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노인과 나

by 성휘

고백하건대,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난 슬프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죽은 건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시험을 마친 내가 같은 반 친구들과 ‘빕스’ 뷔페를 골라 담을 때쯤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이 된 날숨을 뱉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까지 유학 보낸 아들이 시험을 망칠까봐 부모님은 폐암으로 입원 중이던 그의 위독함을 숨겼다고 했다. 그렇다고 점수가 크게 오른 것 같진

않다.


“형 언제 와?”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동생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느꼈다. ‘이건 아닌데’ 하는 께림칙한 마음이 접시 위 감자튀김처럼 쌓였다.


‘왜 안 슬프지?’
나와는 달리 온몸으로 슬퍼하는 동생을 보면서 내 안 뭔가가 고장 났구나 느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담임은 세상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서 서울로 올라가라고 했다. 음식을 먹다 말고 괜찮냐고 물어보는 친구들도 담임과 같은 표정이었다. ‘그치? 큰일은 큰일이지?’했다. 그런데도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서는 먹다 남기고 온 음식이 자꾸만 생각나 마음이 불편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본 가족들의 얼굴도 담임의 그것과 비슷했다. ‘너도 슬프지?’하는 표정. 장례식장에서 빌려주는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으면서부턴 고민이 시작됐다. 빈소에 들어가자마자 엉엉 울어야 하나? 슬픈 표정만으로 충분할까? 들어갈 때부터 울어야 하나? 들어가서 울어야 하나? 소리는 어느 정도 내야 하나? 그전에, 눈물이 나긴 날까?


걱정과는 달리 나는 정확히 첫 번째 절을 마치고 두 번째 절을 하기 위해 엎드렸을 때 울음을 터뜨렸다. 환히 웃는 그의 영정 사진을 보자 미안함이 울컥 솟아 올라온 탓이다. 슬프다기 보단 미안해서 울었다. 할아버지가 죽어도 나는 슬프지 않아요. 미안해요. 엎드린 채 엉엉 울고 있는 내 옆에 엄마 아빠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은 나와 같은 자세로 한참을 울었다. 엄마, 아빠, 나는 슬퍼서 우는 게 아니야. 그게 또 미안해서 더 울었다.


10년도 넘게 흘렀지만 그날 장례식장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강대창 씨 장손이 할아버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절을 하다 중간에 엉엉 울었더라는 미신 같은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있다. 한강의 기적처럼.


강대창 씨는 많은 손자들 중에 첫째 손자를 가장 아꼈다고 했다. 명절 때면 가족들은 으레 강대창 씨와 나에 관한 에피소드로 그를 추억한다. 첫째 손자가 낮과 밤이 바뀐 나머지 강대창 씨가 밤새 업어 달랬다든가 공원에서 집에 가지 않겠다는 첫째 손자를 꼬시기 위해 껌 세 통을 샀지만 껌만 다 받아 씹고는 그네에서 내려오길 거부해 결국 입에 탁구공만한 껌을 물고 있는 손자를 쌀포대마냥 들쳐 매고 집에 돌아온 이야기 따위로 그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이었는지 곱씹는다.


그런데 정작 나는, 매년 적어도 2번씩 이 이야기를 반복해 듣고 있는 나는, 더군다나 이 이야기 속 주인공이기도 한 나는 아직도 슬프지가 않다. 그립다거나 한 마음도 굳이 계량하자면 한 주먹 정도다.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의 내가 어려서 그랬던 것만은 아닌 게 확실하다. 아직 살아계신 세 명의 조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를 상상해봐도 그닥 슬프지 않아서다. 당신의 엄마를 잃은 나의 엄마가 펑펑 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좀 짠하긴 하겠구나, 정도다.


몇몇 착한 사람들은 나와 그들이 공유한 추억이 몇 없어서 그럴지 모른다고 위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방예의지국이 강조하는 유교적 미덕에 너무나도 충실한 나머지 나의 부모는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명절이면 서울에 있는 친가와 전남 장흥에 있는 외가를 오갔다. 가끔 지리산 계곡이나 무주 리조트 따위로 여행도 갔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면 부부 동반 여행을 떠나기 위해 나와 동생을 친가와 외가에 번갈아 가며 맡기곤 했다. 나는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할아버지가 마당에 말려 놓은 고추 옆에서 동생과 공을 찼다. 건설 노동자였던 할아버지에게 팔씨름을 이기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기도 했다. 그의 오른손에는 담배 냄새가 짙게 났고 난 그 내음이 별안간 좋기도 했다.


변명을 하자면, 나도 슬퍼할 줄 아는 인간이다. 가장 최근에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고 눈물을 훔쳤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보고는 코끝이 찡했다. <원스>를 보고도 한동안 먹먹했다. 얼마 전 여자친구랑 헤어져서도 울었고, <채식주의자>를 읽고 난 뒤에는 5.18 유가족의 사연을 지독하게도 자세히 전달한 나머지 읽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논픽션 기사를 써보고 싶다고 꽤 오래동안 생각했다.


그런데 조부모의 죽음 앞에서는 왜 나는 의연할까. 의연하다는 말도 지나치게 포장된 느낌이다. 그냥 아무렇지 않다. 무감(無感)하다.


내 뇌 속 신경 뉴런 다발 중 하나가 태어날 때부터 고장나버린 나머지 늙은 사람들의 죽음에 무감하게 돼 버린 것이 아니라면, 원인으로 짚이는 게 하나 있긴 하다. 친할머니다.


진애엽 씨는 유년시절 내 기억 속에선 마녀와 다름없었다. 첫째 며느리를 죽기만큼 싫어하며, 돈을 밝히는 사람. 동방예의지국 맏며느리로서 매 명절마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부역을 하는 나의 엄마를 거의 매해 무릎 꿇리고 때렸던 사람. 어쩔 때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무릎 꿇은 나의 엄마를 후려 쳤던 이. 옷에 붙은 내 엄지만한 지퍼 손잡이가 엄마 얼굴을 칠 때 나던 소리와 붉은 상흔.


그때마다 나는 낯선 서울 냄새가 나는 친가의 좁은 방에 틀어박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게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아빠의 엄마가 나의 엄마를 향해 휘두르는 폭력과 그로 인한 소음은 방 안을 가득 메운 고추 냄새만큼 참기 힘들었다. 할아버지가 방안에 널어 놓은 고추는 새빨갛게 잘도 말랐다.


진애엽 씨는 명절이 아닐 때에도 전화로 나의 엄마를 괴롭혔다. 원격전투에는 강씨 성의 고모는 물론 진씨 성을 가진 아빠의 이모들까지 동원됐다. 무선전화기 너머로 넘쳐흐르던 욕지거리와 악다구니가 한바탕 몰아치고 나면 나의 엄마는 안방 한쪽 구석에서 숨죽여 울었다.


나는 나이 많은 사람들과 있는 시간을 못 견딘다. 노인들과는 말을 섞기 조차 어렵다. 혐오라기보단 하릴없이 어색하다. 그냥 피하게 된다. 무섭다. 박막례 할머니 동영상도 한 편을 채 다 보지 못하는 부류다. 얼마 전까지 사귄 여자친구 집에도 함께 사는 할머니가 지독히도 어색해 가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면 무서워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모든 노인이 진애엽 씨 같진 않겠지만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보고 놀란다면 이런 거겠구나 싶다. <버킷리스트>에 나온 모건 프리먼과 잭 니콜슨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그 영화를 10번도 더 돌려봤지만 노인은 싫다. 늙그막에 멋진 여행을 떠나는 두 노인은 시뮬라르크일 뿐. 그들을 실제로 보면 난 예의 수다스런 모습을 잃고 슬쩍 자리를 뜰 궁리를 하느라 의기소침해 보일 게 확실하다.


문제는 별안간 나도 노인이 될 거라는 거다. 과연 나는 노인이 된 나를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거울 속 나를 무서워하지 않고 응시할 수 있을 것인가. 노인이 된 내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한 끝에 히키코모리가 돼버리는 건 아닐까. 그렇게 혼자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되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80줄에 들어서서야 조금은 온순해진 진애엽 씨를 보며, 그리고 그런 그녀를 30년 가까이 똑같은 자세로 ‘봉양’하는 나의 엄마를 보며 느끼는 건 측은함일뿐 분노는 없다. 진애엽 씨에게 느끼는 건 오히려 삐에로 얼굴을 볼 때 느껴지는 공포에 가깝다.


고백하건대, 나는 진애엽 씨를 사랑하지 않을 뿐이다. 그녀가 없는 세상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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