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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Nov 25. 2020

장례 첫날

봄쯤이었나. 엄마와 병원에서 도란도란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근데 엄마, 엄마는 엄마 죽고 나면 제사해줘? 제사상 아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줘??’ 엄마는 그딴 거 필요 없다 하셨다. 엄마는 혈액암 진단받고 난 뒤, 조금만 기운이 나시면 수의를 맞추러 가자는 말을 하셨었다. 우리는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엄마는 그런 거 맞춰 놓으면 더 오래 산다 하니 서운해 말고 맞추자 하셨다. 영정사진도 찍어두자 하셨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미리 준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이따금씩 그런 말을 하셨다. 그래서 엄마에게 제사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분위기 잡고 진지하게 물을 일도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엄마와 내가 늘 나누던 소소한 수다에 섞어 자연스럽게 물어봤다. 엄마는 제사는 전혀 필요 없다 하셨다. 엄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결혼 후에 세례를 받으셨고, 삶이 퍽퍽하고 고단할 때는 도무지 여유가 없어 미사만 겨우 보셨으나, 우리 4남매 모두 세례를 받게 하셨다. 자식들이 성장해 각자 밥벌이할 때가 되고 여유가 생기시니, 엄마는 레지오 활동, 구역장 활동, 연령회 활동까지 매일매일 바쁘게 성당 봉사 활동에 열심이셨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다들 각자의 삶을 사느라 엄마와 같이 미사 보러 가는 자식은 4남매 중 나뿐이었다. 엄마는 제사상은 필요 없고 기일에 꼭 4남매 모두 모여 함께 미사 드리고 맛있는 밥 사 먹으라 하셨다. 본인이 생전에 챙기지 못한 자식들의 신앙생활이 안타까워, 본인 떠난 후에 그렇게라도 성당문 턱 한번 넘게 하려고 하시는 당부이시리라. 그래도 돌아가시고 난 뒤 1년 된 기일은 제사를 하는 거라는데 엄마는 그것도 하지 말라 하셨다. 그러면서 덧붙여 엄마는, 당신의 장례절차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숨이 끊어지면 제일 먼저 누구에게 전화하고, 장례미사는 어떻게 하고, 장지까지 함께 가주시는 교우분들께는 간식을 챙겨드리고 성의표시로 얼마 정도 드리면 된다는 것까지 설명하셨다. 그런 자세한 절차까지 다 들으려고 꺼낸 얘기는 아니었는데, 엄마는 날 붙잡고 A부터 Z까지 설명하셨다. 내가 적당히 엄마의 이야기를 끊었다. ‘엄마, 어차피 지금 이렇게 나한테 설명해도 나 까먹을 거 같아.’ 그러면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엄마의 상태가 위독해지시고, 담당교수가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우리는 엄마와의 긴 대화가 이제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엄마가 유서 비슷한 거라도 써놓지 않았을까 싶어 엄마의 병원 짐과 엄마 집의 서랍장 옷장 주방까지 열심히 살폈다. 엄마는 평상시에 가계부도 쓰셨고, 일기도 가끔 쓰셨었다. 글로 써 남기는 걸 자주 하셨으니 분명 무언가 써놓은 것이 있을 것이었다. 동생이 한번 살피고, 내가 다시 한번 살피고, 남편까지 또 살피고, 집을 온통 다 뒤집어 보았으나 없었다. 병원 짐에도 없었다. 그래도 분명 있겠지 싶어 책 사이사이, 수첩 사이사이까지 모두 살폈다. 그러다 둘째 언니가 엄마 병원 짐에 있는 기도 수첩 안에 깊숙이 접혀 보관되어있던 노트 종이 3장을 발견했다. 봄에 나와 나누었던 장례절차에 대해 엄마는 그날 말씀하셨던 그대로 다 적어두셨다. 내가 까먹을 거 같다고 하니 엄마는 아마도 그 날 이후 어느 날 때쯤, 기력이 있으실 때, 써놓으셨는가 보다. 아주 상세히, 휴대폰에서 찾으면 다 나올 전화번호까지 꾹꾹 눌러 적어두셨다. 


덕분에 엄마의 장례절차는 수월했다. 결정하고 고민해야 되는 순간도 필요 없이, 우리는 엄마의 노트 내용대로 하나씩 진행해가면 그뿐이었다. 장례식장 안치실에 엄마를 모셔두고, 장례식장 사이즈를 둘러보고, 수의, 관, 차량 등을 정했다.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세상에서 가장 입기 싫었던 이 옷을, 3일 내내 입고 있어야 한다.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상황이었다. 상주들과 조문객들, 도우미분들까지 포함해서 접견실에 50명 이상 모일 수 없었다. 자리는 지그재그식으로 교차해서 앉아야 한다. 이런 안내사항들과 함께 여러 가지 주의사항들을 직원에게 전해 듣고 서명을 했다. 납골당은 6월쯤에 천추교 추모관으로 정해 예약을 다 해놓았다. 엄마도 예전에 봉사 활동하시며 가보셨던 추모관이었다. 엄마의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을 열심히 찾는데 도무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엄마가 영정사진 미리 찍어 두자 했을 때, 그때, 예쁘게, 좋은 사진관 가서 미리 찍어둘걸.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다 소용없다. 마음에 안 들어도 최대한 고르고 골라 제단에 세워놨다. 성당 연령회 회장님과 회원분들이 오셨다. 엄마의 절친 아주머니도 일찍 도착하셨다. 아주머니 얼굴을 보니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성당분들 모두 많이 우셨다. 친구야. 언니야. 형님. 모니카. 저마다의 호칭으로 엄마를 부르며 우셨다. 바로 연도를 시작하셨다. 연도는 천주교 장례예식 중 드리는 기도문이라 볼 수 있다. 마치 상여행렬에서 곡을 하듯이 정해진 음률로 읊조리는 기도문이다. 천주교에서는 연도가 장례 예절의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전 세계에서 이런 식으로 장례 기도문을 노래로 바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하니, 아마도 천주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때 한국의 전통 장례문화와 융합되어 탄생된 것이 아닐까 한다.      


정신 차리고 구석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앉아 부고 문자를 돌린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이니 조문 오기 불편하신 분들은 무리하지 마시라 당부의 말도 함께 전한다. 나는 현재 백수였고, 아직은 어린아이를 둔 애엄마들도 주변에 많고 하여 적당히, 적당한 선에서만 부고 문자를 돌렸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댓바람부터 전해진 부고 문자에 적잖이 놀란 친구와 지인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참아지지 않는다. 조문 오지 못한 지인들이 문자로 위로를 전하고, 조의금을 보내온다. 고마운 마음들, 미안한 마음들. 눈물이 쏟아지지만 울 시간이 없다. 할 일이 많다.


도우미분들이 도착하시고 음식을 정한다. 친척분들이 돌아가면서 전화하시면 돌아가면서 열심히 전화를 받고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전해드린다. 연령 회장님과 자세한 장례절차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장례미사는 원래 발인하고 성당으로 가서 모시는데 코로나 19로 성당의 모든 미사가 중단되었다. 장례식장에서도 강당을 폐쇄하여 미사는 불가하다. 하지만, 조용히, 거리두기 수칙을 잘 지키고, 다른 호실 장례에 방해되지 않게, 적당히 잘 눈치 보며, 장례 둘째 날 신부님을 모시고 접견실에서 약식으로 장례미사를 하자 하셨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장례식장에서도 암묵적으로 허락을 해주셨다. 엄마가 장례절차에 대해 써놓으신 노트 3장의 반 가까이는, 코로나 19 때문에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장례미사마저 하지 못한다면 그 원통함을 어디에 풀어야 할까. 다행이었다. 내일 입관은 몇 시에 하고, 입관 예절 때 뭘 준비하고, 장례미사는 어떻게 하고, 미사예물 등등 연령 회장님이 착착 다 설명해주시고 진행해주셨다. 내일 몇 시에 오겠다 하시고 돌아가셨다. 감사합니다. 허리 숙여 깊이 감사 인사 전했다. 


오후가 되니 조문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남동생과 둘째 언니가 한 회사에서 오래 근무한 덕에 조문객들이 많이 와주었다. 코로나 19로 식사는 하지 않고 간단히 음료만 마시고, 마스크 쓴 채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급히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화환도 많이 들어왔다. 내가 직전에 3개월간 잠깐 일했던 회사의 상사에게 부고를 전했더니, 그 회사에서도 조화를 보내주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저녁이 되자 나의 합창단 언니 오라버니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오셨다. 나는 천주교 신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일주일에 한 번씩 노래하는 합창단에서 10년째 활동하고 있다. 나의 결혼식 때도 축가를 해주었다. 엄마는 매년 하는 연주회 때면 늘 보러 오셨었다. 그리고 매우 자랑스러워하시고, 매우 칭찬하셨었다. 그 합창단 단원들이 조문을 왔다. 코로나 19로 연습도 중단되고, 오래 못 봤던 언니 오라버니들. 엄마의 편찮음을 알렸을 때 함께 기도해주고, 위로해주고, 슬퍼해 주던 사람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언니들이 나를 깊이 안아주었고 함께 울어주었다. 함께 연도 바친 뒤, 식사하고, 서로의 근황을 전하며 오랜만에 모인 자리에서 회포들을 풀었다.


친구들과 지인들을 맞이하고, 울고, 그들을 배웅하고, 금세 밤이 되었다. 11시쯤 큰언니는 집에 가서 쉬겠다며 먼저 장례식장을 나섰다. 큰언니 집은 차로 10분 정도, 엄마 집보다 조금 멀지만 여하튼 가까운 근처 동네였다. 둘째 언니와 남동생이 장례식장을 지키고 나와 남편은 엄마 집에 가서 씻고, 눈 좀 붙이고 새벽에 와서 교대해주겠다고 시간을 정하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엄마 집에 왔다. 아. 엄마 집이다. 엄마가 없는 엄마의 집이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자마자 무너지듯 쓰러져 오열했다. 아마 아파트 옆집 윗집 아랫집 모두 놀랐을 것 같다. 정말이지 펑펑, 곡소리를 내며 울었다. 엄마가 없는 엄마 집에, 더는 엄마를 데리고 들어오지 못할 이 엄마 집에, 상복 차림을 하고  들어왔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엄마의 외래진료가 있는 날이면, 일찌감치 엄마 집에 와서, 엄마를 준비시키고 엄마와 함께 이 집을 나서고, 진료를 보고, 떠듬떠듬 힘겹게 걷는 엄마를 부축해 현관문 번호키를 누르고 집에 들어오던 그 일상들이 너무나 그리웠다. 계속 눈물이 났다. 이러다 정신 놓을까 싶어 남편은 나를 꼭 안아주었다. 맘을 다잡고,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왔다. 토닥토닥 마음을 다잡듯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리고, 엄마의 침대에 누웠다. 다시 펑펑 눈물이 난다. 참아지지가 않는다. 수도꼭지처럼 계속 눈물이 나온다. 나는 이따금씩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고 무너진 둑처럼 막아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가령, 취업이 힘들어 자존감이 바닥을 쳐도 할 수 있다 파이팅을 외치며 잘 버티다가도, 남자 친구와 헤어져 이 놈 저놈 쌍욕을 해대며 잊어보려 맘을 다잡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울음이 터져 몇 시간을 꺼이꺼이 울곤 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이 그런 상황이다. 그럴 만도 하지. 취업이 안 되는 것 따위, 남자 친구와의 헤어짐 따위가 엄마 잃은 장례 첫날의 절망과 비길까. 목놓아 울었다. 윗집 아랫집에서 시끄럽다고 뛰어온다 해도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엄마 잃은 장례 첫날이다. 그렇게 한 시간쯤 울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한 시간 내내 안아주고 등을 쓸어주었다. 이제 그만. 잠을 자야 하지 않겠니. 물을 한 컵 마시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다시 눈물이 쏟아진다. 


그때의 내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엄마가 없다는 것이, 나는 너무나 두려웠다. 어렸을 때,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린아이도 아니고 6학년이면 혼자 지하철도 타고 다닐 나이인데, 어이없게도, 옆 동네로 엄마 심부름을 갔다가 잠깐 한눈판 사이에 길을 잃었던 적이 있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갑자기 막막해지고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뗄 수 없어 얼음처럼 서서 꺼이꺼이 울었었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아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했다. 내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6학년짜리 다 큰 아이가 엄마 엄마 부르며 공중전화에서 엉엉 울었었다. 

지금의 나는 38살 성인인데, 마치 길을 잃었던 아이처럼 목놓아 울고 있다. 그때는 엄마가 내가 있는 곳으로, 날 찾아 데리러 와주었지만, 이제 엄마는 없다. 나에겐 엄마가 없다. 엄마의 온기 빠진 육신을 안치실에 모셔두고, 영정사진을 찾아 제단을 차리고,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세상에서 가장 입기 싫었던 그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나에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엄마가 없는 엄마 집에 와서야 온전히 실감이 났는가 보다. 


도저히 이대로 눈물이 멈출 것 같지 않아 둘째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와 얘기를 하면 마음이 나아질 거 같았다. 장례식장에서 잠깐 눈 붙이고 있던 둘째 언니는 한참 동안, 38살 먹은 동생을, 천천히, 차분히, 달래주었다. 다그치지 않고, 다 큰 게 대체 무슨 소란이냐며 핀잔 한마디 하지 않고, 그저 나의 울부짖음을 가만가만 들어주었다. 그러다 마음이 잔잔해졌고, 다시 엄마 침대에 누웠다. 남편은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가슴 위에 손을 얹고 토닥토닥해주었다. 


그렇게 엄마 침대에서, 엄마 냄새를 맡으며, 장례 첫날밤을 겨우겨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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