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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Dec 08. 2020

멀리 있어도 멀어지지 않는다.

나에겐 간호사 친구 J가 있다. 정확히 친구는 아니고 세 살 어린 동생이다. 합창단에서 만났다. 근무시간이 항상 바뀌는 간호사 직업의 특성상 J는 합창단에 자주 나오지 못했다. 합창단 단원들은 연령대가 비교적 높아 내 또래 언니들도 별로 없었는데, 무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동생이 들어왔으니 나는 반가운 마음에 잘 챙겨주었고, 어쩌다 대화도 잘 통했고, 그래서 우린 합창단 밖에서도 자주 만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다 J는 이민을 준비하고자 다니던 대학병원을 그만두었고, 영어공부를 하고, 여러 가지 준비 끝에, 드디어, 2017년 봄쯤. 뉴질랜드로 떠났다. 

우리는 그녀가 뉴질랜드로 떠난 후에 오히려 더 많이 친해졌다. 애틋해졌다고 해야 할까. 늘 그녀를 생각하며 기도했고, 잘 지내고 있어야 할 텐데 염려되었다. 자주 카카오톡으로 대화했고, 메일도 자주 했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소통하고 마음을 나눴다. 2019년 6월, 그녀는 한국에 2주일쯤 머물렀고, 2019년 8월, 나와 남편이 여름휴가로 뉴질랜드에 다녀왔다. 우리는 더욱 돈독해지고, 서로를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엄마의 백혈병 투병이 시작되고 난 뒤, 나는 더 많이 그녀를 찾았다. 엄마의 병에 대해 물어보고 의논하고, 내가 ‘아’하면 ‘어’하고 알아들어주며, 그녀는 나에게 큰 위로이자 힘이 되어주었다.     

엄마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무렵, 의사가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난 어김없이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교통사고나 심각한 외상으로 수술 후 중환자실에 가게 되고, 환자가 그 고비를 잘 넘기고 회복하여 다시 일반병실로 옮기고 퇴원하게 되는 상황과 엄마의 상황은 분명 달랐다. 엄마는 중환자실에 간다고 호전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인공호흡기는 정확히 어떻게 엄마 몸에 숨을 넣어주고, 그것이 엄마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위험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해, 그동안 엄마는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지켜보게 될지, 그녀는 자신의 경력을 바탕으로, 조금은 건조하게, 일부러 더 그러는 듯, 냉정히 설명해주었다. 


엄마의 임종이 닥쳤을 때, 그녀는 마침 야간 근무 중이었다. 뉴질랜드는 한국과 시차가 3~4시간 정도이다. 그녀는 엄마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와 카카오톡으로 함께해주었다. 엄마의 몸에 연결되어 상태를 확인해주는 모니터의 숫자들이 어떤 의미인지, 경보음이 울리고, 숫자가 점점 떨어지고,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엄마 몸에서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는지, 그녀는 나에게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산소호흡기의 산소량을 확인해주었고, 승압제의 숫자를 확인해주었다. 그녀는 물리적인 거리는 멀리 있었으나, 엄마의 임종을 함께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중한 친구, 고마운 친구, 너무 많이 보고 싶다.



엄마에겐 엄마보다 두 살 많은 조카가 있다. 그러니까, 엄마의 큰언니가 결혼해 아이를 낳은 다음다음 해에 외할머니가 엄마를 낳은 것이다. 그 시절엔 결혼을 일찍 하기도 하고, 자녀가 많아 맏이와 막내의 터울이 큰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엄마보다 두 살 많은 조카가 있는 경우가 그다지 이상스럽고 신기한 일은 아니라고 엄마가 말씀하셨었다.

엄마의 두 살 많은 조카는 일찍이, 언제쯤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30년도 더 전에 일찍이, 미국으로 남편 따라 이민을 가셨다. 남편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시고 홀로 되셔서 아마도, 그 먼 타국에서 많이 고생하셨으리라. 이제는 자식들 다 결혼시키고 남은 여생의 여유를 즐기고 계신다. 


2019년 봄쯤, 엄마의 두 살 많은 조카분, 그러니까 나의 이종사촌언니는 오랜만에 한국에 귀국하시어 울진 고향집에 머무시다 엄마를 보러 서울에 오셨었다. 엄마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나와 남편, 둘째 언니와 조카, 남동생까지 함께 맛있는 한우도 드시고, 명동성당 구경도 하시며 알차게 서울 나들이를 하셨었다. 엄마가 정말 좋아하셨고, 두 분이 너무 애틋해하시며 손을 꼭 붙잡고 다니시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다시 미국 시애틀로 돌아가신 뒤, 언니와 엄마는 카카오톡 영상통화를 즐겨하셨다. 서로 많이 위로하시고, 말벗하시고, 옛날 얘기하시며 각자의 안부를 자주 확인하셨다. 엄마가 투병하게 된 후로도, 언니는 엄마에게 많은 힘이 되어주셨다. 시애틀과는 시차가 제법 있었지만, 노년의 두 여인은, 불면의 밤을 서로 함께해주며 서로가 서로를 버티게 해주는 듯했다. 


엄마가 떠나신 후, 언니는 많이 힘들어하셨다. 카카오톡으로 대답 없는 당신의 막내 이모를 부르며, 참 애타 하셨다. 일주일 전만 해도 통화했었는데, 어찌 이렇게 갈 수 있냐며 많이 애통해하셨다. 멀기도 멀지만, 코로나 19로 막힌 하늘 길, 그 마음 어떨지.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내가 카카오톡에 답을 해드리고, 엄마의 장례 후 추모관 봉안단 사진도 보내드리며, 언니와 자주 톡을 했다. 혹여나 상심이 크시어 병이라도 나시지 않을까, 많이 염려가 된다. 이따금씩 잘 지내시는지 안부 연락을 드려야겠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했다. 이 말은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 멀리 있기에 더 애틋하고, 애잔하다. 다가가 안아주고 손잡아 줄 수 없기에, 그 마음까지 글에 담아 한 자 한 자 적어 나누는 이야기들에는 깊은 사랑과 함께하지 못하는 미안함과 소중한 진심이 진하게 배어있다.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다. 멀리 있어도 멀어지지 않는다. 


그래. 엄마와 나도, 그렇다. 


엄마는 떠났으나, 엄마는 늘 내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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