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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Nov 20. 2020

급성 골수성 백혈병

엄마는 백혈병이셨다. 그전에 골수이형성 증후군이셨다. 그전에 유방암이셨고, 그 전에는 노화로 인한 자궁 처짐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워 자궁적출술을 받고 빈궁마마가 되셨다.


2015년 초 정도로 기억이 된다. 엄마는, 자궁 처짐으로 인한 여러 가지 불편함과 통증들을 정리하기 위해 오랫동안 미뤄왔던 자궁적출술을 드디어 받으셨다. 수술은 간단했고, 경과라고 할 것도 없었다. 네 명의 자식을 만들고 품어낸 엄마의 자궁을, 엄마는 비교적 후련하게 떠나보냈다. 병실에 함께 있는 환자들끼리 빈궁마마 되셨다고 우스갯소리나 나누며 즐겁게 쾌차하셨다. 퇴원 후 경과를 보러 산부인과를 다시 찾았고, “나이도 있으시니 유방초음파나 이번 참에 새로 찍어보시죠.” 하는 담당교수의 말에 병원 놈들 배나 불려주자며 흔쾌히 초음파를 찍으셨다. 그러다 엑스레이도 찍으셨고, 뭐가 보인다며 유방외과를 가보시라 연결해주었고, 유방외과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다. 그게 봄이었다. 4월쯤. 암세포가 크지 않고 위치가 좋아 수술만 잘하시면 별 문제없을 거라는 담당교수의 소견에 애써 마음을 붙잡으며, 잘 될 거라 서로를 다독이며 엄마는 몇 달만에 다시 전신마취를 하시고 수술대에 오르셨다. 수술은 잘 되었고, 예후도 좋았고, 혹시 몰라 전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술 중 겨드랑이 쪽 세포를 떼어내어 조직검사를 의뢰해놨다고 의사는 전했다. 별거 없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크게 한숨을 내 어쉬고, 한번 더 마음을 다독이며 엄마는 퇴원하셨다. 그리고 조직검사 결과를 확인하고자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래. 그날이다. 그날은 2015년 4월 30일. 나의 생일이었다. 나는 그때 백수였다. 나는 결혼 후 엄마 윗집에 전세살이를 하며 엄마에게 얹혀살고 있었다. 늦잠 자고 일어나 빈둥거리고 있는데 엄마가 병원에 함께 가 달라며 나를 찾았다. 별거 없을 거라는데 뭐 굳이 나까지 데려가냐며 나는 귀찮은 내색을 보였고, 엄마는 나의 생일이니, 진료 보고 맛있는 점심 먹고 들어오자며 굳이 나를 앞장 세웠다. 우리는 함께 유방외과 교수의 진료실에 들어갔고, 교수는 겨드랑이 쪽 조직에서 악성, 아주아주 질 나쁘고 독하디 독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항암과 방사선 치료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오후에 바로 혈액종양내과 진료를 잡아줄 테니 점심 드시고 오후에 진료받고 바로 항암 스케줄을 잡으라고 하였다. 그날 병원을 나와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오후 진료까지 시간이 남으니 소화나 시킬 겸 산책이나 하자고 대학병원 옆 대학 캠퍼스를 걸었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이었다. 그 아름다운 벚꽃길을 걷다 주차되어있는 어느 차 뒤 돌부리에 앉아 엄마와 나는 한참을 울었다. 꺼이꺼이 소리 내며 울었다. 다행히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20년쯤 홀로 장사를 하며 딸 셋을 다 시집보내고, 이제는 돈 걱정 없이 소일거리나 하고, 성당 봉사활동이나 하며 편히 살 수 있는 날이 드디어 왔건만, 그런 호사스러운 시절을 고작 몇 해 지내고 나니, 이런 병이 생겨버렸다. 엄마는 그날 밤 혼자서 또 얼마나 울었을까. 엄마는 그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 밤이 얼마나 길고 길었을까. 


엄마는 5월 중순부터 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하셨다. 20번 가까이 항암을 하고, 또 20번쯤 방사선 치료를 하셨다. 그러고 나니 한 해가 다 갔다. 항암 할 때의 그 고통은 말해 무엇하랴. 숭덩숭덩 빠지는 머리를 밀어버리고 암환자가 되는 그 심정은, 또 말해 무엇하랴. 항암약은 암세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엄마 몸의 건강한 다른 세포들도 죽인다. 그래서 엄마의 몸은 여기저기 고장이 난다. 그런 고장을 메꾸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약들을 우걱우걱 먹는다. 설사를 하면 설사약, 변비가 심해지면 변비약, 울렁거리고 소화가 안되면 위장약을 먹고, 식욕이 떨어지면 식욕을 돋우어주는 약도 먹는다. 혈압 당뇨가 조절이 안되니 혈압약 당뇨약, 손발 저림이 심해지면 신경증 약, 아파서 잠이 안 오는 날이 이어지니 수면제는 필수다. 그 이외에 내가 모르는 약들도 수두룩하다. 그렇게 약으로 버티다 보면 대변에서도 약 냄새가 난다. 그 많은 약들이 엄마 장에 있는 균이라는 균은 모두 죽인 게다. 약이 엄마를 살리고 있는 게 맞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기도 하지만, 어쨌든 엄마는 그렇게 약을 먹기 위해 끼니를 챙겨 드셨고, 약으로 버티셨다.


나는 6월쯤 계약직으로 취직을 했다. 엄마는 스스로 식사를 챙겨 먹을 만큼은 되니 당신 걱정은 하지 말고 취직하라 하셨다. 간단히 일할 수 있는 계약직으로 일하며 아침저녁으로 엄마를 자주 들여다봤다. 엄마가 치료받던 대학병원은 엄마 집에서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엄마는 항암치료 가는 날도 혼자 걸어서 가고 끝나면 혼자 걸어서 집에 오셨다. 짬짬이 나와 남편, 형부가 함께해주었다. 


여름이 지나갈 때쯤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엄마는 혼자 항암치료받으러 병원에 가셨다. 나의 퇴근시간이 다가올 무렵,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항암치료가 끝났는데 오늘은 너무 힘들어 혼자 집에 못 가겠다고 하셨다. 병원에 앉아 나를 기다리겠다고 하셨다. 도움 청할 누군가를 찾아 병원으로 보내줄까 물었더니 엄마는 굳이 나를 기다리겠다고 하셨다. 부산 떨고 싶지 않으셨으리라. 다른 누군가에게 폐가 되고 싶지도, 지친 당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으셨으리라. 나는 6시 정각에 칼퇴근을 하고 헐떡이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정문이 닫힌, 불 꺼진 병원복도. 겨우겨우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는 엄마의 그 모습이, 나는 사진처럼 기억에 박혀있다. 엄마는 내가 올 때까지 족히 1시간 반은, 그렇게 앉아있었으리라. 핏기 없는 얼굴에, 소금에 푹 절여진 배추처럼 무겁고 매가리 없는 몸을 겨우 고쳐 세워 앉으며 엄마는 나를 기다렸으리라.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나는 잠시 정지된 것처럼 서 있었다. 매여오는 목에 꾸역꾸역 침을 삼키며 나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의 손을 잡고 팔짱을 꼭 낀 채, 고작 10분 거리의 집을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집으로 갔다. 

엄마는 그렇게 참으로 담대히 그 시절을 견뎌내셨다. 그 고통의 시간들을 엄마는 무던히 견디어내셨다. 참으로 잘 견디어내셨다. 


2016년 설. 엄마는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서 한 시간 정도 바닷가를 걷고, 조개찜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올 만큼의 체력이 되셨다. 머리가 소복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난 엄마의 머리는 유난히 까맣고 두껍고 힘 있는 머리카락이었다. 엄마의 몸은 차례차례 회복되어갔으나, 불면증은 계속되어 두 시간 이상 잠들기 어려우셨다. 손발 저림도 점점 심해지셨다. 그래도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그 고통의 시간을 다 겪어냈음에 뿌듯해하시며, 엄마는 중단했던 성당 봉사활동에 매진하셨다. 2017년, 2018년, 우리 가족은 여행도 자주 다녔다. 지금 돌이켜보면 해외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쉽지만, 그래도 엄마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끽하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2019년, 엄마는 여전히 바쁘고 씩씩하게 지내셨지만, 조금씩 체력이 떨어지셨다. 병원에서는 백혈구 수치가 점점 떨어진다고 염려했다. 그래서 백혈구 수치를 올리려면 어찌해야 되느냐고 물으면 방법이 없다 했다. 잘 먹고 잘 자야 한다고 했다. 보약도 챙겨 드시고, 컨디션 관리에 애를 쓰셨지만 백혈구 수치는 계속 떨어졌다. 그렇게 봄이 되었다. 유방외과 담당교수가 혈액내과로 연결해주었다. 그런데, 혈액내과 교수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길 왜 왔냐며 되물었다. “수치가 낮긴 하지만 그렇다고 백혈병이면 이렇게 못 걸어 다니시지 않겠어요?”라며 비아냥거렸다. 몇 달 후에 다시 보자며 다음 진료 예약을 잡아주었다. 하지만 엄마와 나는, 성의 없는 교수의 말과 행동에 마음도 상하고, 걱정이 병을 더 만들겠다 싶어서 다음 진료는 가지 않았다. 몇 달 후, 엄마의 당뇨 관리를 해주던 내분비내과 교수가 크게 염려하며 다시 혈액내과로 연결해주었고, 그제야 혈액내과에선 골수검사를 하자 했다. 그때는 12월 초였다. 긴급으로 골수검사를 했다. 두렵고 잠 못 이루는 밤들을 보내고, 그날이 왔다.


그날은 201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우리는 그날, 또 한 번 무너졌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나의 둘째 언니와 엄마는 병원에 함께 갔다. 엄마의 병명은 골수이형성 증후군이었다. 엄마의 혈액 안에 암세포가 있단다. 혈액암. 백혈병 전 단계라고 의사는 설명해주었다. 암세포를 없앨 수는 없고, 백혈병으로 가는 시간을 늦춰주는 치료 정도라고 했다. 당장 입원하셔서 치료를 시작하자고 했다. 무심하게 여길 왜 왔냐고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말하던 그 교수가, 참으로 친절하게, 차분차분 책자에 설명을 적어가며, 긴급하고 절박하게 하루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왜 좀 더 일찍 엄마의 병을 알아차려주지 않았는가. 수치가 낮긴 하지만 백혈병이면 이렇게 못 걸어 다니시지 않겠냐며 비아냥거릴 땐 언제고, 고작 몇 달만에 엄마의 병이 백혈병 전 단계라니. 이 사람들이 의사이긴 한 것인가. 


나는 그 전, 10월에, 드디어 엄마 집 윗집에서의 전세살이를 끝내고 둘째 언니가 사는 동네의 작은 빌라로  이사했다. 내가 떠나자마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드디어, 낡았으나 깨끗한, 엄마의 손때가 가득한, 애증이 뒤섞인 엄마의 전재산인 다가구주택을, 부동산에 내놓으셨다. 일사천리로 매수인이 나타났고,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끝내 잘 마무리되어 이사 날이 코앞이었다. 드디어 성당 앞 번듯한 아파트에 입성하기 며칠 전, 엄마는 혈액암이라 진단받으셨다. 이사를 마치고 입원하겠노라 엄마는 교수에게 말했다. 이사를 잘 마치고, 고작 이틀 밤을 아파트에서 보내시고, 2019년 12월 30일. 엄마는 경*의료원에 입원하셨다. 


엄마는 2019년 연말과 2020년 새해를 병원에서 맞이하셨다.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고, 면역력이 떨어져서 생기는 여러 가지 병들을 견뎌내시며, 무균실과 암병동, 피부과 일반병동을 오가며 엄마는 버텨내셨다. 1월 말이 되자,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19가 우리나라에 넘어왔다. 전 세계가 역병을 앓기 시작했다. 퇴원해도 엄마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성당 앞 아파트로 이사 가면 매일매일 새벽 미사를 보겠노라 설레 하시던 엄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한 번도, 성당에 가지 못하셨다. 다시 벚꽃이 피고, 나의 생일이 돌아올 때쯤, 엄마는 또 한 번의 골수검사를 하셨고, 백혈병으로 진행되었음을 진단받았다. 이제 백혈병 항암이 시작된다. 백혈병 항암은 아주 악명 높다. 엄마는 유방암 때의 항암 기억이 있어 그 무시무시한 항암을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의사는 저강도 항암을 하자 했다. 항암을 시작하고, 유전자 검사로 새로운 희망도 발견하였다. 장염이 와서 매우 고단해하셨고, 기저귀 차는 걸 받아들이셨다. 하지만 장염이 나아지자 곧 기저귀를 떼셨다. 폐렴이 왔다. 곰팡이성 폐렴이라 쉬이 낮지 않는다고 교수는 전했다. 곰팡이균을 죽이는 항진균제는 독하다. 그래도 잘 견디어내셨다.

 

여름의 한가운데. 2020년 8월 14일. 의사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주. 전공의들은 본격적으로 파업에 돌입하기 위해 병상의 반 이상을 비웠다. 내일 죽을 환자 아니면 다 퇴원시켰다. 6주 만의 퇴원이라 엄마는 반갑게 퇴원하셨다. 하지만 엄마의 폐렴은 퇴원할 상태가 아니었다. 퇴원한 날 밤부터 엄마는 열이 났다. 주사약 항생제를 먹는 약 항생제로 바꾸고 경과를 지켜본 후 퇴원시키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주치의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엄마를 퇴원시켰다. 엄마는 내내 고열에 시달렸다. 계속 괜찮다 하셨다. 괜찮을 거라 하셨다. 부산 떨고 수선 떨면 짜증을 내셨다. 그 고열 중에 엄마는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오시다 넘어지셨다. 많이 아파하시고 헛소리를 하셨다. 마침 혈액내과 외래진료가 잡힌 날이라 둘째 언니와 엄마는 병원에 갔고, 바로 입원하셨다. 고관절 골절이란다. 속히 정형외과 수술을 잡으려 했으나, 엄마의 폐렴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하루하루 엄마의 숨소리가 달라졌다. 코로나 19가 심각해지면서 간호간병 병동은 하루 한번 보호자 면회도 중지했으나, 수간호사가 보호자를 찾았다. 상주하셔도 된다며 보호자 침대까지 가져다주었다. 엄마의 폐는 죽어가고 있었다. 숨 쉬는 것이 엄마에겐 얼마나 고통일까. 쌕쌕 거리는 엄마의 거친 숨소리가, 듣는 내가 다 아팠다. 


그렇게 엄마는 말이 어눌해지고, 죽을 다섯 숟가락 삼키는 것도 힘들어하시게 되고, 이내 말하는 것도 힘들어지시고, 눈만 겨우 뜨시다가, 눈을 뜨기도 힘들어지시고, 그러시다 끝내, 그 고통스러운 숨쉬기를 멈추셨다. 전공의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병원에서, 당직은 교수들의 몫이었다. 마침 그 날은, 엄마의 담당교수가 당직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그 교수가, 당장 입원하셔야 된다고 말하던 그 교수가, 엄마에게 직접 사망선고를 하였다. 2020년 9월 7일 월요일 새벽 4시 6분. 여름이 끝나가고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엄마는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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