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치아 lucia Nov 27. 2020

입관

장례 둘째 날이다. 밤새 장례식장을 지킨 남동생과 둘째 언니가 집에서 좀 쉬고 돌아온 뒤, 아침에 큰언니까지 장례식장에 모두 모였다. 첫째 날 했던 예절대로 상주들이 모여 절을 하고 둘째 날 상을 연다. 오늘은 입관예절도 해야 하고 장례미사도 해야 한다. 아침을 든든히 먹어둔다. 도우미분들이 출근하시고, 음식이랑 음료수들을 넉넉히 준비해둔다. 10시쯤 되자 이모부와 사촌 언니, 형부, 오빠, 새언니, 그 자녀들이 모두 왔다. 팔순의 이모는, 슬픔이 너무 깊어 밤새 우시다 차마 장례식장에는 못 오시겠다 하셨단다. 자식 같은 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그 애통함은 오죽할까. 이모부와 사촌 언니가 많이 우셨다. 식사를 준비해드렸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오셨다. 인사드리고 식사 차려드렸다. 곧 성당분들이 오셔서 입관 준비를 해야 하기에 시부모님과 남편과 함께 이른 점심을 먹었다. 육개장에 밥을 말아 후다닥 먹었다. 장례 잘 마무리하거라 인사하시고 시부모님들은 일찍 자리를 뜨셨다.


성당분들이 오셨다. 연령 회장님도 오셨다. 일부는 장례식장에서 연도를 하시고, 일부는 입관 준비를 하러 안치실로 내려가셨다. 천주교에는 각 지역 본당마다 연령회라는 단체가 있어, 그 지역 신자들의 상이 나면 장례절차를 돈 한 푼 받지 않고 오로지 봉사로 함께해주신다. 입관절차도 장례지도사 자격증이 있으신 회장님과 총무님께서 염부터 입관까지 모두 직접 해주신다. 세상에 이런 봉사가 있다니, 정말이지 복되고 감사한 봉사와 헌신이다. 


안치실에 있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엄마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다. 입관이 끝나면 이제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을 테니, 엄마의 몸을 닦는 첫 과정부터 함께 옆에 있고 싶다고 총무님께 말씀드렸다. 처음부터는 보지 말고, 어느 정도 닦고 난 뒤 부르겠다 하셨다. 엄마가 평상시에 쓰시던 미사보를 챙겨드리고, 조화 들어온 것들 중에서 상태 좋은 것들을 골라 관에 넣을 국화로 챙겨드렸다. 그런데 엄마는, 평상시에 국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모양이 예쁘지 않다 하셨었다. 엄마와 함께 관에 넣어드릴 꽃인데, 그 꽃과 함께 태워지실 텐데, 엄마가 좋아하시던 빨간 장미도 함께 넣어 드리면 안 되냐고 총무님께 물었다. 왜 안 되겠냐며 얼른 사 오라 하셨다. 상복을 입고 뛰어나가 큰 길가에 있는 화원으로 갔다. 관에 넣을 꽃이라 포장 없이 재단만 하여 신문지에 말아 받고, 다시 뛰어 안치실로 들어갔다. 엄마의 시신을 마주했다. 둘째 언니와 남편과 함께 엄마의 시신을 보았다. 연령 회장님과 총무님께서 참으로 살뜰히 엄마를 살펴주심이 느껴졌다. 엄마는 생전에 총무님과 함께 연령회 활동을 하셨었다. 엄마가 백혈병으로 오래 성당을 나가지 못하시고, 가끔 총무님과 안부 전화를 나누실 때면, 엄마가 ‘나중에 나 예쁘게 보내줘. 잘 부탁해’ 라며 다정히 얘기하시던 게 생각났다. 그 나중이, 지금이 되었다. 언젠가 오겠지 했던 그 순간이 눈앞에 닥쳐와, 총무님이 직접 엄마의 몸을 닦아 주고 계셨다. 

결혼 후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시어 장례 때 함께 했었었다. 그때 염습과 입관 과정을 본 경험이 있다. 격식을 차리고 예의를 다하여 고인의 몸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과정이었으나, 어쨌든 모르는 이가 고인의 몸을 만지는 것은, 그렇다고 가족들이 직접 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뭔가 낯설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의 오랜 지기가 직접 엄마의 몸을 닦아 주고 있었다. 총무님과 연령 회장님, 그리고 함께해주시는 연령회 자매님 모두, 엄마의 몸을 닦으며, 수의를 입히며,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었다. 모니카 팔이 이렇게 얇았었나, 모니카 다리 많이 아팠겠어, 모니카 걱정 말고 가, 모니카 딸내미가 장미꽃 사 왔어, 장미 이쁘지, 모니카가 좋아하는 빨간 장미 한아름 안고 가. 성모님 얼굴 보이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성모님 쫓아서 가. 그렇게 계속,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었다. 


때마침 대구에서 외사촌 언니, 오빠가 왔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코로나 19로 먼길 오기 쉽지 않으셨으리라. 염습 과정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 이모부 가족들과 대구 외사촌 언니 오빠들, 남동생, 큰언니, 성당 구역분들, 레지 오분들까지 모두 안치실로 모이셨다. 엄마의 얼굴에 분칠을 해드리고, 엄마가 좋아하던 색을 직접 골라 립스틱도 발라드렸다. 성호를 긋고 입관예절을 시작한다. 함께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고, 엄마를 관에 모시고, 국화를 채워드리고, 엄마 가슴 위에, 엄마 손에 장미꽃을 쥐어 올려드린다. 다 함께 다시 성가를 부르며 엄마의 시신에 성수를 뿌려드린다. 함께 기도하고, 우리 4남매가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엄마의 임종 때, 스치듯 잠깐 눈물을 보였던 남동생이, 엄마의 관을 붙잡고 한참을 운다. 엄마의 아픈 손가락, 가장 애끓는 자식인 막내아들이 엄마를 쉽게 놓지 못한다. 등을 쓸어주었다. 관을 덮는다. 이제 영영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엄마, 관이 작지는 않아? 우리 엄마 키가 커서, 관을 큰 걸로 맞춰줄걸. 엄마. 꽃밭에 누워 잘 가. 내가 상복 치맛자락 붙잡고 후다다닥 뛰어가서 장미꽃 사 왔어. 그거 안고, 성모님 품으로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 엄마. 안녕.    

 

입관예절을 마치고, 장례식장 접견실로 서둘러 올라간다. 바로 장례미사가 시작된다. 이미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들께서 도착하시어 미사 준비를 마쳐두셨다. 그 바쁜 와중에 신부님께서 상주들과 다른 가족들의 고백성사까지 챙겨주셨다. 홀가분하고 정돈된 마음으로 장례미사를 드렸다. 코로나 19로 모여 앉지 않고 널찍널찍 접견실까지 지그재그로 앉아 조용히 미사를 진행했다. 이모부 가족들, 대구 외사촌 언니 오빠, 성당분들, 코로나 19로 초라하고 허전하지 않을까 싶었던 장례미사였는데, 더없이 복되고 풍성하게 마치게 되었다. 감사하고 과분할 따름이다.

미사를 마치고 신부님과 수녀님을 배웅하였다. 장례 잘 마치고, 미사 재개되면 성당에서 곧 보자 하셨다. 성당분들도 각자 인사 나누시고, 내일 출관 때 다시 오겠다 하시고 떠나셨다. 삼일 내내 성당분들이 매 순간 함께해 주신다. 엄마가 쌓은 덕을 우리가 다 돌려받는구나.


이모부 가족들과 대구 외사촌 언니 오빠에게 음식을 차려드린다. 작년 11월쯤, 대구의 큰외삼촌께서 선종하셨었다. 그때는 엄마가 아직 혈액암 진단을 받기 전이었으나, 몸이 쇠약해지고 계실 때였다. 내가 이사 나간 뒤 집을 파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잡음이 생겨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 잠도 잘 못 주무시고, 이래저래 몸도 마음도 기력이 많이 빠지신 상태였다. 거기에 큰외삼촌의 부고까지, 엄마는 그때 정말 많이 힘들어하셨다. 요양원에서 10년 가까이 지내셨던 큰외삼촌을 자주 들여다보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에, 엄마는 3일 내내 외삼촌의 장례를 함께하셨다. 그때 엄마가 많이 피곤해하시고, 식사도 잘 못하시고, 울기도 많이 우셨다며, 그래도 그때 너무 감사했다며, 외사촌 오빠의 새언니가 엄마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때 좀 더 챙겨드릴걸, 안타까워하며 울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 나도 함께 울었다. 

외사촌들 간에도 누구 결혼식, 누구 장례식이 아니면 이렇게 만날 일이 흔치 않다. 더구나 이렇게 역병까지 돌아, 대구에 그 난리가 났음에도, 카톡으로 소식 묻고, 엄마의 건강을 묻는 통화 몇 번이 겨우였다. 남편도 결혼식 이후 외사촌 언니 오빠들을 본 게 처음이었다. 이렇게 만난 김에 인사도 나누고, 아이들 소식도 묻고, 건강도 서로 살피며 회포를 푼다.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마음 잘 추스르라며 깊이 안아주고, 저녁시간 전에 자리를 나선다. 장례식장 밖까지 배웅해드렸다.


저녁시간이 되니 조문객들이 많아졌다. 남편의 회사분들도 오시고, 친구들도 왔다. 작년 12월까지 다녔던 회사의 동료도 와주었다. 연락하고 지낸 지 오래되어 부고를 전하기 미안했던, 친한 성당 언니가 건너 건너 소식을 전해 듣고 남편과 함께 와주었다. 그 언니의 남편과 연결된, 15년 전 근무했던 회사의 친한 언니까지 소식을 듣고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급히 달려와 주었다.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장례 잘 치르라 위로를 받고, 배웅했다. 

장례는 3일이긴 하나, 사실상 조문객을 받는 것은 둘째 날 밤이 끝인지라, 뒤늦게 알고, 어찌어찌하다 조문이 늦어진, 각자의 사정이 있는 조문객들이 늦게까지 드문드문 찾아왔다. 맞이하고, 엄마의 투병에 관해 이야기하고, 배웅하고, 이제는 익숙해진 그 루틴을 반복한다. 그래도 늘 눈물이 나고, 늘 고맙고,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오래 기억하고, 오래 갚아나가리라.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어젯밤 그렇게 울고 난 뒤, 성난 파도처럼 넘실대는 마음을 어찌 진정해야 되나, 계속 울컥했었는데, 입관예절을 하고 난 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엄마 얼굴에 곱게 분칠을 해드리고, 고운 옷 입혀, 꽃밭에 뉘어드리고 관을 덮고 나니, 엄마가 이제 정말 고통 없는 편안한 곳으로, 영원한 안식에 이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10년 20년 봉사활동하던, 오랜 엄마의 지기들까지 함께 모인 그 자리에서 함께 노래하고, 함께 기도하며 엄마를 보내드릴 수 있었음이, 더없이 복되고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도 엄마처럼 강하고, 바르게, 엄마가 살았던 것처럼, 엄마의 딸로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것이 내 삶의 좌표이고, 나침반이었다. 나는 엄마 딸이니까, 씩씩하게, 똑똑하게, 강하고 단단하게, 바르고 정직하게,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첫째 날처럼, 큰언니가 먼저 장례식장을 나서 집으로 갔다. 나와 남편도 먼저 엄마 집으로 가 쉬었다. 울지 않았다. 단정히 씻고, 단정히 머리 빗고, 푹 잤다. 

작가의 이전글 장례 첫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