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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Dec 15. 2020

추석

추석이 되었다. 엄마 없는 첫 명절이다.     


엄마와 보내던 과거의 명절은,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었다. 시댁에 하루 다녀온 뒤로는, 명절이기보다는 푹 쉬는 연휴의 의미가 더 컸다. 엄마가 건강할 때는 엄마를 모시고 언니들과 여행을 가기도 했고, 여행을 못 가면 시내 구경, 영화를 보기도 하고, 맛집을 다녀오기도 하고, 서울 근교 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엄마는 혼자서 조촐하게 명절 음식을 준비하셨었다. 전, 잡채, 갈비찜 같은 음식을 금새 뚝딱 차려주셨다. 가끔 엄마는 큰집에 다녀오기도 하셨고, 친척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기도 하셨다. 우리에게 명절은 푹 쉬고, 맛있는 음식 먹고, 좋은 구경하고 오는 연휴였다.     


이제 엄마가 없다. 올해 설은 엄마와 함께 암병동에서 보내긴 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엄마와 함께 있었으니. 하지만 이제 엄마 없는 엄마의 집에서 우리끼리 명절을 보낸다.      


엄마는 본인이 떠난 뒤, 100일 동안 매일 미사를 봉헌해달라고 하셨다. 물론 우리가 100일 동안 미사에 매일 참석하진 못하지만, 그 미사에 참석한 교우들과 신부님 수녀님이 엄마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해주시니, 100일 미사의 의미는 매우 크다. 엄마의 말씀대로 우리는 100일 미사를 넣어드렸다. 추석 즈음에는 코로나 19가 안정되어 신자들의 미사 참석도 허용되었다. 우리는 연휴 첫날 엄마 집에 오자마자 미사 참석으로 연휴를 시작했다. 엄마의 절친 아주머니도 뵙고 추석 인사드렸다. 둘째 날에는, 모처럼 새벽 미사도 드렸다. 엄마는 성당 앞 아파트로 이사 가면 매일매일 새벽 미사에 갈 수 있겠다며 좋아하셨었는데, 결국 이사 온 뒤, 한 번도, 성당에 가보지 못하셨다. 엄마를 대신해 둘째 언니와 내가 새벽 미사를 보고 왔다. 성당 앞 아파트에 사는 호사스러움을 정작 엄마는 누리지 못하고, 우리가 대신 누리게 되었다.     


엄마의 짐 정리를 하나씩 시작했다. 당*마켓이 아주 유용했다. 엄마가 장염에 걸렸을 때 대량 구매해놓은 기저귀, 보행보조기, 링거대는 올리자마자 바로 팔렸다. 식품 건조기 같은 쓸만한 살림살이도 잘 팔렸다. 주방 수납장을 열어보니 엄마가 직접 만드신 매실액이 굉장히 많았다. 생각해보니, 엄마의 윗집에 살면서 출퇴근길에 엄마의 집에 들를 때면, 엄마는 컨디션이 안 좋았음에도 사부작사부작 계속 뭘 하고 계셨었다. 주워온 은행을 말리고, 까고, 이모가 준 잣 열매를 또 말리고, 까고, 매실 꼭지를 따고, 씻고, 뭐 그런 종류의 소일거리들을 TV를 보면서 능숙히 하고 계셨었다. 할 줄 모른다는 핑계로 나는 늘 소파에 앉아 엄마와 도란도란 수다만 떨다 오곤 했었다. 엄마의 그 소일거리들의 결실이 이제 와서 보니 냉장고며 주방 수납장에 꽉 차 있었다. 매실액은 요리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기에 두고두고 우리가 나눠 먹으면 되긴 하겠지만, 양이 정말 많았다. 맛이 좋아 성당 아주머니들께 나눠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았다. 엄마의 절친 아주머니께 전화드려 여쭤봤더니 가져오라 하셨다. 깨끗한 병을 사서 옮겨 담아 아주머니 댁에 가져다 드렸다. 오며 가며 성당분들께 하나씩 나눠주겠다고 하셨다. 마음이 뿌듯해지고 좋았다.


엄마의 남은 약이 정말 많았다. 퇴원할 때 처방해주는 약만도 한 가득이었는데, 막상 퇴원해서 2~3일 지나면 증상이 달라져 새로 처방받아 약이 바뀌는 경우가 매우 자주 있었다. 항암 후 혈액수치가 오를 때가 되었는데 계속 떨어지는 상황이 되면, 주치의는 그제야 찾아보고 처방약을 바꿔주기도 했다. 그러면 그전에 처방되었던 약들은 중복되는 약이 많아도, 헷갈릴 수 있으니, 그대로 폐기하고 새로 받은 약을 먹기 시작한다. 바로바로 버리지 못해 여기저기 쌓아둔 약들이 정말 많았다. 엄마는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피부에 결절 홍반과 괴저성 농피증 같은 질환도 생겼었다. 피부에 바르는 연고도 종류가 정말 많았다. 환자들은 혹시 모르는 상황이 생길까 하여 여분의 약들을 꼭 넉넉히 챙겨두곤 한다. 여분으로 챙겨둔 줄 모르고 또 받아둔 연고들까지 더해지니 20개는 되는 거 같았다. 보관해두었다가 우리가 나중에 피부질환이 생겼을 때 쓰기에는 처방받아서 쓰는 스테로이드성 연고가 대부분이라 위험할 듯싶었다. 타이레놀 정도의 진통제 몇 개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버리기로 했다. 모아보니 큰 쇼핑백으로 한 짐이었다. 약은 일반 쓰레기에 배출하면 토양이 오염된다기에 근처 약국에 가져다주었다.     


벌써 10월이 되었는데, 엄마의 냉장고엔 작년 김장김치가 많이 남아있었다. 백혈병 환자는 면역력이 떨어져 생김치를 먹지 못한다. 볶은 김치나 김치찜으로 익혀서 먹어야 한다. 백혈구 수치가 조금 올랐을 땐, 엄마의 입안에 구내염이 많이 생겨 매운 김치는 드시지 못했다. 이모께서 백김치를 조금씩 담아다 주시곤 하셨다. 엄마는 작년 연말에 입원하셨으니, 올해가 되고부터는 김장김치를 거의 못 드신 것이다. 엄마 집엔 따로 김치냉장고가 있지도 않아서, 김치가 아주 푹 익었다. 그 김치들을 우리가 각자 나눠 가져 가서 매일매일 밥반찬으로 먹기엔 올해가 다 가도 못 먹겠다 싶어서, 우리는 연휴 내내 매일매일 김치로 된 요리들을 해 먹었다. 김치 콩나물국, 김치 제육볶음, 김치전, 김치볶음밥, 두부김치 등등 엄마가 직접 담근, 엄마의 마지막 김치를 열심히 먹었다. 그러고도 남은 건 각자 집에 가져가 알아서들 볶아먹고 지져 먹기로 했다. 군내가 나기도 하고, 냉장고 냄새가 나기도 하는 묵은 김치였지만, 우리에겐 엄마의 마지막 김치였다. 이제 우리는 엄마가 담근 김치를 먹을 수 없다. 집에 가져와서도 알뜰히 부지런히 먹었다.      


작년 연말,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엄마가 짐을 많이 정리하고 오신 터라, 우리의 부담이 적었다. 수월하게 차근차근 정리가 되었다. 엄마는 나보다 키도 크시고, 어깨도 넓으셔서 옷 사이즈는 나보다 한 사이즈 정도 큰듯했으나, 내가 입어도 적당히 잘 어울렸다. 엄마는 원래 화려하거나 튀는 색의 옷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옷들이 다 우리가 입기에도 무난했다. 겨울 패딩과 여름 셔츠 몇 벌, 머플러, 장갑 등 각자 입을만한 것들을 챙겼다.     


추석 연휴 내내 날씨가 정말 좋았다. 미사도 보고, 자전거도 타고, 산책도 하고, 조카와 놀고, 짐 정리도 하고, 저녁엔 우리끼리 맥주 한 잔씩도 하고, 그러다 보니 연휴가 금방 지나갔다.      


엄마가 없는 엄마의 집에서 우린, 엄마의 영정사진과 위패를 모셔놓고, 엄마의 침대에서 자고, 엄마가 담근 마지막 김치를 먹으며, 엄마 없는 앞으로의 우리 삶에 익숙해져 보려고 부단히 애를 쓰며, 연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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