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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Nov 19. 2020

엄마가 떠났다.

엄마가 떠났다. 나는 이제 엄마가 없다. 나의 엄마는 2020년 9월 7일 월요일, 새벽 4시 6분 하늘나라로 가셨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쓰고 싶지 않다. ‘죽음’은 끝이다. 그다음은 없다. 소멸이다. 순간의 소멸이 아니라 영원한 소멸이다. 엄마는 죽은 것이 아니다.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육신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하느님 곁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엄마의 엄마를 만나고, 아빠를 만나고, 언니들을 만나고, 오빠를 만나고, 잃었던 아이를 만나 영원한 안식에 이르렀다. 드디어 고통 없고 아픔 없는 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다.     

엄마는 편안함에 이르렀지만 나는 고통스럽다. 엄마와 38년을 살았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나의 생이 38년 보다는 길듯한데, 나는 벌써부터 엄마 없는 삶이 두렵다. 누구한테 물어야 할까, 엄마 없는 삶은 어떤 것이냐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 엄마가 없으면 어찌해야 하는 것이냐고, 누가 나에게 답을 해줄 수 있을까. ‘가슴이 아프다’라는 표현은 너무나 미약하다.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엄마가 없는 것을. 보고 싶은데 볼 수 없고, 만지고 싶은데, 달려가 안기고 싶은데, 고작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고, 녹음된 목소리를 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이 감정을, 대체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군가를 부러워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성인이 된 후로,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세상에 저절로 누려지는 것은 없다는, 한마디로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것을 일찍 깨우친 나는, 그다지, 다른 사람들이 부럽지 않다. 돈이 많거나, 잘생긴 남편이 있거나, 잘난 시댁이 있거나, 큰 집 또는 큰 차가 있거나, 그런 것들이 나는 부럽지 않다. 누구에게나 다, 각자가 짊어진 것 들은 그에 마땅한 그만큼의 무게가 있는 법이다. 그런 것들을 누리려면 그 무게도 함께 견뎌야 한다. 무게 없이 누리는 것만 있을 수는 없다. 반드시 무게는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것들을 가진 누군가가 그다지 부럽지 않다. 내 것에 만족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내 것만 가지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감정을 느껴본 적도 별로 없다.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에서 ‘레트로’ 열풍이라며 90년대 가요를 틀어주고, 그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간식이나 장난감들을 보여주고, 그때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을 찾아내 근황을 알려주고, 그런 것들을 보며 향수를 느끼고, 추억을 공유하는 모습들이 나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 시절 나는 가난했고, 그래서 늘 소극적이었고, 바퀴와 쥐가 있던 식당에 딸린 작은 다락방, 나와 언니들을 자주 훔쳐보던 술 취한 주인집 아들이 있던 단칸방, 나는 그런 것들이 떠올라 어린 시절이 전혀 그립지 않다. 대학 때도 늘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캠퍼스의 낭만 따위는 없었다. 날씬하고 예뻤던, ‘리즈시절’이라 불릴 수 있었던 20대의 외모 황금기 때로도 나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때의 난 두려움이 많았고, 타이트 한 치마와 높은 구두가 갑옷처럼 답답했다. 나는 언제나 지금의 내가 가장 편안하고 좋다. 과거는 과거일 뿐. 돌아가고 싶지도, 추억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지난 일들에 대해 후회되는 것이 없다. 잘못한 것이 있고, 반성할 것이 있으면 후회하지 않고 성찰해야 한다. 어떤 것이 문제였고,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는지 충분히 생각하고 복기한 뒤,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 기억에 새긴다. 그것이 성찰이다. 후회는 과거에 머무르지만 성찰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면 ‘잘못한 일’은 ‘잘한 일’ 이 된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주고 가르침을 주었으니 더 이상 ‘잘못한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켜켜이 쌓아가며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엄마가 떠난 후로, 나는 이제 그렇지 않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엄마가 있는 사람이다. 이제 나는, 엄마와 함께 장을 보고, 엄마와 함께 팔짱을 끼고 길을 걷고, 어디에선가  ‘엄마’라고 부르며 뛰어가는 사람을 보면,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 엄마를 가진 사람에겐 그만큼 견뎌야 하는 무게 따윈 없다. 엄마는 그저 누구에게나 있다. 배가 아프다 하면 따듯한 찜질팩을 데워다 주고, 귀가 시간이 늦으면 잔소리하며 전화해대고, 휴일에 늦잠 자면 밥 먹고 다시 자라며 굳이 나를 깨워대는 엄마가, 이제 나에게는 없다. 그것이 너무나 부럽다. 

나에게 엄마와 함께하던 과거는 너무나 그립다. 드라마에서처럼 간절히 원하면 이뤄질까. 눈뜨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한 번만 엄마의 얼굴을 만지고 올 수 있었으면, 이런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게 된다. 엄마와의 기억이 있던 모든 물건들이 너무나 애틋하고 절절하다. 추억을 회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슴이 저려오고 아프다. 그렇게 나는 엄마와 함께 있던 과거에 매여있다.

나는 지금 너무나 많이 후회된다. 엄마의 병에 조금 더 적극적이지 못했음이 억장이 무너지도록 후회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의사의 말을 채근하고 나무랐어야 했다. 불안에 잠 못 이뤘을 엄마를 조금 더 살뜰히 들여다봤어야 했다. 내가 먼저 항암제의 부작용을 찾아봤어야 했다. 일찌감치 큰 병원의 이름난 명의를 찾아봤어야 했다. 고작 3개월짜리 계약직을 하겠다고 엄마를 두고 취직하지 말걸, 엄마에게 간병인 쓰라고, 나도 힘들다고 말하지 말걸, 6주 만의 퇴원이라고 좋아하지 말걸, 계속 열나는 엄마를 방에 혼자 두고 거실에서 우리끼리 술 먹지 말걸, 열나서 기운 없어하는 엄마에게 화장실 가지 말라고, 기저귀를 채워줄걸,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할걸, 아............. 모든 순간이 다 후회뿐이다. 말해 무엇하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다. 반성하고 복기하여 성찰할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이제는 없다. 엄마가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후회될 뿐이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하지만 이제 엄마를 볼 수 없다. 엄마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엄마가 있는 하늘나라로 가는 것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몹쓸 생각까지 하게 된다. 실제로 소중한 사람을 잃고 따라 간 사람들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겠구나 이해가 된다. 오죽하면 스스로 목숨을 버렸을까. 그 고통과 그리움을 너무나 알겠다. 엄마의 집은 아파트 18층이다.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하다. 그곳에서 몸을 던지면 내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수 있겠구나. 혹여나 살게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런 생각에 잠 못 이루다 옆에 누워있는 남편의 얼굴을 본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나의 언니를 떠올린다. 몹쓸 생각을 꾸역꾸역 삼킨다. 몹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엔 나는 아직 덜 독한가 보다. 그러니 더 꾸역꾸역 몹쓸 생각을 삼킨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움도,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기억도, 후회도, 꾸역꾸역 삼킨 몹쓸 생각마저도 적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의 시간을 떠올리지만 말고 기록하고 싶어 졌다. 목적은 모르겠다. 글로 써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직은 없다. 그저 써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이것이 나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방식일지, 몹쓸 생각을 삼킬 수 있는 약이 될지, 누군가 알아줬음 하는 관심병의 행태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써야겠다. 차근차근, 조금씩, 나는 엄마를 이 글에, 내 손가락에, 가슴에, 심장에, 머리에, 기억에, 새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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