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일은 나와 남편의 결혼기념일이었다. 한 해 두 해 살다 보니 결혼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래도 10주년은 특별하기에 뭐 할 것 없을까 생각하다가, 사진촬영을 했다. 거실 소파 위에 걸려있는 10년 된 결혼사진을 이제 그만 보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요즘은 셀프사진관이 잘 되어있어 저렴한 가격에 전문가용 카메라로 어색하지 않은 사진을 얻어낼 수 있었다. 사진촬영을 마치고 맛있는 식사도 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서로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집에 돌아와서 이날 하루만큼은 서로 핸드폰을 내려놓기로.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거나 메시지가 오면 그때만 확인하고 내려놓았다. 유튜브를 본다거나 인스타를 하지 않았다. 함께 TV를 보고 음악을 듣고 이야기하고 집안일을 마쳤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핸드폰을 하지 않고 이야기하다 잠이 들었다. 제법 괜찮은 하루였다.
2013년 3월 2일 토요일. 나와 남편은 결혼했다. 엄마는 분홍저고리를 입고 화촉점화를 하셨다. 아버지도 물론 함께였다. 나는 결혼식 때 많이 울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왜 그리 많이 울었는지 잘 모르겠다. 친구의 축사를 들으며 눈물이 차올랐고, 내가 활동했던 합창단의 축가를 들으며 펑펑 울었다. 그래서인지 엄마도 많이 우셨다. 엄마한테 물으니 ‘네가 그렇게 우니까 같이 눈물이 났다’ 하셨다.
나와 남편은 신혼여행을 필리핀으로 다녀왔다. 나는 평소에는 양식이나 고기류도 잘 먹는데, 유독 해외여행만 가면 현지음식을 잘 못 먹었다. 한국에서는 피자 파스타 햄버거도 엄청 좋아하는데, 해외에선 도무지 된장찌개에 나물반찬만 오매불망 그리워지곤 했다. 신혼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바로 엄마 집으로 왔을 때, 엄마가 차려놓으신 한식밥상이 세상 눈물 나도록 맛있었다. 된장찌개, 고등어구이, 불고기, 나물반찬들은 여독을 말끔히 풀어주었다.
나는 결혼 후 엄마의 윗집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남편도 나도 큰돈을 모아놓지 못하여 결혼자금이 많이 부족했다. 건물주인 엄마에게 빌붙어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그렇게 5년 반 정도, 엄마 그늘 밑에서 편히 살며 열심히 돈을 모아,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올 수 있었다.
엄마의 윗집에 사는 건 다소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신혼 초, 동갑내기 부부답게, 남편과 나는 정말 많이 싸웠다. 불같은 성격을 가진 나와 온순하다가도 한번 고집을 부리면 대단한 황소고집인 남편은 서로 맞춰가고 익숙해져 가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 노력의 시간 동안 잦은 싸움은 필수였다. 물론 지금도 맞춰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싸움의 횟수가 줄어들고, 싸움의 방법이 진화하고, 화해가 좀 더 쉬워지고 있을 뿐이다. 신혼부부의 잦은 싸움에 아랫집 사는 엄마는 나설 수도 없고, 가만히 보고 있을 수도 없고, 도무지 가시방석이셨을 게다. 나와 남편도 큰소리 내어 속 시원히 싸우지 못한 채, 길거리를 헤매기도 하고 노래방을 가기도 하며 싸움을 이어나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습기도 하다.
한 번은 서로 조심히 싸우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큰 싸움이 났었다. 결혼 후 4년이 넘었을 때였다. 처음으로 엄마가 우리 집에 올라오셨다. 늦은 밤이었고, 옆집 앞집 뒷집에서 다 들릴 것 같다며 이제 그만 자중하라 하셨다. 나는 펑펑 울고 있었고, 남편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엄마는 남편과 나를 적당히 혼내시고, 말리시고, 진정시키시고 내려가셨다. 그다음 날 엄마가 나에게 보내준 톡이다.
띄어쓰기도 줄 맞추기도 엉망인 엄마의 톡이지만, 나는 세상 너무 든든하고 힘이 났다.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해요.’라고 하는 내게 엄마는 ‘뭐가 미안해. 살아가는 과정이지.’라고 하셨다. 그렇게 살고, 살아내어 결혼 10년이 되었다.
이제 더는, 이렇게 든든히 나를 지지해 줄 친정엄마가 없다. 이름뿐이었던 친정아버지조차 이제 나에겐 없다. ‘친정’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애절한 말인지, 새삼 느낀다. 나는 자존심 부리느라 싸우면서 잘 울지 않는 편인데, 엄마가 떠난 뒤 남편과 싸울 때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서러움이 북 받쳐 오른다. 싸우다 말고 엄마가 보고 싶다며 엉엉 울기도 한다. 그렇더라. 나는 이제 엄마도 없는데, 유일한 내편인 남편과 싸울려니, 그렇게 서럽더라.
엄마는 말은 저렇게 ‘혼내줄까’ 하셨지만, 남편을 매우 예뻐하셨다. 남편은 말수가 적고 진지한 편이다. 손이 야무지고, 허영심이 없다. 엄마는 남편의 그런 면을 순하다며 좋아하셨다. 임종의 순간에도 남편 손을 꼭 잡고 힘겹게 미소 지으셨던 엄마. 남편은 엄마가 해주셨던 삼계탕, 갈비찜, 떡국, 파전을 지금도 늘 그리워한다.
입춘이 지난 게 벌써 한 달 전이고, 어느새 경칩도 지났다. 이제 봄이다.
남편은 엄마의 냉이된장국을 좋아했다. 냉이는 뿌리 부분의 흙을 깨끗이 씻어 내는 게 좀 귀찮기도 한데, 남편은 장모님 냉이된장국을 그렇게 찾는다. 주말엔 냉이된장국을 해 먹어야겠다.
엄마, 우리 결혼 10주년이야.
그때는 정말이지, 단 한 번도, 10년 뒤 엄마가 없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나는 지금 엄마가 없네.
우리는 잘 살아. 지금도 자주 싸우고, 소리도 지르고, 팔뚝을 때리기도 하는데, 사는 게 이런 거지 뭐.
엄마의 응원은 너무나 든든하고 행복했어.
엄마의 톡은 이제 멈췄지만,
엄마의 응원, 나는 늘 느끼고 있어.
사랑해 엄마. 앞으로도 잘 살아볼게. 막내딸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