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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Nov 23. 2020

마지막 1주일

엄마가 마지막으로 입원하신 후,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엄마의 담당교수가 보호자를 찾았다. 둘째 언니가 교수를 만났다. 교수는 말했다. ‘어머니께서 이번엔 퇴원하시지 못하실 것 같아요. 아마도 입원 중에 돌아가시게 될 거 같습니다.’

그때 엄마의 상태는 고관절 골절로 골반이 내려앉아 허리를 들기는커녕 뒤척이는 것도 힘들어하셨고, 소변은 소변줄로 빼고, 대변은 기저귀를 차셨다. 입이 계속 말라 발음이 어눌하긴 하였으나 의사표현을 하시고, 우리를 모두 알아보셨다. 식사는 거의 못 드셨다. 죽을 겨우 떠드리면 세 숟가락, 네 숟가락, 그러다 먹기 싫다며 짜증을 내셨다. 고관절 골절은 수술을 할 수 없으니, 극심한 통증을 견디고자 마약성 진통제만 계속 맞았다. 폐렴은 항생제를 계속 맞았으나, 항생제가 전혀 말을 듣지 않는 마지막의 마지막 상태가 되었다.

나는 그때, 3개월짜리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의사의 말을 언니에게 전해 듣고, 나는 그다음 날 바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의 계약기간이 아직 보름 정도 더 남았으나, 3개월짜리 계약직의 계약기간을 채우는 것보다 엄마의 임종을 지키는 것이 나에겐 더 중한일이었다. 함께 일한 상사는 안타까워하며 나의 마지막을 배웅해주었고, 나는 엄마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둘째 언니도 재택근무 중이라 번갈아 가며 엄마의 병실을 지켰다.

엄마는 점점 숨 쉬는 걸 힘들어하셨다. 엄마의 폐는 염증세포들이 가득 차 온전히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산소포화도가 쭉쭉 떨어졌다. 그 상태가 되니 간호사실 옆의 집중치료실이라는 곳으로 엄마는 옮겨졌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기계들이 있는 곳이었다. 엄마 몸에 수많은 기계 줄이 달렸고, 의료진들은 그래프와 숫자들이 가득한 모니터로 엄마의 상태를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담당교수는 아직 엄마가 의식이 있고, 자의적인 의사 판단을 할 수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길 원했다. 의향서를 작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위급상황이 오게 되면, 의사는 환자를 중환자실에 옮겨야 하고, 중환자실에 가게 되면 그곳에선 엄마를 살게 하는 치료가 아니라, 그저 엄마를 죽지 않게 할 뿐인, 치료를 하게 된다. 인공호흡기를 끼고, 심폐소생술을 하고, 엄마의 뇌가 망가지고, 장기가 망가져도 엄마는 죽을 수 없다. 엄마는 건강하셨을 때부터 그런 치료를 절대로 절대로 원치 않는다고 자주 말씀하셨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더욱 절실히 그에 대한 의사표현을 하셨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마가 건강하셨을 때의 얘기다. 엄마의 생이 며칠 남지 않은 이 순간, 엄마는 혹여나, 더 살고 싶지는 않을까. 혹시나 이대로 엄마를 보내면 엄마가 서운해하진 않을까.

나는 엄마가 잠깐 눈을 떴을 때, 마음을 굳게 먹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가 만약에 지금보다 더 힘들어져서 엄마가 엄마 스스로 숨 쉴 수 없는 때가 오면, 엄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더는 애쓰지 않고, 하느님 곁으로 가고 싶어? 아니면 조금 힘들더라도, 엄마가 조금 더 숨 쉴 수 있게 엄마 몸에 기계를 달고 인공호흡기로 숨을 쉬게 하고, 혹시나 엄마의 심장이 멎게 되면 엄마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기 위해 심폐소생술도 하고, 이런 거 엄마에게 해줬으면 좋겠어?’ 이 기막힌 질문에 엄마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정확히 말씀하셨다. 나는 담당교수를 불렀다. 엄마는 의료진 앞에서 직접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하셨다. 이제 엄마에게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는 엄마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엄마를 고이 보내 드려야 한다.


집중치료실로 옮기자 엄마는 조금 놀라신 듯했다. 여기가 어디냐, 중환자실이냐 물으셨다. 중환자실 아니고 간호사실 옆 치료실이라고, 이곳에서 간호사들이 더 자주 엄마를 들여다봐 줄 거라고, 놀라지 마시라고, 내가 여기 엄마 옆에 내내 있을 거라고 엄마를 안심시켰다. 이제 엄마에게 더 이상의 병원식사는 나오지 않았다.

산소포화도가 계속 떨어지자 콧줄을 떼고 더 많은 농도의 산소를 엄마에게 주기 위해 산소마스크를 씌웠다. 엄마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눈을 뜨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의식은 있고 우리를 알아보긴 하시니,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이모를 만날 수 있게 해 드려야 했다. 엄마의 바로 위 언니, 엄마에게 엄마 같은 애정을 줬던 엄마의 언니, 팔순이 되신 이모가 너무 놀라실까 걱정되어, 이모부에게 전화를 드렸다. 엄마의 위독함을 알렸다. 코로나 19로 면회가 매우 까다로웠으나, 의료진은 면회를 허락해주었다. 엄마는 눈을 떠 이모의 손을 잡고, 꺼이꺼이 우는 이모를 오히려 달래셨다. 그러지 말아. 울지 말아. 미안해. 고마워. 눈을 마주치며 이모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셨다.

가까운 분들께 엄마의 위독함을 알렸다. 엄마와 성당에서 함께 봉사하시고, 레지오 활동, 구역 활동 모두 함께 하셨던 엄마의 절친, 엄마의 베프, 엄마의 단짝께 전화를 드렸다. 많이 우셨다. 나의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댁에도 알렸다. 엄마의 친정, 대구의 외삼촌께도 알렸다. 맘의 준비를 하고 계시라 전했다.


이모가 다녀가시고 난 뒤, 엄마는 그날 밤, 더욱 힘들어지셨다. 의사는 모든 가족들을 불러 임종의 순간이 왔음을 알렸다. 우리 4남매와 나의 남편까지 모두, 아침이 될 때까지 엄마의 병실을 지켰다. 다행히 엄마는 조금 더 버텨주었다. 이제 임종의 순간이 닥쳤으니, 신부님을 모셔와 엄마가 병자성사를 받으실 수 있게 해 드려야 한다. 간호사에게 사정사정 통사정을 했으나, 코로나 19로 가족들 이외에는 누구도 면회를 허용할 수 없다 했다. 그때는 8월 15일 광복절 집회 후, 코로나 19가 크게 확산되어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를 시행하던 시기였다. 간호사의 단호한 거절도 충분히 이해했으나, 나의 둘째 언니는 거듭 읍소에 가까운 사정을 했고, 담당 간호사는 신부님 딱 한 명만, 5분 면회를 허용해주었다.

밤새 병실에서 엄마 곁을 지키다 둘째 언니만 병원에 남고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 쪽잠을 자고 있었다. 둘째 언니의 전화를 받고, 나는 오뚝이처럼 일어나 성당으로 신부님을 모시러 달려갔다. 신부님은 그새 마당에 서서 기다리고 계셨다. 신부님께선 엄마의 현재 상태를 물으셨다. 눈을 못 뜨시고, 의식이 거의 없으시다고 전했다. 병원으로 달려가 엄마의 병자성사를 드디어 마쳤다. 큰일을 했다. 간호사에게 아주 많이 미안했고, 아주 많이 고마웠다.

엄마는 신부님이 다녀가신 후, 조금 편안해진 얼굴이셨다. 하지만 점점 더 위독해지셨다. 산소마스크를 했는데도 산소포화도는 계속 떨어졌다. 좀 더 고농도의 산소를 주입하기 위해 다른 산소마스크를 씌웠다. 혈압도 떨어지고 있었다. 혈압을 올리는 승압제도 달았다. 몇 시간이 지나도 별 변화가 없자 승압제의 양도 높였다.


해가 지고 다시 밤이 왔다. 엄마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염증이 더욱 심해졌는지 숨소리에 가래소리가 가득했다. 엄마는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나와 둘째 언니가 병상을 지켰다. 승압제가 실력 발휘를 하는 것인지 혈압 떨어지는 속도가 조금 주춤해졌다. 간호사가 동공반사를 보고 갔다. 어떠시냐고 물으니 거의 반응이 없다 하였다. 동공 반사로 뇌기능을 판단한다는데, 동공반사가 거의 반응이 없단다. 엄마의 뇌는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혈압이 떨어지면 혈액이 장기로 돌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엄마의 장기들도 점점 제 수명을 다해가고 있는 것인가.


자정이 넘어갔다. 둘째 언니와 나는 번갈아 쪽잠을 잤다. 잠깐 눈 붙이다 깨면 엄마의 혈압, 산소포화도 등의 숫자들을 보고, 다시 눈을 감고, 금세 또 눈을 떠 엄마 얼굴을 한번 들여다본다. 불현듯 생각이 나, 엄마의 병원 짐에서 묵주를 찾아내 엄마 손에 쥐어주었다. 엄마 사랑해, 엄마 많이 힘들지, 엄마 사랑해, 엄마 너무 고마웠어, 엄마 미안해, 짜증내고 화내서 미안해, 아픈데 너무 아픈데 참으라고만 말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 나와 둘째 언니는 엄마 귀에 대고 수없이 반복해서 말했다. 그러다 다시 잠이 들고, 다시 깨면 수치들을 확인하였다.


갑자기 모니터의 그래프가 요동을 친다. 둘째 언니를 깨운다.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큰언니한테 전화를 했다. 지금 당장 뛰어오라고 말했다. 모든 수치들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뚝뚝 뚝뚝 떨어졌다. 수없이 생각하고 수없이 준비했던 순간인데, 그래프보다 더 많이 내 심장이 요동친다. 장난감을 사주지 않아 떼를 쓰던 어린아이처럼 엄마 가지 마, 엄마 안돼, 엄마 아직 안돼, 말하며 발을 동동 구른다. 그래. 발을 동동 구르게 되더라. 그 순간엔 정말이지, 날 두고 가지 말라며 엄마를 붙잡고 발을 동동 구르게 되더라.

당직을 서던 담당교수가 왔다. 기계를 멈추고 사망선고를 한다. ‘우**님, 2020년 9월 7일 4시 6분 사망하셨습니다.’

동생과 남편이 왔다. 조금 늦게 큰언니까지 모두 도착했다. 하지만 엄마는 이미 떠났다.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엄마의 심장은 멈췄으나 귀는 아직 열려있으리라. 엄마 편히 가. 엄마 걱정 마. 엄마 사랑해. 엄마 잘 살아볼게. 엄마 정말 고마웠어. 정말 정말 아주 많이 사랑해.


엄마의 몸이 식어간다. 핏기가 빠져 육신의 색이 사라진다. 


간호사들이 들어와 기계를 정리한다. 고관절 골절로 뒤틀려있던 엄마의 다리와 허리를 제대로 펴준다. 얼마나 아팠을까. 생이 끝나고 나서야 엄마는 다리를 온전히 폈다. 이제 엄마는 더 이상 고통 없는 곳으로 갔으려나. 간호사들이 기계들과 의료도구들을 정리하고 엄마의 얼굴에 흰 천을 덮어준다. 퇴원수속과 수납을 하라고 안내서를 준다. 엄마의 병원 짐들을 정리했다. 장례식장에서 직원이 왔다. 엄마를 모시고 긴긴 병원 복도를 지나 장례식장 안치실로 간다. 새벽이 밝아오고 해가 뜨고 있었다. 성당 연령 회장님께 전화해 엄마의 선종을 알렸다. 바로 새벽 6시미사에 선종 미사 봉헌을 하겠노라. 곧 장례식장에서 보자 하셨다. 이모와 친척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엄마의 베프에게도 전화를 드렸다.

월요일 새벽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엄마의 장례를 잘 치러내야 한다. 엄마의 꽉 찬, 3일간의 장례일정이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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