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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Dec 03. 2020

발인-2

다시 버스에 올라 화장장을 나선다. 마침 점심시간이다. 식사를 하러 다 함께 근처 식당으로 갔다. 성당분들과 모여 앉아 엄마의 이야기를 나눈다. 생전에 엄마가 건강하셨을 때, 가까운 성당분들의 장례가 나면, 엄마도 종종 장례일정에 동행하셨었다. 서울 추모공원 화장장에서 화장을 마치고, 장지로 길을 나설 때면, 늘 이곳에 들러 식사를 함께 하셨었다고 엄마의 절친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작년에 누구 돌아가셨을 때가 가장 최근이었지, 라며 그때의 이야기도 들려주신다. 엄마가 먹었던 갈비탕에 밥을 말아 후루룩 마시듯 먹었다. 엄마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보이시는 분도 있었다. 엄마가 30년 살았던 동네를 벗어나, 화장장 근처 식당에 왔는데, 이곳에서도 엄마와의 추억이 있다니. 앞으로 나는, 이곳에 있는 우리는, 얼마나 많이 엄마와의 추억을 더듬으며 살게 될까. 이제야 그 길이 겨우 시작인데, 벌써부터 먹먹하고 목이 멘다. 


다시 버스에 오른다. 평일이라 막힘없이 장지에 도착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비봉 103위 성인 추모공원이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제법 큰 추모공원이다. 천주교에서 하는 묘원이나 추모관은 자리가 넉넉하지 못하다. 지방은 그나마 여유가 있으나, 서울 근교는 몇 자리 남아있지 않다. 엄마가 수의를 미리 맞추자, 영정사진을 찍자 하실 땐 그런 것들을 미리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추모관은 달랐다. 서둘러 예약하지 않으면 먼 곳으로, 추모관 제일 꼭대기 자리 나, 가장 아랫단 자리도 겨우 얻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6월쯤 미리 예약해두었었다. 그때는 엄마가 이리 빨리 가실 줄 몰랐었다. 고작 석 달만에 엄마의 유골함을 들고 이곳에 오게 될 줄은 정말로 알지 못했다.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였기에, 추모관 안에서의 어떤 예식도 할 수 없었다. 원래는 버스에서 유골함을 들고 내려 추모관 입구에서부터 예식을 행하며, 기도하고, 연도도 바치고, 성가도 부른다. 이 모든 과정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스크 쓴 채로 조용히 유골함을 가슴에 품고 추모관으로 들어가, 봉안단에 엄마의 유골함을 모신다. 엄마가 20년쯤 집에 모셔두고 기도한 성모상과 십자고상, 묵주를 함께 넣어드린다. 봉안단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린다. 이곳이 이제 엄마의 집이다. 물론 엄마는 나의 마음속에도 있고,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도 있고, 내가 가는 곳 어디에나 엄마는 함께 하실 것이나, 엄마의 육신,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엄마의 육신은 이곳에 머문다. 추모관 2층의 해가 잘 드는 방이다. 이곳에서 엄마의 육신이 평안하길 기도한다. 자주 오리라 다짐하고 추모관을 나선다.     


다시 장례식장으로 이동한다. 가는 길에 시장하실까 싶어 오전에 미리 사둔 간식과 음료수를 버스에서 나눠드린다. 정중히 엄마를 모셔주시고, 장례가 생전 처음인 미숙한 유가족들에게, 화장장에서 서류접수를 도와주시고, 어디 가면 뭐가 있고, 어디 가면 경치가 좋으니 바람도 쐬고 커피도 한잔 하라며 친절히 알려주신 장례버스 기사님께도 간식과 음료수를 챙겨드렸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버스기사님은 떠나시고, 동행해주신 성당분들과 인사 나누고 배웅해드렸다. 우리는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를 타고 엄마 집으로 이동했다. 엄마 집에 들어와 각자의 조의금을 나누고, 짐을 정리하고, 큰언니는 집이 근처라 집으로 가고, 나와 둘째 언니는 엄마 집에서 쉬었다.      


월요일 아침에 시작된, 3일간의 꽉 찬 장례일정이 끝이 났다. 코로나 19로 성당의 미사가 중단되었기에, 삼우 미사는 Youtube로 함께 하고, 엄마의 추모관에 가서 우리끼리 조용히 삼우제 예식을 마치고 돌아왔다.     


모든 장례일정의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 4남매는 도무지 아는 것도 없고, 겪어본 적도 없어 허둥지둥할 만도 한데, 그럴 틈도 없이 성당분들이 함께해주셨고, 먼저 나서 주셨고, 하물며 버스기사님까지 우리를 챙겨주셨었다. 너무나 감사하고, 감지덕지했다. 이 은혜를 다 어찌 갚아야 할까.      


장례식장 도우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코로나 19 확진자가 나온 병원의 고인은, 그 병원 장례식장은 폐쇄되고, 확진자가 아닌데도 그 병원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장례식장을 이용할 때 매우 까다로운 절차와 검사들을 거쳐야 한단다. 성당의 경우도, 확진자나 접촉자가 있었던 성당은, 연령회의 모든 활동이 중단되어, 어떤 천주교 예식도 없이, 연도나 조문 행렬도 성당 측에서 엄중히 제한하여, 쓸쓸하게 고인의 장례를 치루기도 한단다. 그에 비하면 엄마의 장례는 이 시국에, 참으로 감지덕지하게 치른 장례였다. 조문도 많이 와주셨고, 연도도 바칠 수 있었고, 장례미사도 약식으로나마 가족들까지 모여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엄마가 적어둔, 노트 3장의 장례절차 중 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으나, 그래도 이만하면 되었다. 엄마도 충분히 아시고, 충분히 애썼다 하시리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일상으로 돌아가, 엄마가 살았던 삶을, 이어받아 살아내는 것이다. 엄마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모니카가 자식들 참 잘 키웠네, 라는 말을 엄마 영전에 바칠 수 있게, 엄마가 살았던 삶을 충실히 이어받아 살아내야 한다. 

이 다짐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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