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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Dec 02. 2020

발인-1

새벽에 일찍 장례식장으로 가 둘째 언니와 교대를 해주고, 장례식장을 정리했다. 새벽까지 남동생의 조문객들이 왔던 터라, 정리되지 않은 식탁을 정리한다. 남은 음식들 중 떡과 과일, 음료수를 조금씩 챙겼다. 주방세제, 슬리퍼, 가위, 집게, 포일, 랩 등등 장례식장에서 제공되는 물품들은 다 값을 지불하고 산 것들이기에 짐을 꾸려 챙겨둔다. 조의금 함도 정리하여 짐 깊은 곳에 잘 넣어둔다.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니 금방 아침이 되었다. 둘째 언니와 큰언니가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늦게까지 조문객들 맞이하고 장례식장에서 쪽잠을 자고 있던 남동생을 깨워 떠날 채비를 하라 일러둔다. 둘째 언니와 함께 장례식장 직원과 비용 정산을 마친다. 코로나 19로 조문객들이 술은커녕 식사도 잘 안 하고 자리를 뜨다 보니, 장례식장 수입이 영 신통치 않다며 가벼이 투덜거리신다. 가벼이 웃어넘기며 정산서와 서류들을 받아 챙기고 행정절차를 마무리한다. 엄마의 영정사진과 위패를 보자기에 싸 가슴에 안아 들고, 짐들을 차에 실어두고, 출관 예절을 시작한다. 남동생의 친구들이 출관을 도와주러 아침 일찍 도착했다. 성당 연령회 분들, 함께 봉사하시던 엄마의 오랜 지기들도 오셨다. 함께 출관 예절을 마치고, 엄마의 관을 장례버스에 안전하게 모셨다. 장지까지 연령회 총무님과 엄마의 절친 아주머니, 엄마의 대녀, 함께 활동하시던 분들 몇몇이 함께 가신단다. 코로나 19로 밀폐된 버스에 함께 타고 가는 것이 염려스러우셨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주신다고 하니, 감사하고 죄스러울 뿐이다.    

  

우리 4남매 중 유일하게 남동생은 아직 미혼이다. 엄마의 병이 깊어지고, 고통과 두려움이 엄마를 흔들어댈 때, 엄마가 버텨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자 힘은, 남동생의 결혼이었다. 남동생은 결혼 얘기가 오가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내년쯤에는 결혼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늘 우린, ‘엄마, 아들 장가가는 건 보고 가야지. 우리 엄마, 아들 결혼식장에 지팡이 집고라도 걸어 들어가려면 조금만 더 힘내야지.’ 라며 엄마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었다. 엄마도 늘 생각하셨다. 당신이 아직은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걸, 아직은 강건히 더 버텨야 한다는 걸, 엄마도 늘 생각하고 계셨었다. 봄쯤, 엄마가 퇴원하여 집에 계실 때, 남동생의 여자 친구가 엄마 집으로 와 간단히 다과를 함께 하며 인사를 드렸었다. 그때도 엄마는 많이 힘드셨던 상태라, 엄마가 그 아이를 본 건, 30분도 채 되지 못했다. 잠깐 그 아이를 보셨고, 손 한번 잡아보셨고, 소파에 앉아있기 힘들어하셔서 방으로 가 침대에 누우셨었다. 결국 엄마는 막내아들의 혼인을 축복해주지 못하고 먼저 떠나셨지만, 잠깐이라도 그 아이를 보고, 손잡아주고 가셨으니, 엄마의 마지막 가는 길이, 조금은 덜 무거우시리라 생각이 든다. 그나마 다행이다.     

남동생의 그 여자 친구도 장지까지 동행하고자 함께 버스에 올랐다. 출관 예절을 함께 해주신, 장지에 가지 못하시는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깊이 허리 숙여 절하고, 그분들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에 올랐다.      


장례버스가 출발한다. 장례식장을 지나, 병원 입구를 지나, 큰길을 지난다. 불과 20일 전, 엄마는 드디어 퇴원해 집에 가는 걸 반가워하시며 병원을 나서셨었다. 그리고는 4일 만에 다시 입원하셨고, 입원하시고 2주 만에 운명하셨다. 투병 초기에는 그래도 자식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서 병원문을 나오셨었는데, 그러다 휠체어의 힘을 빌려 퇴원하셨었고, 이제는 관에 누워 장례버스를 타고 병원을 떠나신다. 원통하고 애통함에, 출발하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이 동네에서, 경*대학교 앞에서, 30년을 사셨다. 20년쯤 장사를 하셨고, 본인 장사를 접으신 뒤로 몇 년쯤은 소일거리로 동네분들 식당일을 종종 도와주셨었고, 그러다 아주 손을 놓으셨다. 그렇게 벌지 않아도, 다달이 월세를 받고, 연금을 받고, 자식들에게 생활비를 받으며 충분히 생계가 가능할 만큼의 여유가 되셨었다. 그 여유를 고작 몇 해 즐기시고, 유방암 투병을 하셨고, 고작 몇 해 반짝 쾌차하셨다가 금세 다시 백혈병을 얻어 9개월 만에 생을 다하셨다. 그 세월들을 모두 보낸 동네였다. 그 동네의 골목골목 엄마가 다녀보지 않은 길이 없었다. 엄마와 함께 걸어보지 않은 길이 없었다. 엄마와 함께 수도 없이 걸었고, 마주쳤고, 달려가 손잡았고, 따라나섰던 그 길을, 이제 더는 엄마와 걸을 수 없다. 입을 막고 오래 울었다. 그 동네를 벗어나고, 동행해주시는 성당 아주머니들께서 기도를 시작하실 때쯤, 나도 울음을 그치고, 함께 기도했다.      


서울 추모공원 화장장에 도착했다. 서류접수를 하고, 대기를 하고, 고별실에서 엄마를 보내고, 유족대기실에 모여 화장이 끝날 때까지 1시간 반쯤 대기한다. 이 과정은 시간이 분단위로 예약되어 진행되는 과정이기에 천주교 예식을 하고, 슬픔에 오열할 짬이 주어지지 못한다. 대기하는 시간에는 함께 동행해주시는 성당분들의 간식거리와 음료를 챙겨드리고, 묵주기도 바치고 나니 금세 화장 종료 알림이 울렸다. 

수골실로 이동해 엄마의 유골을 받는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한 줌의 재다. 엄마의 육신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유골함에 담겼다. 아. 황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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