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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Dec 11. 2020

아빠, 엄마의 남편

엄마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아빠는 아마도, 무언가가 많이 결핍된 가정에서 자란 것 같다. 아빠는 의심이 많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폭언, 폭행을 자주 했다. 엄마는 아이가 아파도 남편에게 말하지 못했다. 아픈 애를 등에 엎고 혼자 병원에 뛰어갔다. 멍청한 년, 등신 같은 년, 그런 폭언을 들으며, 엄마는 15년쯤 견디다, 이혼하셨다. 그리고 딸 셋을 혼자 키우셨다. 남동생은 너무 어리고, 귀한 아들이었기에, 데려올 수 없었다. 엄마는 식당을 하셨다. 경*대학교 앞에 터를 잡고, 대학생들을 상대로 점심, 저녁 장사를 다하셨다. 학교 가는 딸 셋의 아침과 도시락을 준비해놓으시고, 두세 시간 쪽잠 자고 일어나, 다시 또 점심 장사를 하셨다. 엄마는 참으로 고단하셨으리라.


아빠는 당신의 형제들과도 잘 지내지 못하셨다. 큰아버지댁, 작은아버지 댁 모두, 엄마와 오히려 더 자주 연락하셨다. 명절 때도 엄마는 큰집에 언니들과 나를 보냈다. 장사를 접으신 후로는 서로 자주 왕래하셨고, 경조사도 챙기셨었다. 당연히 언니들의 결혼식, 나의 결혼식에도 모두들 오셨었다. 

남동생은 군대를 다녀오고, 나까지 결혼한 뒤, 엄마 집으로 짐을 싸들고 들어왔다. 그전에도 자주 왕래하고 며칠씩 엄마 집에서 자고 가고 하였으나, 아예 주민등록까지 옮기고 엄마 집으로 왔다. 엄마는 어려서 키워주지 못한 애달픔을 담아 다 큰 아들의 밥상을 살뜰히 챙기셨다. 

언니들과 나는 아빠와 몇 년에 한 번쯤 안부전화를 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결혼할 때 되면 아빠를 모시고 상견례를 했고, 결혼식장에서 아빠 손잡고 신부 입장을 했다. 그때마다 엄마와 아빠는 만났었고, 다 늙어 이빨 빠진 호랑이었으니, 엄마는 예전처럼 아빠가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그저 머리가 많이 빠진, 애들 아빠일 뿐이었다.


남동생은 엄마의 투병소식을 아빠에게 전했고, 돌아가셨을 때도 임종을 알렸다. 남동생은 아빠가 조문하러 오시겠지 기대하는 눈치였으나, 나와 언니들은 아빠는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역시나 아빠는, 장례식장에 오지 않으셨다. 코로나 19가 좋은 핑곗거리였다. 


큰아버지댁, 작은아버지 댁 모두 조문을 오셨다. 장례 첫날, 첫 조문객으로 오셨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90살이 거의 다 되신 연로하신 어르신들인데도,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작은아버지와 함께 조문을 오셨었다. 엄마가 고생만 하시다가, 이제 좀 살만하니 병을 얻어 일찍 가셨다고 애통해하셨다.      


자식 넷을 함께 낳고 살았던 엄마의 남편은 조문 오지 않았다. 아무리 돌아서면 남남이라지만, 자식들의 어미이고 아비인데, 상복을 입고 슬픔에 잠겨있을 자식들의 등 한번 두드려줄 마음조차 들지 않나. 오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원망의 마음이 들었다. 

오히려 형과 동생이 제수씨와 형수님의 죽음에 애통해했다. 너희들이 고생 많았겠다며 90살의 큰어머니가 우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엄마의 조문객들이 엄마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하다. 고단했으나, 그 고단함을 알아주는 이들이 또 있었으니, 엄마의 세월이 조금은 덜 고단했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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