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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인생이란 없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by 영롱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자국용 포스터

생일이면 누구나 주변의 사람들로 부터 축하를 받는다. 메세지를 받기도 하고 선물을 받기도 하고. 몇몇은 파티도 열며 시끌벅적하게 보낸다.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께는 감사를 전하고, 스스로도 여지껏 무탈하게 살아온 것에 안도하며 감사한다. 그래서 생일이면, 대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사실 생일이 돌아오는 것이 그닥 달갑지 않다. 다음 달이면 생일이 돌아오는데, 한달도 훨씬 더 남은 지금부터 뭔가 모르게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 이 불편한 기분이 궁금해서 왜 일까 생각해본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감사한일이 넘쳐나지만서도 사는 건 늘 피로를 수반하고 신나는 일도 많지만 슬픈일도 늘 있는 고로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되는 일은 좀 처럼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기뻐야 한다는, 행복해야 한다는 부담이 나로 하여금 생일을 피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다지 기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은 마음.


그 마음, 기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는 사실은 좀 쓸쓸한 것이다. 탄생을 축하하는 그 자연스러운? 선물이 생이라는 현실과 닿으면 쓸쓸해지게 되는 이치는 얼마나 서글픈가. 생일의 당연한 기쁨과 그다지 기쁘지 않은 나 자신과의 괴리로부터 오는 서글픔. (사실 세상에 당연한 것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태어났으니까, 살아가야 하니까, 아마도 행복한 생(生)일 꺼라 기대하지만, 나와 당신의 삶이 막상은 그다지 신나지 않아서 우리는 외롭다.


여기에 생에 대한 기대로 반짝이다 생으로 부터 밀려난 한 여인이 있다. 인생은 아마 즐거울 것이며 적어도 나의 삶은 기대보다 더 빛날 것이라는 그녀의 꽃빛 공상은 '미지의 세계'에서 '무지의 현실'로 바뀐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도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嫌われ松子の一生: Memories Of Matsuko, 2006)>의 마츠코의 삶은 그 괴리로 부터 오는 생의 쓸쓸함을 잘 담고 있다. (감독의 전작으로는 <불량공주 모모코(下妻物語 Kamikaze Girls, 2004)>가 비교적 유명한데, 요새는 뭘 찍으셨는지 모르겠네) 벌써 10년도 지난 이 영화는 강렬하고 다채로운 색감, 적재적소에 배치된 음악 덕에 여전히 무아?의 경지, 나를 잊는 경험을 선사한다.




마츠코는 사랑받고 싶은 어린소녀다. 병약한 동생 덕에 집안에서는 늘 순위가 밀린다. 근심 가득한 아빠를 밝게 웃게 하고픈 어린 소녀는 인생은 아마도 디즈니 동화의 다른 모든 공주들의 삶처럼 반짝일 거라 믿는다. 가족이 바라는 대로 교사가 된 23살의 마츠코는 사소한? 실수와 오해로 인생의 모든 나락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까, 음 ... 모.든.나.락.을. 말이다!



마츠코의 쓸쓸함


쓸모없는 인생이었어


자기 누이 마츠코의 죽음을 두고 그녀의 남동생은 말한다. 타인의 삶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들었을 뿐인데 심장이 덜컹거린다. 동생이 보기에 삶의 나락을 기어 다니다 죽어버린 누이는 쓸모없는 생을 살다간 먼지 같은 여인네일 뿐이다. 혐오스럽다 불렸던 누나, 마츠코.


사랑은 어째서 이토록 슬픈가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녀에게도 살아갈 동기가 필요했다. 나락에 던져진 후에는 그 동기는 더욱 간절해진다. 삶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그 무엇. 어떤 고난과 역경도 절대 나 자신을 꺽지 못하게 할 그런 동기, 생을 버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것' 말이다. 마츠코에게 살아갈 동기란 '사랑'이었다.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녀는 사랑을 원했다.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서, 병약한 여동생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믿어버려서 사랑을 더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분명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그 무엇, 그러니까 사랑을 얻기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혹은 안다고 믿었다. 전혀 회복될 수 없는 나락들이 그녀를 에워싼 순간에도 무엇이 삶이냐는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오, 사랑!


사랑에 목을 매는 마츠코의 모습이, 타인의 멸시와 폭력, 지독한 태도들을 견뎌내며 끝까지 그들의 곁을 지키려는 그녀는 한심하고 비참해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며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여성비하적이라 격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혐오스럽고 처절한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서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행에 대한 원망도 없다. 다만 자신의 사랑에 답하지 못하는 이에 대한 의문만이 있을 뿐이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이 좌우될 수 없으며 더욱이 내면의 기준을 흔들 수 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다.


이런 느와르 같은 사랑


철저하게 사랑을 위해 혐오스러움을 택한 여인


그녀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소년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청년 류.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마츠코의 후회 없고 미련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 두렵다. 사랑으로부터 도망친 그로 인해, 그녀는 다시 한번 절망한다. 뒤늦게 류는 도망의 끝에서 마츠코를 통해 '신神'을 만난다. 신의 사랑이 용서받을 수 없고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마츠코의 한없는 사랑이 꼭 그러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코 버리지 않는, 뒤돌아서지 않는 그런 사랑.


늘 고향의 강을 그리던 그녀, “다녀왔어” 라는 인사에 “어서와” 로 맞이해줄 누군가를 간절하게 바랬던, 평생 사랑을 주기만 하다 스러져간 마츠코는 까만 하늘에 별이 가득한 어느 밤, 고향을 닮은 강을 마주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삶은 쓸쓸할지언정 쓸모없지는 않았다.


태어나서 죄송한 삶, 쓸모없는 인생은 없다.


사실 그녀는 누구보다 생의 의지가 강한 여인이다


나의 외로움


한 살, 한 살 더 먹을수록 생일이 특별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가만히 보니 기쁨에 대한 감각은 날이 갈수록 무뎌지고 쓸쓸함이나 외로움의 감각들은 날로 예민해진다. 나는 크리스천인데, 생일이 불편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사실에 기인한다. 삶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크리스천의 ‘강요받은 기쁨’이 뭔가 모르게 불편한 것이다. 생명, 예수의 희생은 나에게도 무엇보다 귀하지만 세상이, 또 내가 속한 교회의 환경이라는 것이 스스로 생명의 기쁨을 묵상하고 기뻐할 시간을 채 갖기도 전에 ‘기쁨’ 이라는 감정을 강요하고 있다 생각이 들 때 나는 초조함을 느낀다. 미처 기뻐할 준비가 되지 못할 때 생기는 긴장감은 불편을 낳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참’ 기쁨을 누리라고 설득을 하시니. 기뻐하지 않으면 왠지 죄를 범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안 그래도 죄 될 것이 많은 세상에 죄를 자꾸 더하고 있는 기분이 든달까나. 생일의 기쁨도 이와 비슷한데,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왠지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생일은 왠지 더 쓸쓸하고 생(生)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마츠코의 그토록 지독한 외로움이, 그녀의 처절한 삶이 그 외현은 아닐지라도 나의 속 깊은 외로움과도 닿아있다. 근본적으로 외로운 족속인 우리는 스스로가 외롭다는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마츠코는 자신의 외로움을, 쓸쓸함을 온 몸으로 내뱉고 철저하게 인정한다. 때문에 그녀는 더 처절하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쏟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외면한다는 것은 자기를 배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외로움이라는 극단에서 궁극의 삶에 도달할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느낀다. 현재의 나의 외로움은 나 자신을 더 이해하고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할 기초가 되지 않겠는가. 아니면 이 착각 역시 또 다른 ‘디즈니 월드’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그건 쫌 절망 ㅋ)


마츠코가 행복해 하면 할 수록 비극은 더 비극이 되는구나


영화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꿈을 꾸는 건 자유지만 어디로 가도 앞은 깜깜하기만 하더라고. 하지만 그 깜깜함을 빛낼 단 하나를 마츠코는 찾았다. 여기 우리가 태어난 이 토양은 이미 너무 상해버렸지만, 계절도 불분명하여 늘상 몸을 사리게 만들지만, 태어난 이상, 우리는 여기서 깜깜함을 빛낼 밝은 빛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극중에서 주인공 마츠코를 연기한 나카타니 미키(中谷美紀)는 “구부리고 펴서(まげてのばして / 마게테 노바시테)”라는 곡을 노래하는데 맘이 오묘하게 슬퍼진다. 가사는 이러하다.


구부리고 펴서 별님을 잡자

구부리고 발돋움해서 하늘에 닿아보자

조그맣게 구부려서 바람과 이야기하자

활짝 팔을 벌려 해님을 쬐어보자

모두들 안녕

내일 또 만나자

구부리고 펴다 배가 고프면 돌아가자

노래를 부르며 집에 돌아가자


사랑을 향해 구부리고 펴기를 쉬지 않았던 그녀와 어떻게든 애를 쓰며 살아가는 여기의 우리는 별님을 잡을 수도, 하늘에 닿을 수도 없지만 바람과 이야기하고, 해님을 쪼이며, 지치고 힘들 때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당연한 기쁨’에의 강요, ‘두드러진 외로움’ 을 우리는 잘 견뎌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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