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피아노 스튜디오가 생겼다. 성인 대상으로 개인레슨을 진행하고 원하는 시간에 자유롭게 연습실도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다. 지나다니며 내내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지난 2월, 드디어 마음을 먹고 레슨을 시작했다.
나는 어릴 적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아니, 피아니스트는 너무 거창하고, 내 진로를 피아노전공으로 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초등학교 4학년, 엄마는 동네 피아노학원에 나를 보내주셨고, 나는 매우 즐겁게, 열심히 학원을 다녔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엄마는 빠듯한 살림에 긴 할부로 피아노를 사주셨고, 성당에 함께 다니던 지인을 통해 개인레슨도 받게 해 주셨다. 하지만 곧, 우리나라 전 국민을 사지로 내몰았던 IMF시대가 왔고, 나는 6개월 만에 개인레슨을 접었다.
만약 내가 천재라던지, 낭중지추에 버금가는 두각을 나타내는 재주가 있었다면, IMF시대가 아니라 전쟁이 난다 해도 피아노에 대한 열망을 접지 않았을 테지만, 나에게 그런 재능은 없었다. 엄마도 그걸 느끼셨을 거다. 그렇게 나는 5년 동안 연마했던 배움을 접었다.
그래도 배운 게 아깝진 않았던 것이, 중고등학교 내내 성당에서 성가대 반주를 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평일 미사 반주봉사를 하곤 했었다. 보람 있는 일이었고, 즐겁게 봉사했다.
성인이 되어 내 밥벌이를 하면서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했지만, 노는 게 바빠서, 저렴하지 않은 레슨비를 덜컥 결제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늘 미루고 미뤄왔었다.
결혼 후, 엄마 집에 유물처럼 모셔져 있던 피아노를 다른 곳에 기증하게 되었고, 피아노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팔자 좋은 백수생활이 안정화되자 피아노에 대한 열망이 다시, 뿜뿜 솟아났다. 버리지 못한 피아노책들을 들춰보며, 유튜브 동영상들을 찾아보며, 엄마가 좋아하시던 모습들을 생각하며, 나는 피아노를 다시 배워보기로 마음먹었다. 백수주제에 저렴하지 않은 개인레슨비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더 늦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시작이 반이었고, 성실한 수강생모드로 돌입했다.
5개월 동안 개인레슨을 받으며, 나는 소나티네를 마쳤다. 디지털 피아노도 장만했다. 업라이트 피아노를 너무 사고 싶었지만, 층간소음문제와 이동의 번거로움 등등 현실적인 불편함이 많아 디지털 피아노를 선택했다. 요즘은 워낙 기계가 잘 나와 디지털 피아노도 제법 쓸만하다.
20대 시절에 했던 반주봉사도 다시 시작했다. 마침 내가 다니는 성당에 반주자 모집공고가 났고, 이것이 기회이고, 나에게 때가 왔구나. 싶어 덥석 잡았다. 상냥한 반주단장님 덕에 일타 강의에 버금가는 속성훈련을 받았고, 이제 제법 여유롭게 평일미사 반주를 해내고 있다.
얼마 전, 예전 직장 동료와 홍대 앞에서 만나 수다를 즐기고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맛있는 점심도 먹는 시간을 가졌다. 계속 백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내게, 그 친구가 물었다. “계속 백수로 지낼 거예요? 15년 직장 생활한 거, 아깝지 않아요?”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에이, 머가 아까워요. 하나도 아깝지 않아. 지금이 좋아요." 그리고는 웃으면서 다음 화제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며칠 뒤,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다 예전 책들을 뒤적여보았다.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 그 현란한 콩나물 가득한 악보들, 내가 대체 이 어마어마한 곡들을 다 해냈단 말인가. 지금은 계이름보기도 바쁜 그 악보들을, 나는 외우기까지 하며 마스터했었는데, 아. 아깝다.
그래. 나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15년간 벌어먹게 해 준, 백수생활하며 단절된 나의 직업, 나의 경력, 나의 업무능력들은 1초의 고민도 없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그리 길지 않은 5년의 시간 동안, 혼신을 다해 배운, 돈을 쓰게만 했지 벌게 해주진 못했던, 피아노에 대한 배움은, 그 배움을 놓았던 것이 매우 아깝다. 조금 더 일찍 시작할걸, 20대 때 가방사고 옷 사지 말고 그때부터 틈틈이 레슨 받아둘걸, 그러면 지금 베토벤 월광 소나타, 비창 소나타 이런 거 칠 수 있었을 텐데,.. 아깝다. 아쉽다.
물론 소나티네도 너무 재미있다. 무려 30년 만에 다시 보는 악보였지만 나의 손가락은 30년을 뛰어넘어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때의 그 선율과 리듬을. 어릴 적엔, 음악에 대한 즐거움보다는 도장 깨기 하는 기쁨, 내가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성취감, 피아노 잘 친다는 어른들의 칭찬에 대한 으쓱함, 이 더 컷 던 것 같다. 이제 40살이 넘고 보니, 음악이 좋고, 감성이 느껴지고, 희로애락이 담긴 클래식의 깊이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름답고 뭉클하다.
복날더위가 절정에 달한다. 5개월간의 레슨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간단한 소품곡들을 집에서 쳐보고, 소나티네 복습도 해보며 시간을 보낸다.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시간을 쌓아 나가다 보면, 내 손가락은 베토벤도 기억해 낼 것이고, 모차르트와 바흐도 기억해 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아깝지 않을 나의 때가 또 오겠지. 나는 그저 지금을 잘 살아내면 되는 것 같다.
엄마.
없는 살림에, 그 비싼 돈을 들여가며, 나 학원 보내주고 레슨 받게 해 줘서 고마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우리에게, 그 돈이 얼마나 큰돈이었을지.....
내가 좀 더 잘 해내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도 귀한 재주 잘 갈고닦아서
성당에서 보람되게 봉사하고, 내 시간 잘 쌓아가고 있을게.
내 피아노 연주에 크게 박수 치고 환호해 줘. 나는 늘 엄마의 응원이 제일 기뻤어.
오늘도 엄마에게 내 연주를 바칠게.
사랑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