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성탄절이 다가온다. 가톨릭신자에게, Lucia로 살고 있는 나에겐, 성탄절은 듣기만 해도 벅차오르고 가슴이 따듯해지는, 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증명하신, 거룩하고 감사한 날이다. 하지만 쓸쓸함과 그리움에 목 울대가 자꾸 매여오는 날이기도 하다.
2019년 12월 24일은 화요일, 평일이었다. 엄마는 계속 안 좋아지는 혈액수치와 몸 컨디션으로 인해, 12월 초, 골수검사를 하셨고, 24일 화요일, 골수검사의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가셨다. 나는 연말이라 회사업무가 바빴고, 나의 둘째 언니가 휴가를 내어 엄마의 병원에 동행했다. 그리고 엄마는 그날, 백혈병의 전단계인 골수이형성 증후군 진단을 받으셨고, 지금 당장 입원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들으셨다.
우리 집안은 형제자매가 4명인데, 그중 한 명이 대표로 엄마의 병원에 동행하게 되면, 의사와의 진료내용을 음성녹음한다. 일일이 진료내용을 카카오톡에 적어 넣기도 힘들고, 전화로 설명하는 것 또한 제법 번거롭다. 전달하는 과정에서 대화내용이 가감加減될 수도 있으니, 정확한 전달을 위해 음성녹음을 하고 그대로 녹음파일을 공유한다. 제법 확실하고 편리한 방법이다.
그날도 둘째 언니는 음성녹음을 했다. 그 녹음파일은 지금도 나의 구글드라이브에 있다. 다시 들을 수도 없고, 삭제할 수도 없는 그 파일은, 언제까지 나의 드라이브에 있게 될까. 여하튼, 30분이 넘는 그날의 진료내용을 우리 4남매는 수없이 반복해서 들으며, 메모하고 검색하고 공부했다.
그 음성녹음에는 주로 의사의 설명이 가득하다. 가끔 엄마와 언니가 질문하고 의사가 오래 설명한다. 그러다 둘째 언니의 흐느낌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그날의 흐느낌에 대해 묻지 못했다. 둘째 언니의 흐느낌소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꺼이꺼이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아니라, 혀를 깨물고 참다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에 가까웠다. 그 흐느낌소리에 이어,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언니의 등을 쓸어내리는 것 같다. 엄마는 흐느껴 우는 언니를 다독이며 말한다. ‘괜찮아, 엄마 괜찮아, 엄마 잘할 수 있어.’ 엄마의 그 말에 녹음을 듣던 나는, 이어폰을 내려놓고 함께 울었다. 나 또한 대성통곡하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숨죽여 울었다.
혈액암 판정을 받은 당사자인 엄마가, 자식을 위로한다. 당신의 골수검사결과를 들으며, 암선고를 받은 본인이, 자식을 위로한다. 괜찮다니, 무엇이 괜찮다는 말인가,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10개월 남짓이라는 시한부선고를 받으며 대체 무엇이 괜찮고, 무엇을 잘할 수 있다는 말인가.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진다.
헌데, 자식 가진 부모들은 다 그럴 것 같다. 자식 앞에서 함께 슬퍼할 수 없는 그 마음, 오열하지도 못하고 흐느껴우는 자식에게, 본인의 암선고보다는 자식 등 쓸어 주는 게 먼저일 것 같은 그 마음. 그 마음이 너무 쓰리고 아프다. 나의 엄마는, 전혀 괜찮지 않았을 나의 엄마는, 자식 앞에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이 자식들을 두고 떠나야 함이.
12월 초, 엄마가 골수검사를 받고 왔을 때, 나는 온 맘 다해 기도했다. 착한 일을 하면 산타할아버지가 도와주시겠지, 나의 신이 나를 어여삐 여겨 나의 기도를 모른 채 하지 않으시겠지, 주변에 선행도 베풀고 오래 연락이 끊어진 이들에게 안부인사도 전했다. 고해성사를 하며 신부님께 기도를 청하기도 했다. 부디 우리 가족에게 성탄선물을 달라고, 나의 엄마에게 우리 가족에게 따듯한 성탄절을 주시라고, 나의 신께 간절히 애원했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해 성탄절이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성탄절이었다.
2019년 12월 24일, 우리는 각자의 일을 마무리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각자의 방에서, 오래도록 울고 원망하고 한탄하며, 성탄전야를 보냈다. 그래놓고 성탄절에 만나, 미사를 함께 보고 엄마 집에 모여 아기예수님 탄생을 축하하는 케이크를 잘라 나눠먹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웃고 떠들고 맛있게 밥을 먹었다.
5일 뒤 엄마는 입원하셨고, 2020년 1월 1일 새해 첫날을 병원에서 맞이하셨다.
성탄聖誕.
그 성스러운 탄생의 날에도, 사람들의 일상은 이어진다. 무엇이든 다 이루어주시는,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것은, 쉽사리 누구에게나 찾아오진 않는다. 크리스마스 날에도, 사람들은 죽고 다치고, 이별하고 이혼도 할 것이며, 싸우고 병들고 신음하고 흐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웃고 떠들고 맛있게 밥을 먹어야 한다. 그 성탄절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마지막 성탄절이 될 수도 있기에, 원망과 오열로 밤을 새우고 퉁퉁 부은 얼굴로 크리스마스 날을 맞이하였다 해도, 우리는 웃고 이야기하고 사랑을 가슴에 가득 채워야 한다. 그 추억이, 오래오래, 아주 오래오래 나를 살게 할 테니.
사랑이 곧 사람이고, 사람이 곧 사랑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사람으로 보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만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므로.
사랑하는 나의 엄마. 엄마의 미소를 기억해요. 우리 함께 보낸 마지막 성탄절을 기억해요.
아픔 없는 곳에서, 겨울에도 빨간 장미 가득한 그곳에서, 엄마도 따듯한 성탄 보내요.
사랑해요 엄마.
Merry Christmas!! Happy Christ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