숀 크리스틴슨 감독, <커퓨(Curfew, 2012)>, 19분
아리아(?)가 흐르고 전화벨 소리가 다급하게 울린다. 피에 젖은 손이 가늘게 떨리며 수화기를 향한다. 초점이 나간 눈, 면도날과 이겨진 담배꽁초가 비친다. 피가 번진 욕조 안에 누워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듣고 있다.
몇 년간 교류가 없던 여동생이 협박과 애원을 뒤섞어 가며 오빠에게 부탁한다. 아이를 절대 혼자 둘 수 없으니 잠시만 아이를 돌봐달란다. 부탁할 사람이 오빠 밖에 없어서 정말 어쩔 수 없이 연락했다는 동생의 절박한 말투에, 한동안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천장을 응시하더니 이내 건조하게 ‘okay’로 답한다. 음악은 급변하고 그는 황급히 자신의 손을 뒤덮은 피를 씻어낸다.
어째서 그는 손목을 그을 수 밖에 없었나, 사실 더 궁금한 것은, 죽기를 작정하고서 손목을 그토록 깊게도 그어 온 욕조를 붉게 물들이고는 어째서 울리는 전화벨을 외면하지 못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기왕지사 죽고 나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인지, 죽기 전의 마음이란 그런 것인지 죄다 궁금해진다.
그렇게 피로 흔건한 면도날과 욕조를 뒤로하고, 리치(혹은 리처드)는 대충 열 살 정도(4학년이라니)되 보이는 동생의 딸 소피아와 만난다. 부모의 절박함은 아이들을 조숙하게 만든다. 소피아는 왠지 모르게 나른하고 지루한 어른의 눈빛을 하고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란 걸 꿰뚫은 눈빛. 여기 지금 어른이랍시고 자신을 맡아주러 온 삼촌을 훑어보니 한심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어떻게 돌봐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가이드 라인을 챙긴다. 누가 누구를 돌보는 건지, 자신을 가르치는 똑똑한 조카를 마주하니 삼촌 리치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른스러운 소피아와 철이 덜 난듯 보이는 리치가 한 프레임 안에 비칠 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지만 왠지모를 균형감에 마음이 놓인다. 삼촌을 수동공격형(passive aggressive)으로 정리해 버리는 냉정한 조카와 순간순간 현실에서 멀어지며 정신이 아득해 지는 삼촌. 그 둘이 5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다. 소녀는 욕조안의 삼촌을 세상으로 끄집어 내었고 그렇게 밖으로 나온 그도 조카와 시간을 함께하는 사이에 그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아직까지는 조금 더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이에, 서로에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기는 순간 말이다. 그런 순간은 불안과 초조 속에 버려졌다가 상대로 인해 느끼는 안도감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순함이나 진실한 어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일단 그 틈이 생기면 함께한 시간이 짧던 길던 그 틈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그 ‘틈’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상대를 알고 싶어 한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들이 궁금해지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내 상대를 걱정하고 잔소리를 늘어놓게 되며 서로를 보호하고 싶어진다.
19분의 짧은 시간동안 감독은 두 사람이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며 삶이 달라지는 모습을 음악과 함께 잘 버무려낸다. 좋은 영화에는 좋은 음악이 따르게 마련인데 볼링장에서 소피아가 레인 위를 걸어가며 추는 춤과 음악은 정말이지 절묘하고 신나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그 장면은 리치에게는 일종의 테라피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순간, 그의 세계에도 조금의 판타지가, 희망이 주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거기에 있다.(감독이 이 곡까지 썼다니 진짜 너무 매력적이다. 곡명은 “sophia, so far”, 아래는 유튜브 바로가기)
다시 현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안에서 자신에게 기댄 어린 조카와 나란히 앉은 리치의 멍한 눈 속엔 무슨 생각이 자리했을까 계속 상상해 보았다. 어쩌지 못하겠는 감정이 그 멍한 눈동자 속에 회오리 치고 있었다. 타인과 연결된 삶, 그것에서부터 오는 위로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 위로를 통해 조금 더 삶을 지탱하고 또 다른 위로를 건내 주고 싶은 욕구도 피어난다.
소피아를 통금시간(curfew)에 맞춰 여동생에게 데려다 주면서 그는 그가 거저 받은 진짜 위로를 그의 동생 메기에게 전한다. 형제란 참 오묘한 것이다. 진저리나게 싫다가도 다시 기대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남편의 폭행으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절망에 빠진 동생에게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고, 너는 절대 변하지 않는 ‘쿨함’을 지닌 멋진 동생이며 그 증거로 소피아가 ‘쿨한 것’이라고 위로한다. 논거가 너무나 멋진 칭찬이다.
창밖으로 절묘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마음이 젖어든다.(영화에서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피로 물든 욕조에 걸터앉아 다시 옷을 벗고 자기 자리라고 믿고 있던 그 욕조 속에 잠긴다. 붕대를 풀고 면도날을 세워들고 원점으로 돌아온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애원하는 듯 들리는 따뜻한 벨소리. 전화선을 뽑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든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동생의 제안, 그의 얼굴에 비친 미묘하게 엷은 미소가 그가 다시 한번 욕조에서 나올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흐르는 Alex Ebert 의 ‘truth’ !!
주연을 맡은 숀 크리스틴슨(Shawn Christensen)은 <커퓨(Curfew, 2012, 미국)>의 각본과 연출도 맡았다. 그 섬세한 표정과 눈빛은 자신이 감독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감독의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할것이므로 ㅋ). 이 단편으로 그는 아카데미와 끌레르몽 페랑, 스톡홀롬 영화제에서도 상을 휩(?)쓸었다. 영화를 보면 그럴 만 하군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트레일러
한쪽으로는 내내 영화의 오프닝과 음악을 떠올리고 한쪽으로는 내일 브리핑할 회의안건을 생각한다. 황폐하기는 나도 리치와 매한가지인가 싶어 웃음이 난다. 그도 사실은 욕조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 욕조에서 자신을 끌어낼 동기를 끝내 찾지 못해 그 무료하고 텅 빈 시간을 끝내려 한 것이다. 욕조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의 삶에 제한 시간을(CURFEW) 두려했던 그에게, 이제는 동기가 생겼으므로, 그 동기는 또 새로운 동기를 낳을 것이므로 더 이상 마른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
나는 지금 사무실이고 관계의 밀고 당기는 일에 지쳤으나 어쨌든 동기가 있어 이곳을 지키고 앉았다. 문득 동기가 사라진 것 같아 허망한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럴 때마다 적절하게 울려주는 전화벨이 내게도 있어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