒷담화만 하기 바쁜 회사 부장을 떠올려도, 혼자 있을 땐 그 XX의 싫은 점보다 내가 그 XXX을 왜 싫어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중심이 밖에서 안으로 옮겨오는 거다.


그래서 누구 말대로 혼자인 시간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외롭고 아프지만, 지금 이 시간을 당장 끝내고 싶지만 조금 더 참아보는 것. 그게 신독이고, 그러다보면 우리는 비로소 한 뼘 더 나은 사람이 된다. 단단한 사람이 되어 일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일상에서 날아드는 차가운 말과 아픈 시선, 따가운 편견에 의연해질 수 있게 된다. 다시 한 번, 유연한 인간이 되는 거다.


혼자인 시간은 스트레칭과 같아서 피하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된다. 마냥 외면하다보면 언젠가 크게 다치는 날이 온다. 물론, 다쳤을 때 혼자면 그것만큼 서러운 게 없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라도 혼자인 때를 잘 견디며 살아야 한다. 십자인대 수술한 지 2달도 안 된 사람이 하는 말이니 조금은 진지하게 새겨 들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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